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특집 SBS스페셜 역사전쟁, 금지된 장난(239회)_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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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 현 한반도(韓半島) 북부의 낙랑(樂浪) 위치설은 원래 일제의 관변학자 관야정(關野貞, 1867~1935년)의 학설에서 출발되었고, 이를 우리나라의 주류사학계에 거치면서..
소위 나쁘게 말하자면, '자기들 끼리 보고싶은 것만 보는 학설'이고.. 타율성이 짙으면서도 권위있는 학설에 올려놓아 자리매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 일제 시기, 관야정(關野貞) 조사단이 활동했던 시기인 1911~1923년 사이에 이루어진 발견은 모두 우연에 의한 발견임을 여러 차례로 밝히고 있으나.. 사실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확연히 차이가 있을만큼 중대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 ' 낙랑군재평양설 '의 낙랑군(樂浪郡)이 313년까지 현 한반도(韓半島)의 평양에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는 유물 즉, '효문묘동종(孝文廟銅鐘)'과 '점제현신사비(秥蟬縣神祠碑)'인데.. 그 중 '효문묘동종(孝文廟銅鐘)' 유물의 문제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 동종에 쓰여진 명문에 의거하여, 기원전 41년, 현 한반도(韓半島)의 평양에 효문묘가 설치되었다가 다음해 폐지되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기원전 41년 무렵 중화 한나라(漢) 조정에서는 이어지는 재난과 전국 각지에 설치된 문묘들을 운영 및 유지하기 위한 경비가 과다하여 이들을 폐지하기 위한 논쟁과 논의가 있어왔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낙랑군이라고 주장하는 저들 입장에서는 변군에 불과한 지역에 효문묘가 설치될 수가 없었으며, 거기서 제기(祭器)로 사용되었다는 동종(銅鐘)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 일제 관변학자들의 주장에 의거하더라도 효문묘동종은 단 하나여야만 하는데, 최소한 두 개 이상의 효문묘동종이 확인됩니다..
즉, 일제는 효문묘동종을 하나만 조작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2개 이상의 유물을 조작하여 만들어낸 것입니다..
▷ 이 동종이 우연히 발굴되어 방치되었다가, 재발견된 경위 자체에 대한 설명이 의문점이 많습니다..
여기서 중심 증언자로 등장하는 인물은 집에 방치된 동종을 학교에 기증한 평양 중학교 4년생 교본번(橋本繁)입니다..
그러나, 이 학생은 집에 방치된 동종을 학교선생에게 가져다 준 것뿐으로 유물 출토 경위에 대한 증언자가 될 수 없음에도 중요한 증언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유물 발굴 현장에 있었다는 그 아버지 교본장장(橋本庄藏)이나 다른 인물 송본정의松本正義)의 증언이 없습니다..
▷ 동종과 함께 출토된 것으로, 동정(銅鼎) 하나, 백동경(白銅鏡) 파편 넷, 용마뉴염승전(龍馬鈕厭勝錢) 하나, 계양동제품(笄樣銅製品) 하나 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동정(銅鼎)에 대한 설명이 심지어 같은 책 [ 八田己之助, 樂浪と傳說の平壤 ] 내에서도 다르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즉, 발굴당시 가래날(또는 곡괭이)에 의해 손상을 입었다고 하였으며 2개로 나눠져 있어 교본정정(橋本庄藏)이 집으로 가져간 것을 닭모이통으로 썼다고 설명하는가 하면(39~40쪽), 송본정의(松本正義)의 소유로 있다가 총독부박물관에 기증하였다고(43쪽) 다르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 한반도(韓半島)의 선교리에서 출토되었다는 동정의 오른쪽 그림을 보면, 부숴진 부분이 없습니다..
사진이 잘못된 것이든 아니면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당시에도 이미 일제 관변학자들 사이에서도 이 효문묘동종에 대한 의문점들이 제기되고 있었습니다..
즉, 문묘의 제기로 사용되었다는 유물이 개인 분묘의 부장품으로 매납된 것에 대한 의문입니다..
그래서, 등장한 이설로서 효문묘의 ' 모사품설 '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철저하게 무시되었고.. 지금에 와서는 아무도 이와 같은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없습니다..
적어도 효문제의 묘에 사용된 동종을 명기로서 분묘에 매납한 묘주는 어떤 관위에 있었던 인물인가에 대한 의문도 솟아나는데, 그와 같은 물건을 과연 부장품으로 사용했는지 여부도 의혹이 커서, 풀리지 않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이설의 하나로 이 동종이 모처에 있었던 효문묘의 모사품으로, 그 제작된 연대는 명문에 드러난 영광 3년보다 적어도 2~3백년 후의 것일지도 모른다고 이해되고 있습니다..
" さて假にも孝文帝の廟に奉る銅鐘を明器として墳墓に納められた主は如何なる官位にあった人であるかとの疑問も湧き斯の如き品をはたして副葬品に使用したか否やも大きな疑惑の解けないものがあるようである. 尙異說の一つにこの銅鐘は何處かにあった孝文廟の銅鐘の寫し品で其の製作された年代は銘文の永光三年より尠くとも二三百年は後のものであらうとも解されてある. "
▲ [ 八田己之助, 樂浪と傳說の平壤, 平壤硏究會, 昭和9년(1934년) ] (41쪽)
▷ 이 효문묘동종의 재발견자가 바로 낙랑군재평양설을 입론하는데 일등 공신이었던 일본인 관야정(關野貞)입니다..
그에 의한 낙랑유적에 대한 조사연구의 결과는 문헌사학자들을 중심으로 한국 역사의 타율성을 선전하는 중요한 근거로 활용되었습니다..
그의 학설에서 출발되어 현재까지 발전되어 오는 우리 나라의 주류사학계가 내놓은 '현 한반도(韓半島) 북부의 낙랑(樂浪) 위치설'이 여러분에게 친숙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기실 역사 교과서에 주입된 학습의 결과인 셈입니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현 한반도(韓半島) 북부의 낙랑(樂浪) 위치설'은 '현 한반도(韓半島) 남부의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說)'과 동일한 맥락에 놓여지는 것은 '타국가의 지배론설'로서.. 일제의 식민지배 정당성을 갖추기 위해 만들어진 유물론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