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완전히 만원 버스는 아니지만 사람이 좀 있는 버스를 탔습니다.
많은 분들이 서 계셔서 당연히 빈 자리가 없을 거라 생각하고 아무 생각 없이 좌석을 스캔했는데,
버스 뒤편, 두개짜리 의자가 시작되는 황금좌석 한쪽이 비어 있는 겁니다. 왼쪽 좌석이었고 창가 왼쪽에 덩치도 크고 콧구멍도 큰 아저씨가 앉아 있었죠.
나머지 자리는 꽉꽉 차 있었어요. 왜 그 자리가 비어 있는지 의문이 살짝 들었지만, 그냥 앉았습니다.
사람들이 왠지 힐끔힐끔 보는 듯한... 하지만 '느낌이 좀 이상하다'정도로 노골적인 시선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리에 앉은지 조금 지나자, 옆에 앉은 덩치 큰 아저씨가 대놓고, 새끼손가락도 아닌, 검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커다란 콧구멍을 천천히 드라마틱하게 후비시는 거예요
아주 과장되게, 둥근 원을 그리며 손가락을 놀리시는데 저 보란 듯이 대놓고... 절 힐끔힐끔 곁눈질로 보면서 그러더라고요
저는 너무나 당황했습니다. 그냥 흉내도 아니고 왕건이도 손가락과 함께 돌아가고 있었죠
어린애도 아니고 덩치 큰 시커먼 아저씨가 그러니... 다른 승객들은 이미 그 모양을 충분히 봤는지 분위기가 묘했어요
버스 안에는 침묵이 흘렀죠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가장 큰 염려는...
저 왕건이를 내 옷에 붙이는건 아니겠지
이거였어요
예전에 벌거벗거나 길에서 자위하면서 여자애들 놀래키는 변태들을 몇 본 터라, 이럴 때 제가 놀라거나 하면 더 이상한 짓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솔직히 웃겼어요
그래서 웃었죠
그냥 피식 웃은게 아니라, 고개를 슥 돌려 옆의 아저씨를 보면서,
"어? 하하? 아저씨 왜 그래요? 어머, 하하하하하!"
온 버스에 다 들리게 큰 소리로 웃었어요(저는 여성스럽게 호호 웃는 사람이 아니라서...)
웃긴 코메디 프로 본 듯이 잇힛힛힛 웃었죠
어쩌면 그 이상한 아저씨가 저에게 해꼬지할수도 있는 상황인데, 아저씨가 제 반응에 의외인듯 놀라더라고요,
그리고 그 짧은 순간에
"으흐흐흐..."
버스 안의 어떤 남자분이 억눌린 웃음소리를 냈어요.
그걸 시작으로 온 버스 안에 웃음이 터졌습니다. 서서히 웃음이 여기저기 숨죽여 나오더니 나중에는 하하하 웃기 시작했죠. 다들....
저는 웃느라 (그리고 무서워서) 그 아저씨 얼굴 똑바로 안보고 계속 웃기만 했는데, 자리에서 일어나더라고요. 그리고 버스 뒤로 갔는지 정류장에서 내렸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웃느라 못봐서....
나머지 승객들은 달리는 버스 안에서 한참 유쾌하게 웃었습니다. 버스 앞쪽에 서 있던 어떤 아주머니가 시원한 사이다 마신 표정으로 절 뿌듯하게 보시더라고요.
사이다 게시판을 보니 그 아주머니 표정이 떠올라서.. 이렇게 올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