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 오를 멸하여 통일을 이룩함으로서 '잠시나마' 사회가 안정되고 백성들이 새로운 사회에 대한 기대를 품으면서 진의 수도 낙양을 중심으로 새로운 문학사조가 생겨납니다.
당시의 연호였던 '태강(太康)'에서 이름을 따서 '태강문학' 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새로운 문풍은 태평기를 맞은 사회적 분위기를 맞이하여 화려하고 수식적이며 탐미적인 색채를 띄었는데 그 대표 문인들은 익히들 아실 장화를 필두로 장협, 장재, 육기, 육운, 반니, 반악, 좌사 등 여덟명으로, 후한 말을 대표하는 7인의 문인들을 부르는 건안칠자처럼 '태강팔대' 라고도 부르기도 합니다.
육기, 육운 형제
그 중 장화는 이 태강팔대의 필두이자 주재자로서 전국의 이름난 문인들을 긁어모아 문학교류에 진력했고 특히 멸망당한 오나라의 이름난 문인들이자 육손의 손자들인 육기, 육운을 초빙하여 중원과 강남의 교류를 시도하는가 하면 진의 2대 황제 혜제 사마충의 황후 가남풍의 조카가 되는 가밀이란 인물도 장화와 궤를 같이하여 '24우(友)' 라는 문학집단을 만들어 서로의 문장과 시를 주고 받으며 즐기며 태강문학의 번영에 일조했습니다.
그 중 최고의 문학작품은 앞서 말한 태강팔대 중 하나인 좌사가 지은 <삼도부>란 작품으로, 그 제목에서도 뜻을 유추할 수 있듯이 삼도부란 '세 도읍을 다룬 부(賦)' 란 뜻이며 이 '삼도' 란 과거 삼국시대의 세 도읍, 즉 업, 성도, 건업을 말합니다. 좌사는 이 세 도읍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묘사할 뿐만 아니라 그 곳의 민심, 풍물, 상황 등까지 망라하여 각자 서촉공자, 동오왕손, 위국선생이란 가상의 세 인물이 저마다 나열식으로 수사적인 문장을 사용하여 각자 세 도읍을 자랑하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참신한 방식을 보여주어 이 시기의 태강문학은 절정에 달합니다.
한대의 '부' 를 계승한 작품이지만 태강문학 특유의 화려한 문장과 유미적인 표현으로 치장되어 있었기에 당대인들의 큰 인기를 끌었고 문인들이 앞다투어 삼도부를 베끼는 바람에 낙양의 종이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헤프닝도 일어났다고 하니 가히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같은 태강팔대이자 당대의 대문호였던 육기는 좌사가 심혈을 기울여 10년에 걸쳐서 삼도부를 썼다는 말을 듣고 그깟게 뭐라고 10년에 걸쳐 쓴단 말인가 하며 무시했지만 막상 직접 본 이후에는 가히 그럴만 하다 하고 인정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삼국시대의 위를 계승했던 서진이었지만 조조, 조비, 조식의 '삼조' 와 건안칠자로 대표되는 조위의 문풍까지 계승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당대의 혼란한 현실을 직시하고 영웅적 기개로 태강문학의 형식적이고도 수사적인 문장보다는 사실적이고도 직설적인 표현으로 혼란한 천하를 개탄하고 자신의 감정을 노래하던 한위풍골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지요. 오히려 하안, 하후현 등의 조상일파나 위진시대에 걸쳐 활동하던 죽림칠현이 탐닉하던 청담사상과 가깝다는 느낌입니다.
물론 서두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진이 대륙을 통일함에 따라 사회가 안정되면서 유미적이고 화려한 문장형식을 중시하는 새로운 문학사조가 생겨났겠지만 말이지요.
당시 팔왕의 임지
하지만 이러한 태강문학도 팔왕의 난이라는 대국면을 맞이하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듭니다. 이 난리로 태강문학의 거물들인 장화는 물론 육기, 육운 형제가 숙청당했고 그 밖의 문인들도 연루되어 줄줄이 해를 입었기 때문이었죠. 고작 10년 남짓동안 번영하던 태강문학은 이렇게 끝이 났고 사실 이때 이후로는 이렇다할 문학활동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러다가 이후 팔왕의 난에 이어 서진을 완전히 무너지게 만든 북방 이민족들의 침입, 즉 영가의 난이 발발하게 되어 서진은 거진 무너졌고 낭야왕 사마예는 강남에서 서진의 명맥을 이어 동진을 건국합니다. 그리고 의외로 이 시기에 잠시나마 문학활동이 있었는데요, 3대 황제 회제 사마치의 연호인 '영가' 에서 이름을 따서 '영가문학' 이라고도 부릅니다.
사실 이전에 성행하던 태강문학에 비해 그리 성행하지도 못했고 그 난리통에 성행할 수도 없을 뿐더러, 사실상 듣보잡 스러운 문학사조이긴 하지만 굳이 짚고 넘어가자면, 영가문학은 두가지 사조로 나뉩니다.
하나는 이민족에게 탈탈 털리고 강남으로 쫓겨간 현 세태를 개탄하면서 점령당한 화북지방을 되찾자는 염원과 비분강개의 심정을 담아 노래한 사조, 다른 하나는 이와 정반대로 현실에 체념하고 그냥 청담이나 열심히 파자 식으로 정신승리성 짙은 현실도피적인 사조인데요. 전자는 유곤이라고 하는 문인, 후자는 곽박이라고 하는 문인이 대표적입니다.
유곤과 곽박
실제로 이 두문인의 생전 행적은 그들의 문학사조처럼 정반대였습니다. 유곤은 무너진 서진의 유신으로서 화북에서 열린 5호 16국 시대 와중에도 병주 일대에 할거하여 끝까지 항전하다 전사한 인물이고 곽박은 동진의 이름난 청담가로 위진남북조 문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물론 동진 초기에는 곽박을 비롯한 후자의 사조에 속한 문인들도 열심히 중원회복을 노래했지만 서진이 완전히 결딴나고 화북에 이민족 왕조들이 완전히 자리잡기 시작하자 점차 현실에서 눈을 돌려 뜬구름 잡는 청담에만 몰두했다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이리하여 동진에서는 곽박을 시작으로 한 청담사상이 널리 유행하여 동진에서는 비분강개보다는 체념적이고 해탈한듯한 분위기가 지속되었고 결국에는 영가문학의 청담적인 사조만이 계승되어 동진 이후의 송, 제, 양, 진 등의 역대 남조 왕조들로 이어져 훗날 남조 양나라 때의 경릉팔우의 영명문학같은 탐미적이고 형식주의를 중시하는 문풍을 낳게 되는 것이고요. 그래서 위진남북조 문화사에서 청담사상을 빼놓을 수 없는 것 같네요.
허접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