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소설은 브라더수(BrotherSu)의 노래 '아쉬워서 그렇지(feat. 기리보이)를 모티브로 하여 창작되었음을 앞서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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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색하다. 며칠간의 탐색 끝에 찾아낸 술집, ‘껄떡쇠.’ 간판을 본 그녀가 처음으로 웃기에 자신만만하게 들어온 것까지는 좋았지만, 주문을 한 후부터는 아무 대화도 하지 못했다. 소개팅인데 어째서 JSA의 긴장감이 느껴지는 거지. 빈 테이블이 나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 같다. 위험하다, 어서 이 경색된 분위기를 해소하지 않으면.....
“저, 준희씨도 영화 자주 본다고 그러셨죠. 어떤 장르 좋아하세요?”
“저는 호러 좋아해요.”
젠장, 저 얼굴에 호러라니. 나름대로 영화를 많이 봤다고 자부하기에 이 화제라면 잘 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필 기피하는 장르였다. 그래도 대표작 몇 편의 스토리는 알고 있으니 어떻게든.....
“아, 그러시구나. 그럼 최근에는 어떤 영화를.....?”
“인간지네요.”
쉣. 그건 호러를 뛰어넘어 고어 아닌가? 자막제작자들마저도 구토가 나서 번역을 포기했다는 톰 식스의 괴작.
“그, 그건 국내에 상영금지되지 않았나요?”
“토렌트요.”
“.....”
혹시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저러는 건가. 아니, 표정에 귀찮은 기색이 없다. 수없이 소개팅을 까인 내 감이 말해준다. 저 표정은 진심이라고. 귀여운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성격에 반했지만, 이런 취향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물론 취향은 존중하지만 어떻게 대화를 풀어나가야 할까. 등으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종업원이 쟁반을 들고 테이블로 다가왔다.
“술이랑 니가사라짬뽕 나왔습니다.”
메뉴 이름을 들은 그녀가 또다시 살풋 웃었다. 하마터면 종업원을 끌어안을 뻔 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술로 화제전환을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정말 소주 괜찮으시겠어요? 여기 맛있는 술 많던데.....”
“괜찮아요. 술에 장난치는 거 싫어해서.”
아, 시크해. 저 시크함에 얼어 죽고 싶다. 같이 술을 마시자는 요청도 받아준 걸 보면 내가 싫지는 않은 것 같지만, 맘에 드는 여자가 앞에 있으니 머리가 하얘졌다. 그렇다고 아무 시도도 하지 않고 헤어진다면 정말 후회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의미 없는 화제를 몇 가지 던져보았지만, 대화가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말없이 서로의 잔만 부딪히다 보니 어느새 소주 한 병이 거의 비워져 있었다.
조금밖에 마시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정신이 얼얼했다. 하얗던 그녀의 뺨도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예쁘지.....”
헛, 미친.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혹시 그녀가 들었으면 어쩌나 싶어 서서히 고개를 들어 눈치를 살피는데 그녀가 눈을 찡그리며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황해서 시선을 피했지만, 다시 보니 뒤쪽의 시계를 보고 있던 거였다.
열한시 십분. 별 대화를 하지 않아서 느끼지 못했는데 꽤 많은 시간이 지나 있었다. 이렇게 늦게까지 붙잡아두고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아쉬웠다. 이대로 그녀를 보내면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 뻔했다. 딱히 멋지지도 않고 재미도 없는 나와 같이 술이라도 마셔주는 여자가 있다는 게 기적이라면 기적이었다.
한 잔 정도 남은 술을 마저 털어 넣자 갑자기 속에서 객기라고 해야 할까, 이상한 자신감이 술기운과 함께 훅 올라왔다. 그때 마침 내 눈에 초록색 병뚜껑이 눈에 띠었다. 이성이 쌍욕을 하는 소리가 저만치서 들려오는 것을 애써 무시하고는, 지루한 건지 졸린 건지 모를 몽롱한 눈빛으로 안주를 바라보는 그녀에게 병뚜껑을 내밀며 말했다.
“준희씨, 게임 하나 할래요.”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병뚜껑 안에 숫자가 써져 있을 거예요. 제가 숫자를 말하면 업, 다운만 해주시면 돼요. 만약에 다섯 번 안에 그 숫자 맞추면 제 소원 하나 들어줄래요?”
그녀는 흥미가 생겼는지 미소를 띠며 좋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성 따위의 외침은 들리지도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첫 숫자를 말했다.
“삼십”
“업”
“사십”
“다운”
그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 나도 놀랐다. 아는 형이 술자리에서 재미삼아 가르쳐 준 것이었는데, 병뚜껑의 숫자는 50으로 한정되어 있으니 처음에 절반인 30정도로 시작해서 조금씩 간격을 좁혀가면 5번 안에는 대부분 맞는다는 간단한 트릭이었다. 전수받을 때는 심드렁했으나 중대한 상황에 도움을 받을 줄은 몰랐다. 나는 애써 담담하게 숫자를 불렀다. 이제 9개 안에서만 맞추면 된다.
“삼십오”
“업”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37? 38? 긴장한 것이 티가 났는지 그녀는 내 얼굴을 흘끔 보고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취해 제대로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만 “삼십팔”이라고 말해버렸다. 제발 업, 업이라고 해주길
“다운”
이런. 긴장한 나머지 습관적으로 손톱을 깨물려던 걸 황급히 내리고 다시금 생각에 몰두했다. 이제 이건 두뇌가 아니라 운의 문제다. 이십 칠년을 살아오면서 여자 손도 잡아보지 못한 인생을 불쌍히 여기신다면 신도 모른 척 하지는 않으시겠지.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마지막 숫자를 말했다.
“하아.....삼십육”
아무 말도 없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데, 그녀가 나를 툭툭 건드렸다. 손을 내리자 그녀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맞았어요.”
“네?”
하마터면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다행히 이성이 대뇌 전두엽으로 복귀했으니 망정이지. 술이라는 건 정말 위험한 식품이다, 식약청에서 규제하는 이유를 알겠어.
“이제 말해보세요, 소원”
맞다, 숫자 맞추는 것에 급급해서 목적을 잊고 있었어. 할 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지만 거절당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쉽사리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나는 다시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바라볼 때마다 전율이 느껴지는 얼굴이다. 언제나 흐리멍덩하게 원하던 것들을 놓치고 살아왔지만 이번만큼은 그래선 안 된다고 육감이 외치고 있었다. 흑마법사가 되는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이 여자와 사랑이란 걸 해보고 싶었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다.
“저, 다음번에 또, 또 만날 수 있을까요.”
말은 왜 더듬니 이런 뷰.....아니다, 말을 말자. 나의 말에 그녀는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미소에 나도 모르게 변명을 하듯 장황하게 사설을 풀기 시작했다.
“아니, 오늘은 처음 만나서 제가 준희씨를 잘 모른 것도 있고, 그래서 재밌게도 못해드렸으니까 다음번에는, 어 이번에 평점 높게 나온 공포영화 있던데 그게 이름이 뭐더라.....”
“그래요, 다음에 또 봐요.”
“네.....네?”
감동의 쓰나미란 게 이런 표현인가.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는 걸 가까스로 막고 있는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 대신”
“옛!”
“그때는 연오씨가 보고 싶은 걸로 봐요. 제 취향 맞추기 힘든데, 생각해 줘서 고마워요.”
세상에. 그녀가 말을 두 마디나 했어. 게다가 상냥해. 넋 나간 표정을 하고 있는 나를 싱글거리며 보던 그녀가 핸드폰과 지갑을 챙겼다.
“늦었는데 이제 그만 갈까요?”
황송한 듯 연거푸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녀 몰래 병뚜껑을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계산을 하고 택시를 잡아 그녀를 보내고 나니 다리에 힘이 풀려 길바닥에 쭈그리고 앉게 되었다. 휑한 거리였지만 몽글몽글 가슴 한구석에서 무언가 벅차올랐다. 이대로 잠을 자지 않고도 출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오늘의 일등공신인 병뚜껑을 꺼내 뽀뽀를 해주었다. 길을 지나가던 사람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 같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지금 나는 세상 혼자 산다, 됐냐. 앞으로 삼십육을 내 인생의 행운의 숫자로 지정할까 하며 무심코 나는 병뚜껑 뒷면을 돌려보았다. 뒷면에는 희미하게 ‘37’이라고 쓰여 있었다. 음, 37? 내가 잘못 봤나 싶어 가로등 불빛에 비춰보았지만 분명 삼십칠이었다. 희미하다고는 해도 실내에서 이 숫자를 잘못 볼 리는 없었다. 뭐지, 그렇다면. 그렇다는 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얼굴에 번진 웃음기를 감출 수가 없었다. 이대로 회사로 출근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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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당신과 나를 이어폰'의 김고든(필명)입니다.
'당신과 나를 이어폰'은 현재 네이버웹소설챌린지리그에서 연재중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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