흔히 한국엔 인해전술을 앞세운 무식한 군대로 알려져있지만
실상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매너있고 군기가 잘 잡혀있으며
전쟁범죄(약탈,강간)과는 거리가 먼 군대였다고 한다
이는 중공군과 싸운 미군 현지지휘관뿐아니라 한국군 장성들의 회고록에서도 나타난다
채명신 장군의 회고록에서도 그런 모습들이 나오는데. 중공군들은 민가에서 신세질 일 있으면
잠은 헛간을 택해서 자고 농기구 같은 건 쓰면 반드시 주인에게 돌려주면서 사례했다고 한다.
북한군에 대한 평가와는 대조적으로 전장에서 이렇게 적에게조차 호의적인 평가를 받을 정도면 괜찮은 군대였음을 알 수 있다.
아마 국공내전이나 중일전쟁시절 민간인들을 잘 대우해줘서 인민의 지지를 얻은 경험이 이때까지 유지된 것이 아닌가 싶다.
민간 약탈이나 부패가 일상화된 국민당은 대만으로 쫓겨났으니 말이다.
내전이나 일본군이 쳐들어 오던 시절에도 중공군은 '인민의 나무가 다쳐서는 안된다!'며
말고삐는 나무가 아니라 돌에 씌웠고, '인민은 우리의 주인이다!'며
민가에서 잠을 잘때 민간인들은 안채에서 자게하고 자신들은 마당이나 헛간에서 잠을 잤다.
게다가 중공은 당시 러시아 혁명 직후의 소련처럼 '인민을 위한 나라를 만들었으니,
인민을 위해 열심히 일해보자!'란 마음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동료애도 있었는데, 김영옥 대령의 수기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중국군은 동료애가 좋았던 거 같다면서,
자신과 싸운 중국군은 죽은 동료 시체를 가능하면 회수해 가고, 상황이 안 좋아도 최소한 매장은 해두고 갔다고 한다.
위치가 얻어맞기 딱 좋은 곳이라면 밤중에 몰래 와서라도 묻어두고 갈 정도.
팽덕회 장군이 뛰어난 명장이었는걸 감안하면 이상한 말이 아닌게, 팽덕회 장군은 문화대혁명때는 안 좋은꼴을 당했다.
이는 30년 후의 중월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베트남에 진입한 중국군은 시체로 산을 쌓는 고전을 했음에도 베트남군 포로나 베트남 민간인들에게 해코지를 하는 법이 없었고,
들것이 모자르자 포로가 된 베트남군 부상병을 중국군 위생병이 업어서 야전병원에 이송할 정도였다고.
6.25당시 중국군은 사병에게까지 군단급 작전의 세부사항과 목표를 주지시켜서
상급부대과의 통신이 끊겨도 하급부대가 각자 알아서 움직일 수 있었다고 한다.
이것때문에 중국군은 열악한 통신사정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포위전에서 강점을 보일 수 있었다.
그래서 미군이 중국군 포로를 심문하면 사병들까지 군단급 작전을 알고 있어서 놀랐다고 한다.
이는 마오쩌둥의 군사이론에 따른 것이다.
그러니까 각 병사들이 사령부와의 전략-전술의 기본을 공유하여 스스로 판단하여 전략적 목표에 부응하도록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