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이 너무 심하다. 소나기가 잠시 내렸으나, 안개가 끼고 흙비가 왔을 뿐이다. 기후가 순조롭지 못하여 이렇게 되니, 장차 벼농사 형편을 나가 보리라.” 하시고는 직접 도성 주변의 상태를 시찰 하시겠다고 함.
하고, 드디어 서문 밖에 나가 두루 살피고 돌아와서, 대언(代言, 나중에 승정원 승지)들에게 말하였다.
“금년 벼농사는 모두들 ‘꽤 잘 되었다. ’고 구라치더니, 오늘 보니 눈물이 날 지경이다. 오늘 본 영서역(迎曙驛) 홍제원(弘濟院)의 땅은 비옥한 편인가 메마른 편인가.”
하니 지신사(知申事) 곽존중(郭存中)이 대답하기를,
“이들 땅은 원래 메마른데다가 더구나 가물어서, 벼농사가 이렇게 잘못 되었습니다.”
고 하였다. 영서 땅은 원래는 비옥한 땅인데, 곽존중이 임금이 근심하실까봐 메마르다고 대답한 모양임.
이날 임금의 행차에는 따로 군사들을 부르지 않고 입번(入番)한 내금위 사금(內禁衛司禁, 경호원)만 거느리고 산(繖, 햇빛 가리개)과 선(扇, 큰 부채)은 쓰지 않고 단촐하게 나가셨음.
벼가 잘되지 못한 곳을 보면, 반드시 말을 멈추고 농부에게 까닭을 물었고 아예 점심 조차 들지 않고 돌아왔다고 함.
□ 7월 7일
임금이 가뭄을 민망하게 여겨서 영돈녕 유정현(柳廷顯)·좌의정 이원·찬성 황희(黃喜)·형조 판서 권진(權軫)·병조 판서 조말생(趙末生)·이조 판서 허조(許稠)·호조 판서 안순(安純)·예조 판서 이맹균(李孟畇)·대제학 변계량(卞季良)을 불러서 말하기를,
“20년 이래로 이와 같은 가뭄은 보지 못하였는데, 생각하건대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이라, 감히 커다란 집에 편안히 있을 수 없어서 본궁으로 피하여 있고자 하나 더위는 혹심한데 군사가 있을 만한 곳이 없어서 그냥 이 궁에 거처하는 것이다. 궁중에 거처할 만한 곳이 세 곳인데, 내가 정전(正殿)에 거처하지 않고 바깥 측실(側室)에 가서 거처하면서 재앙을 그치게 할 도리를 생각할까 한다. 그러나 오히려 서이궁(西離宮)에 나가서 하늘의 꾸지람에 답하였으면 하는 생각인데, 어떠하냐.”라고 하심.
가뭄들고 흉년인데 큰 궁궐에서 지내기도 미안해 하시는 모양임.
□ 7월 9일
세종 임금의 덕인지는 몰라도 얼마 있다가 비가 흡족하게 내림.
정부와 육조가 예궐(詣闕)하여 계하기를,
“성심(聖心)이 하늘을 감동시켜 이에 비가 내리오니, 신 등이 기뻐서 하례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어찌 능히 비를 오게 하였겠느냐. 이것은 모든 신하들이 한마음으로 두려워하고 수양 반성하였기 때문이다.”
정부와 육조에서 술을 올려 기력을 조양(調養)하도록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세 번이나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본디 술을 좋아하지 아니하니 비록 마시지 않아도 좋으나, 매양 늙고 병든 경들이 이른 아침마다 조회할 때에 술을 내리고 싶었으나, 가뭄으로 인해서 실행하지 못하였던 것인데, 지금 경들을 위해서 그 청을 따르겠다.” 이날은 약소하게 임금과 신하들이 기분좋게 한잔 하심.
□ 세종 12년(1430년 경술)
호조에서 전라도 감사의 관문(關門, 보고서)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고창현(高敞縣)에 나이 8, 9세 된 계집아이가 있어 미친 병을 얻었는데 부모와 족친(가까운 친척)이 없사오니, 청컨대 양미(糧米)를 하루에 한 되씩을 주게 하소서.”
하니, 명하여 아뢴 대로 하게 하고, 아울러 수령에게 일러 상시 보살피고 춥거나 굶주림에 이르지 않도록 하게 하였다고 함.
놀랍지 않은가? 15세기 지구 동쪽 변두리 좁쌀만한 나라 조선의 전라도 지방 촌구석의 고아가 된 정신이상자 아이 하나의 싱태까지도 임금에게 보고가 되고, 보고 하는 관리는 그 고아에 대하여 하루에 겨우 쌀 한 되씩 무상지급 하겠다는 조치사항까지도 보고가 되는 초일류 엽기 복지 국가임.
□ 재해가 발생 할 경우 임금도 물론 최선을 다해 정치를 하겠지만 신하들이나 지방관료들도 비상 상황임.
기근이 심할 경우 각 도에 경차관(중아에서 파견된 벼슬아치, 파견된 목적에 따라 임금의 백지 위임을 받는다.)을 파견. 백성들을 구휼하고 수령의 성적을 매김,
만일 수령으로서 똑바로 업무를 보지 않고 백성들을 굶기는 자는 3품 이상은 중앙에 보고하여 임금과 중앙의 고위관료들이 처벌하게 하고, 4품 이하는 경차관이 직접 현장에서 볼기짝을 치는 등의 즉결처분을 내림.
여기서 관찰사, 목사 등은 3품 이상이고 고을 현감 등은 그 이하임.
□ 세종 5년(1423년 계묘)
임강 고을의 현감(臨江縣監) 이명의(李明義)라는 자가 진제(賑濟, 구휼)하는 미두(米豆)와 장(醬)을 줄여서 착복하여 백성들이 굶주려 죽고 부종(浮腫, 굶어서 퉁퉁 부어 있는 상태)이 나게 하였다고 하여 형률에 의하여 곤장 1백 대를 맞을 위기임.
세종 임금께서 고을 수령으로써 고생 많은데 곤장 1백대는 과하다고 생각 하셨나 봄, 60댜 만 차게 하심. 관직도 그대로 하게 하시고...
(어? 이거 왜이러심?)
이 장면은 세종 임금이 고을 현감을 두둔하는 장면이 아님.
원래 어느정도 급이 되는 벼슬아치들은 아주 큰 중죄가 아니면 양반체면에 직접 매질을 당하면 안되니 매 값에 해당하는 재물을 벌금 형식으로 납부하고 매를 맞은 것으로 하는 "속장" 이라는 제도가 있음.
그러나 고을 수령으로써 백성들을 굶주리게 하는 자는 이 속장 제도를 이용할 수 없고 실제 매를 무조건 맞아야 함.
그리고 100대를 맞아야 하는 고을 수령을 60대 만 치는 이유는 100대 맞으면 죽거나 병신 되니까 60대 만 치고 다시 현직으로 복귀하여 다시 고을 수령을 해야 함. 그 다음에 또 같은 사건이 생기면 또 매를 맞거나 아니면 아예 영구 파직 되거나...
한번 이런 처벌을 받은 고을 수령은 어지간한 강심장이 아니면 어금니 꽉 깨물고 백성들 살리러 다녀야 함.
□ 충청도 도절제사(都節制使) 심보(沈寶)
이 양반이 가뭄이 심하게 든 세종 5년에 정신 못차리고 사냥 하러 다님. 요즘으로 치면 메르스에다 경기 불황인데 골프 대회 연다던 그 분?
신하들은 심보를 파직 시키라고 요구하나 심보는 풍산군(豐山君) 심귀령(沈龜齡)의 큰아들임. 심귀령은 좌명 공신(佐命功臣)으로 태종 임금 때 끝발 날리던 양반이고 또 심귀령은 소헌왕후의 청송 심씨와는 사돈지간임.
공신의 아들에 와이프의 사돈집안 사람이므로 파직까지 가지 않을수도 있던 사안임.
그러나 뭐 공신이고 나발이고 세종 임금은 영의정 유정현(柳廷顯)과 논의한 후 심보를 파직 시켜버렸다고 함.
(당시 도절제사는 보통 2품 이상 관리를 임명하며 해당 지역 병권의 책임자임.)
심보 할배는 파직 후 이렇다한 관직을 얻지 못하다가 몇 년 뒤에 쓸쓸히 돌아가심.
□ 가뭄들고 흉년 오고 해서 고을 수령들이 세종 임금의 명령으로 많이들 뚜드려 맞고 쫓겨 나고 그러니 이게 형평에 안맞나 봄.
의금부에서 임금에게 요청 하기를,
“황해·평안·강원 삼도의 감사(관찰사)들이 교지를 능히 받들어 행하지 못하여, 도내의 인민들을 많이 굶어 죽게 하였으니, 모두 이들이 백성에게 친근한 직책인데도, 수령은 죄를 논단(論斷)하고, 감사(監司)는 죄를 주지 않으니, 실로 불공평합니다.”
라고 하니, 임금이 흠~ 맞는 말이군...!!!
평안도 감사 성달생, 경력(經歷) 김간(金艮)과 강원도 감사 이명덕(李明德), 경력 고약해(高若海) 등을 모두 관직을 파면 시켜 버리고 역마를 타지 말고 개인말 타고 기름값도 각자 알아서 쓰고 서울로 올라와서 사직서 제출하라고 명령 하심.
물론 굶주린 백성의 수가 적은 황해도 감사는 논죄하지 않으셨는데 당시 황해도 감사는 편산 신씨 신개(申槪)였음.
이럴때 능력 발휘 잘하셨나 봄. 신개 할배는 나중에 좌의정까지 하심.
□ 보통 조선 시대에서 고을 수령이 반란죄 같은게 아니고 일반적인 뇌물죄나 고을의 곡식을 훔쳐 쓰거나 하면 파직 정도로 가볍게 마무리 되는게 관례임.
세종 6년 평안도 지덕천군사(知德川郡事, 덕천군의 수령임) 최세온(崔世溫)이라는 자가 관가의 물건을 훔쳐 쓰다 걸렸나 봄.
처음에는 일반적인 관물을 도둑질 한 죄로 처벌 수위를 조절 하다가 나중에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눠 줄 진제미(賑濟米)를 훔쳐 사용한 것이 들통남. 더욱더 고을에서 굶주림으로 몇몇 백성들이 죽어 나갔나 봄,
격노하신 세종 임금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진제미(賑濟米)를 도적질하여 백성들을 굶어 죽게 하였으니, 다른 장물 먹은 관리와 비할 것이 아니다.”
하고는 시원스럽게 무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목을 베어버리심.
다른건 다 참아도 백성들 굶겨 죽이는 고을 수령은 못봐주심.
□ 당시 조선의 지방 관리들의 인사고과의 기준 중에 가뭄이나 흉년에 지역 백성들이 타 지역으로 유랑 생활을 떠나서 인구수가 줄어들면 감점, 그리고 자기 지역에서 굶주림이나 전염병으로 사망자가 많이 발생 하면 감점이 됨. 아주 많이...
보통 지역의 고을 수령들은 대규모 유랑민이 타 지역에 발생하여 그나마 형편이 괜찮은 자기 지역으로 그 유랑민이 흘러 들어올 경우 입장 거부 시켜 버림. 왜냐하면 타지역 백성이건 자기 지역 백성이건 관계 없이 자기 지역에서 사망할 경우 인사고과가 감점 되기 때문임.
거주의 자유가 없던 조선시대이므로 일단 돌려 보내는 것은 법적으로 맞음.
그러나 세종 임금은 이 경우에 때를 가리지 않고 돌려 보낼 경우 겨울철이라면 가다가 얼어 죽을수도 있으니 날씨가 풀리면 돌려 보내라 하심. 보낼때는 가다가 먹을 양식까지 무상으로 꼭 챙겨주라고 명령을 내림.
□ 세종 임금 중반기까지는 수령이 흉년에 백성들을 제대로 구휼하지 못하면 속전(贖錢. 곤장을 맞아야 할 죄이나 곤장 대신 돈을 받고 매값을 대신함.)으로 처벌을 하였으나 후반으로 가면 속전 받는것을 금지 시켜 버림.
그리고 처벌 받은 수령이 파직 당하는게 아니고 다시 그자리로 복귀 시켜줌. 잘 하면 승진 하지만 못하면 또 곤장 맞음.
보통 현이나 군의 수령(현감,지사)는 곤장 60~70대, 그보다 직급이 높은 목사나 감사는 태형 50대 정도라고 함.
그러니까 2품이나 3품 씩 되는 고의 관료들을 얼덩짝 벗겨 놓고 매질을 하는 장면이 벌어짐.
□ 세종 26년(1444년 갑자) 5월
경기도에 봄 가뭄이 심해 모를 심지 못한 고을이 여럿 발생함.
세종 임금께서 경기도 감사 이선(李宣)을 불러 문책하기를,
“도내의 인민들이 어째서 기근(饑饉)을 당하게 되었으며, 파종은 어째서 시기를 잃게 하여 위임(委任)한 뜻이 이와 같단 말이냐, 전일에 조치한 상황을 모두 다 말하라.” 하니, 이선이 이런 저란 변명을 늘어 놓았나 봄.
빡친 세종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정부에게서 전월 20일쯤에 본도(本道)의 종량(種糧)이 넉넉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렸었는데, 경이 들은 바도 그때였으니, 경은 위임(委任)된 자인데도 어째서 늦게 들었는가.”라고 세세하게 따지고 듬.
이선이 엎드려서 벌벌 떨면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단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승지들을 시켜 이선의 포치(布置, 긴급 상황에 대한 대처)한 상황을 힐문(따져 묻고)하게 하고, 인하여 이선에게 이르기를,
“경의 말을 들으니 경의 계획이 엉성하여 이에 이르렀다. 내가 백성들의 일에는 비록 가까운 족친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용서하지 않았으니, 만약에 한 사람이라도 굶어 죽는 일이 있으면 경을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어름장을 놓으심.
이선은 태조의 서녀인 의령옹주의 아들임. 족보로 따지면 세종 임금에게는 숙부가 됨.
아무튼 결국 이선은 파직 당했다가 집현전 출신에 임금의 족친이라서 그런지 몇 달 뒤에 복직 되었으나 별로 중요하지 않는 자리를 몇차례 옮기게 됨.
□ 세종 29년(1447년 정묘)
봄 가뭄도 극심하고 그전해의 농사도 망쳐버린 평안도
의금부(義禁府)에서 평안도 감사 권극화(權克和)와 지상원군사(知祥原郡事) 정포(鄭抱) 등이 흉년 구제를 잘못하여 약 60명 정도가 굶어서 부종(浮腫)이 났나봄. 이제는 고을 수령이든 관찰사건 이제는 가릴것도 없이 처벌 하라고 하심.
권극화는 장성현(長城縣)에 무려 귀향씩이나 보내고 정포는 속전(贖錢)을 받지 말고 곤장 90대, 풀파워로 처벌하라고 하심.
그런데 이 경우 처벌 근거가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 즉 반란죄 다음으로 큰 죄목인 임금의 명령불복종 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