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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 보는 조선의 역사와 왕들의 업적 (수정 중)
게시물ID : history_1076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한뎃집
추천 : 5
조회수 : 1491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3/07/27 23:26:32
《1. 태조(이성계)》
 
 당시 혼란기였던 고려 말에서, 최영과 더불어 불패의 장군으로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타고난 신궁(神弓)으로 부하장수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전장을 누볐으며, 왕위찬탈을 위해 일으킨 태종
'이방원(李芳遠)'과의 전투를 제외하면 전부 대승이었다.
 후에,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일으켜 조선의 첫번째 임금이 된다.
카리스마와 리더십으로 신하들을 꼼짝 못하게 하였으며, 무와 더불어 학식 또한 높았다.
정치적인 면에서는 정도전(鄭道傳)과 조준(趙浚) 등과 같은 신진사대부들을 뒷받침해주어 그들이 뜻을 펼 수 있게
해준다.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는데, 법궁의 이름을 정도전(鄭道傳)의 건의를 수용하여 경복궁(景福宮)이라 짓는다.
 
그러나 말년에는 세자 책봉을 잘못하여, 둘째 부인 '신덕왕후'의 아들 방석을 세자에 책봉한다.
그것에 분노한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 등 반대세력을 척살, 세자 방번과 그의 형 방번을 살해하고
정치적인 입장(정확히 말하자면 민심을 고려하여) 둘째 형인 '방과'를 세자로 놓게끔 한다(장남인 방우는 사망하였다). 나중에ㅡ, 신하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왕씨일가를 전부 죽이도록 하였다.
 
《2. 정종(이방과)》
 
 태조 이성계의 차남이자 이방원의 형. 허수아비 왕으로써,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성공하자 민심을 고려하여
그의 형 정종을 세자로 놓게끔 한다.
 
《3. 태종(이방원)》
 
 왕자의 난으로 집권한, 후에 정종의 자리를 물려받아 왕으로 즉위한 조선의 3번째 임금.
주요 공신으로는 [하륜(何崙) :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찬함]과 [조영무(趙英茂,) : 정몽주 척살에 일조함] 등이 있다. 방원의 형 방간이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자, 그것을 진압하였다.
 
 그의 업적을 논하자면, 대표적으로 4가지를 들 수 있다.
 
1. 외척제거 :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입김으로 왕위가 하루아침에 정실왕후 신의왕후가 아닌 신덕왕후의 자신인 방석이 세자에 책봉된 것 일화에, 누구보다 외척의 힘을 뼈저리게 실감한 태종은 자신의 왕비 민씨의 일가 민무구, 민무질 등을 제거한다. 태종은 역시 아들 세종의 장인인 심온을 제거하는 등 세종의 외척을 제거하였다.
 
2. 사병제도 폐지 :
 역시 사병의 힘(왕자의 난)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 태종은 이런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사병을 폐지하였다.
 
3. 6조 직계제 실시 :
 태종은 실질 행정 업무를 귀족 회의인 의정부를 대신하여 육조(이조, 호조, 공조, 병조, 형조, 예조)가 맡게끔 하였다. 이로써 왕권이 강화되고 대신들의 권력이 줄어들었으나, 세종 때에 의정부 서사제가 다시 부활한다.
 
4. 호패법 :
 호패법은 16세 이상의 남자에게 부여하는 일종의 민증과도 같은 것으로, 전국의 인구를 조사하여 군역을 바르게
내도록 하였고, 군역을 부과를 목적으로 시행되었으나, 백성들의 원성을 사 후에 폐지하였다.
 
《4. 세종(이도)》
 
 조선의 4번째 임금으로, 별칭이 '해동요순'일 정도로 성군이었다.
 
사극 중 '뿌리깊은 나무'에서 초기에는 아버지 태종에게 눌려서 눈치만 보던 임금으로 묘사되었으나, 사실은 그런게 아니라 세종은 지극한 효자여서 아버지 태종과 사이가 좋았고, 태종 역시 학식과 인품이 높은 세종을 아꼈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이 심씨일가를 말살하는 것을, 영원토록 덮을 만큼 태종을 사랑하였다.
 세종은 3남으로 형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을 제치고 세자에 책봉되었다. 책봉된지 1달 만에 왕위에 올랐다.
학식이 매우 높고, 선천적으로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여 웬만한 대신들은 세종과 경연을 할 때면 꼼짝을 못하였다.
즉위 초에는, 태종의 의도(상왕으로 물러나 정치를 한다)를 눈치채, 안건이 올라오면 언제나 '태상왕과 의논해 보겠다'고 하였다. 태종이 사망하자, 그의 정치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업적을 논하자면, 수도 없이 많다.
 
1. 훈민정음 창제 :
 
대표적으로 세종의 업적을 논하자면, 이것을 첫번째로 꼽을 수 있다. 세종은 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집현전 출신의 학자들을 기용하였다. 세종은 최만리 등의 대신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자모 28자의 글자를 반포하였으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 하겠다. (용비어천가도 이때 만들어졌다)
 
2. 앙부일구, 측우기, 물시계(자격루, 옥루) by 장영실(feat. 문종)
 
세종은 장영실을 통해 앙부일구, 측우기, 물시계 등을 제작하여 시간과 일식 날짜 등을 맞춰낸다.
다만, 측우기는 장영실 혼자서 해냈다고는 할 수 없다. 문종이 세종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3. 4군 6진의 개척(그렇게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 사민정책(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세종은 북방민족인 여진족들이 자주 국경을 침범하자 최윤덕, 김종서를 파견하여 각각 4군과 6진을 개척케 하였다. 더불어 세종은 북방으로 백성들을 이주시키는 사민정책을 펼쳤다. 후에, 6진의 김종서는 세종 사후 권력의 중심이 되었는데, 세조(수양대군)이 궐기하자 살해되었다.
 
4. 아악정리 by 박연 + 정간보 창제
 
세종은 학식 뿐만 아니라, 음악적인 면에서도 천재였다. 세종은 박연을 기용하여 당시 불완전한 악기의 조율과 악보를 편찬케 하였다. 다만, 박연은 세종이 종묘제례악을 만드는 것에서는 반대하였다(박연은 중국 음악이론가였다). 그래서 종묘제례악은 이조판서 허조(許稠)에게 명하였다.
세종은 또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유량악보인 정간보를 창안하였다.
 
5. 농사직설 by 정초, 변효문 + 팔도지리지 by 윤회, 맹사성 + 치평요람 by 정인지 + 월인천강지곡 by 수양대군
 
6. 조선통보(백성들 원성을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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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많은 업적이 있으나, 너무 많아 생략키로 한다.
 
《5. 문종(이휘)》
 
 세종의 밑에서 30년간 세자로 있었으나, 왕위에 오른지 2년 반만에 죽어서 단명하였다고 오해받는 왕.
아버지 세종의 영향을 받아 학문을 좋아하고 인품 또한 후덕하였다.
동국병감과 고려사를 완성케하였고, 고려사절요를 편찬하였다.
 
《6. 단종(이홍위)》
 
 왕위에 오른지 2년 반만에 승하한 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어린왕. 어린왕 답지 않게 신중하였고, 치밀하였다. 단종은 자주 성종과 비교되는데, 차이점은 단종은 상왕도, 외척도 아무도 없었고ㅡ, 주위에는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등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진 인물들이 즐비하였다. 단종은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자, 삼촌 금성대군(이유李瑜)에게 자주 의지하였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반란을 일으키자 결국 유배되었다.
 
《7.세조(=수양대군, 이유李瑈)》
 
 조카인 단종을 내치고 왕위에 오른 조선의 7대 임금. 공신으로는 한명회, 신숙주, 권람 등을 들 수 있다. 후에 대숙청을 시작하였다(단종이 사사하였다). 그가 행한 업적을 보자면
 
1. 왕권의 재확립(6조 직계제 부활)
 
세조는 세종과는 다르게 대신들의 권력을 줄여버리는 6조 직계제를 부활시켰다. 이로써 왕권이 재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사육신 등 단종 복위세력 제거
 
세조는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 사육신을 비롯한 단종 복위세력을 제거하였다. 후에, 김시습 등 생육신이라 일컫는 자들은 초야에 묻혀 단종을 추모하였다 한다.
 
3. 호패법 복원
 
4. 동국통감, 국조보감 편찬 시작
 
5. 경국대전 편찬 시작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사실이 세조가 경국대전을 편찬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조는 경국대전을 편찬 시작케 하였고, 완성은 2대 후인 성종 때에야 완성되었다.
 
《8. 예종(이우李俁)》
 
강력한 왕이 될 자질을 보였으나, 재위 13개월 만에 승하하였다.
 
----------추후 기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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