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노트를 들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다.
그는 책상 앞에 앉자마자 조급하게 연필통을 뒤적거리기 시작한다. 어떤 영감이 떠올랐나보다.
연필통에는 다섯 자루의 연필이 꽂혀있다. 원래는 여섯 자루였다.
어제 부러진 연필 한 자루가 그의 발 언저리 부근에 있는 휴지통에 처박혀있다.
남자는 검지로 다섯 개의 연필 끝을 하나씩 굴려본다. 어떤 연필이 자신의 글쓰기를 좀 더 즐겁게 해줄지를 생각하는 걸까.
연필들이 서로 부딪힌다. 곧 그가 마음에 드는 연필을 선택한다. 연필도 자기가 선택된 것에 만족하는 듯 보인다.
남자가 고심하며 첫 문장을 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동등하다.
새하얀 노트에 적색 글씨가 쓰여진다.
언제나처럼 일단 첫 문장을 쓰고나자 다음 문장부터는 물 흐르듯이 글이 써진다. 남자의 두터운 손에 힘이 들어간다. 연필을 꽉 움켜쥐고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사랑하는 연인을 바라보듯이 사물을 보라. 그것이 시작이다.
이 문장을 쓰고나서 쉴세없이 움직이던 그의 손이 멈춘다. 그의 인상이 구겨진다.
연필을 쥔 손에는 서서히 힘이 들어가고, 뚜두둑 소리를 내며 연필을 부러뜨린다.
그가 두 동강난 연필을 휴지통에 집어 던져버리고 꽥 하고 신경질을 내지른다.
그러다가 가슴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심호흡을 한다. 짜증으로 일그러진 얼굴도 몇 번 쓰다듬는다.
잠시 후, 마음이 진정된 그가 연필통에서 새로운 연필을 고른다. 연필통의 연필들이 서로 부딪히고 덜그럭대면서 빙글빙글 돈다. 어지럽다.
이제 그만 하고 싶다. 애초에 헛된 희망을 품지도 않았다. 부디 이번에는 나를 선택해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