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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 3만명 학살…일본 최초의 대량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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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릴케
추천 : 16
조회수 : 104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7/23 09:28:53

1995년 일본 홋카이도대 문학부 연구실에서 신문지에 싸인 채 발견된 6구의 유골 가운데는 ‘한국 동학당 수괴의 수급이라고 한다’는 일본어 글씨가 쓰인 유골(앞줄 맨 왼쪽)이 포함돼 있었다. 삿포로 농학교 출신 사토 마사지로가 동학혁명 당시 ‘수집’했던 이 유골 발견을 계기로 한·일 학자들의 동학농민혁명 공동연구가 시작됐으며, <동학농민전쟁과 일본>도 그 성과 가운데 하나다. 한국방송 화면 갈무리


‘동학 농민 학살’ 일본군 병사 일기 첫 공개

‘불태워 죽여라’ ‘모조리 총살’ 등
일본군의 동학 학살 상세히 드러나
당시 한국인 항일투쟁 부인하는
일 정부 주장 뒤엎을 획기적 자료 
“3만명 학살…일 최초의 대량학살” 

“그곳(나주)에 도착했다. 남문 바깥에 작은 산이 있었고 거기에 주검들이 쌓여 실로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 민병 또는 우리 부대 병사에게 붙잡힌 자는 심문한 뒤 중죄인은 죽였다. 매일 12명 이상, 103명에 이르렀는데, 그곳에 버린 주검이 680명에 달했다. 근방은 악취가 진동했고 땅은 하얗게 사람 기름으로 얼어붙었다….”

“(해남의) 잔존 동학 무리 일부인 7명을 붙잡아와 오늘(1월31일) 성 바깥 밭 가운데에 일렬로 세워 놓고 총검을 부착한 뒤 모리타 일등 군조의 호령에 따라 일제히 찔러 죽였다. 이를 구경한 한인(韓人)들과 통영(統營)병사들이 전에 본 적 없을 정도로 경악했다.”

청일전쟁기인 1895년 1월 일본 진압군이 전남 나주, 해남, 장흥 일대의 동학 농민군을 무차별 학살했던 당시, 후비(後備) 제19대대 제1중대 제2소대 2분대에 배속돼 있던 한 일본인 병사가 남긴 ‘진중일지’의 일부다. 1995년 7월 홋카이도대 문학부 연구실에서 효수당한 동학 농민군 해골이 발견됐고, 일본군의 공식보고서도 일부 남아 전하지만, 생생한 당시 상황이 담긴 개인의 일기가 공개된 것은 이례적이다.

진중일지는 이노우에 가쓰오(68) 홋카이도대학 명예교수가 지난해 봄 일본 한 향토사학자의 소개로 도쿠시마현 출신 병사의 후손으로부터 입수한 것. 이노우에 교수는 나카쓰카 아키라(84) 나라여자대학 명예교수, 박맹수(58) 원광대 교수와 함께 지난달 일본에서 출간한 <동학농민전쟁과 일본: 또 하나의 청일전쟁>(고분켄 펴냄)에서 이 일지의 상세한 내용을 밝혀놓았다.

미나미 고시로 대대장(소좌)이 이끈 후비군 제19대대는 “남김없이 죽여라”는 당시 일본 대본영의 명령에 따라 동학 농민군 ‘삼로포위섬멸작전’에 나선 부대였다. 미나미 대대장이 이노우에 가오루 당시 주한 일본공사에게 올린 공식보고서에선 나주 처형자 수를 230명이라 밝혔지만, 이 일지는 그 수가 3배 가까이 되는 680명이라 적시하고 있다.

이노우에 교수는 “붙잡아서 총살” “심하게 고문” “모조리 총살” “민가를 모두 불태워라” “불태워 죽여라(燒殺)” “고문하고 총살한 뒤 주검은 불태워라” 같은 말들이 곳곳에 나오는 이번 일지가 “일본군 학살에 따른 지옥도를 증언하고 있다”고 표현했다. 최근 동학농민전쟁 연구에 따르면, 일본군의 무차별 학살로 숨진 동학 농민들은 3만~5만명에 이른다. 3인 공동연구의 좌장인 나카쓰카 교수는 이 일지가 청일전쟁 당시 한국(조선)인들의 항일투쟁을 지금까지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일본 정부나 연구자들의 주장을 뒤엎을 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라고 평가했다.

일본 문부성은 일본 고교 일본사 교과서 집필자였던 이에나가 사부로(1913~2002) 교수가 1965년부터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유명한 ‘교과서 재판’에서 이에나가 교수가 자신의 책에 기술한 “청일전쟁 때의 조선인민의 반일저항” 부분을 삭제하도록 명했고, 1997년 일본 최고재판소도 문부성 손을 들어주었다. 이노우에 교수는 이 책에서 당시 일본군과 일본 정부가 한국인들의 저항 사실을 숨기기 위해 동학 ‘토벌’ 과정에서 전사한 일본군을 청국(중국)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날조해 야스쿠니 신사 명부에 올린 사실도 밝혀냈다.

나카쓰카 교수 등은 동학농민전쟁 학살을 “일본군 최초의 제노사이드(대량학살)”로 규정했다. 중일전쟁과 2차대전 때의 ‘난징학살’ 등 일본군이 20세기에 저지른 집단 인종학살의 시초가 19세기 말 동학 때부터 시작됐다는 얘기다. 역사가 하라다 게이이치는 최근 저서 <일청전쟁>에서 청일전쟁 당시 전사자를 “일본인 약 2만명, 중국(청)인 약 3만명, 조선인(동학농민전쟁 전사자) 3만명 이상”으로 추산했다. ‘청일전쟁’이라는 이름을 단 전쟁의 최대 희생자는 실은 한반도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실 동학 농민군과 일본군의 싸움은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후비 제19대대의 경우 전사자는 단 1명, 질병과 사고 등으로 숨진 자는 36명이라는 기록도 있다. 서방의 최신식 라이플총으로 무장한 일본 진압군(최대 4000명으로 추산)은 ‘죽창과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깃발을 흔들면서 피리를 불고 북을 치며 순식간에 언덕을 하얗게 덮을 정도로 일본군을 향해 쇄도하던’ 농민들을 손쉽게 제압했다.

청일전쟁 당시 발행된 <우와지마 신문>에 실렸던 홍주(충남 홍성군)에 투입된 제2중대 배속 일등군조가 형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고 <동학농민전쟁과 일본>은 전한다. “적(농민군)이 근접하기를 기다렸다. 적은 앞다퉈 어지러이 진격(亂進)해 왔다. 400m까지 다가오자 세 방면에 포진한 우리 부대가 먼저 저격을 시작했다. 백발백중, 실로 유쾌했다. 적은 오합지졸의 주민(土民), 공포감으로 전진해 오지 못하고.(이날 3100여발을 쏘았다)”

당시 동학 농민군 학살은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와 무쓰 무네미쓰 외상, 이노우에 가오루 주한 공사 등의 직접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일본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발발 뒤 청나라가 파병하자 톈진조약을 핑계로 건너와 경복궁을 점령했다. ‘척양척왜’를 내세운 동학 2차 봉기는 이런 일본에 대한 저항의 의미가 컸다. 후비 제19대대를 이끌었던 미나미 대대장은 메이지유신 때 막부타도·존왕양이를 앞세우며 결성한 조슈번 지방군의 간부였던 이노우에 공사의 직속 부하 출신. 당시 일본군은 정규군과 예비역, 그리고 후비병(後備役)으로 짜여 있었는데, 후비병은 전장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28~32살의 기혼남성들로 구성돼 있었다. 명성황후(민비) 시해를 현장에서 자행한 것도 바로 후비병들이었다.

나카쓰카 교수 등은 개별 전투에서 동학군은 참패했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동학군의 장기 게릴라전이 일본군을 곤경에 빠뜨렸으며, 이는 “나중의 중국 공산군이나 베트콩의 게릴라전 같은, 강자인 서방 침략에 맞서 약자인 아시아인들이 전통적으로 저항하는 방식의 선구를 이룬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승동 기자 [email protected]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9676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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