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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편은 본래 EPIC이라는 이름으로 쓰던 소설의 일부였습니다.
완성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버려둔 소설이었지만 이 부분만큼은 그냥 버리기 아깝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즐겨 찾는 사이트인 오유에 한 번 올려봅니다. 책게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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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C 2부
2화.
프롤로그- 모든 사람들은 언젠가 죽는다.
2021년.
11월 20일 토요일.
18살 때의 일이다.
눈을 떴다.
주변을 살핀다. 방 안은 조명하나 없이 어두컴컴했다. 창밖에서 커튼을 뚫고 들어오는 약한 빛이 광원의 전부. 이렇게 어두울 때 일어나는 것은 처음인 것 같다.
두툼한 이불 속에서 몸을 일으킨다. 싸늘한 기운이 이불 틈새를 파고들어 포근한 느낌을 쫓아낸다. 그대로 손을 뻗어 커튼을 들쳐 올렸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길거리에 켜진 가로등 불빛 아래로, 쏟아지는 눈 결정의 모습이 비친다. 소금 결정처럼 알갱이 진 싸리눈이다. 그칠 듯 안 그칠 듯 하면서, 늦가을 내리는 가랑비처럼 드문드문 내리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도아직 꺼지지 않은 새벽. 세상은 무덤가처럼 조용했다. 그는자리에서 일어나 잠이 확 깰 정도로 차가운 공기를 가로질러 나갔다.
2층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왔다. 한 삼십 분 정도라도 더 자려고 방에 들어가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1층에서 누가 울고 있었다. 그는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주방 식탁에 어머니가 앉아 있었다. 나지막한 흐느낌이 들려왔다. 엄마가 울고 있다.
그 모습을 보자 10분만 더 늦게 일어날 걸, 하는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화장실에서 나와 바로 방에 들어갈 걸. 어머니가울고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불편하고, 괴로웠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엄마?”
우는 소리가 그친다. 어머니는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고 이쪽을 돌아본다. 입가에 억지로 짓는 미소가 걸려 있었으나, 곧 일그러진다.
“존, 내 아가.”
어머니가 두 팔을 벌린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그런생각을 하며 품에 안긴다. 식탁 위에 올려진 전화기가 눈에 보인다. 방금통화를 끝냈는지, 아직 화면이 켜져 있었다. 그가 보는 와중에툭, 꺼져버린다.
“무슨…” 일이에요? 그 질문을 끝까지 못하겠다. 무슨 일인지 예상할 수 있었기에, 대답을 듣기가 무서웠다. 어머니께서 결국 말하셨다.
“헤럴드가 죽었대.”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사람이 죽었다. 가족과 친지는 슬픔에 잠긴다. 하지만제자리에 주저 앉아 울고 있을 수는 없다. 관은 스스로 집에 들어와 물건을 치우고 자리잡지 않는다. 조문객은 따로 연락하지 않으면 몇 주가 지나도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모른다.교회 옆에 있는 묘지도 마찬가지. 묏자리는 저절로 파이는 게 아니고, 묘비는 땅에서 솟는 것이 아니다.
해럴드 스미스의 유해가 담긴 관이 돌아오는데 일주일 걸렸다. 존 스미스는 그 동안 어머니를도와 장례식 준비를 해야 했다. 집을 청소하고 정리하는데 이틀이나 걸렸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 때문일까, 이 집이 터무니 없게 크게느껴졌다. 아버지가 여기 없었을 때도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성조기를 덮은 떡갈나무 관이 들어왔다. 관 뚜껑이 열린다. 아버지의모습은 생전과 별로 다를 바 없었다. 그 때문일까, 어머니는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결국 스미스 혼자서 조문객을 맞이했다. 제복입은 남녀가 수없이 조문을 오고, 다시 나갔다. 아버지의동료 분들께서 많이 오셨다. 죄다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스미스가 대견하다면서 어깨를 두드리고, 어미니를 위로하러 밖으로 나간다. 창 밖에서 상심이 크시겠다는 동정 어린 몇 마디가 오간다.
리무진을 타고 공동묘지로 향한다. 장정 여섯이 관을 떠메고 움직인다. 잔디조차도 말라비틀어진 묘지의 흙을 밟으며 걸어간다. 신부의 미사와함께 관이 천천히 지표면 아래로 내려간다. 병사들이 허공에 대고 총을 쏜다. 한 번. 다시 한 번. 그리고또 한 번.
하얀 면장갑 아래 삽자루가 잡힌다. 금속의 냉기가 장갑을 넘어 살갗에 닿는다. 그는 흙덩이를 퍼내 관 위에 뿌렸다. 조금 얼어있던 흙이 관에 떨어져쿵 소리를 낸다. 다음 사람에게 삽을 넘긴다.
흙이 덮인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을 쉽사리 인정하지 않았다.
매일 저녁 늦은 새벽까지 거실에 앉아서 옛날 앨범을 뒤적였다. 사진 속에는 환하게 웃는 아버지와어머니가 계셨다. 어머니는 졸음에 못 이겨 그 자리에 쓰러져 잠들 때까지 그 사진들을 보고 있었다. 스미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잠든 어머니에게 이불을 덮어주는 것뿐이었다. 그 이상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다. 분명 그는 이 상황을 바꿀힘을 가지고 있었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이 상황을더 좋게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슬픔에서 벗어나 다시 움직이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까닥 잘못한 한 마디가 어머니를 더 이상하게 만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어머니가 매일 술에찌들고, 어쩌면 매 시간 히스테리를 부리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스미스는 그게 두려웠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한 가장 안전한 방법을선택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어머니가당신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길 기다렸다.
그건 분명, 실수였겠지.
장례식이 끝나고 이주일 쯤 지나고 있었다. 스미스는 국토방위청년단의 마지막 동계훈련을 마치고집에 돌아왔다. 가방을 소파 옆에 내려놓고 자켓을 벗어 세탁기에 던져 넣었다.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주방이 평소와 달리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식탁도 마찬가지. 냉장고를 열어봤더니 안에 음식이 가득 있었다. 샌드위치, 샐러드, 어머니가잘 만드시는 토마토 파스타까지. 모두 일절 손을 대지 않은 채였다. 불안한생각이 들었다.
계단을 타고 올라간다. 신발 밑에서 나무 계단이 삐걱, 삐걱앓는 소리를 냈다. 복도를 따라 안방으로 가는데 퀴퀴한 냄새가 느껴졌다. 처음 맡아보는 냄새.
엄마? 불러보았으나, 대답은 없었다. 그는 안방 문을 열었다. 침대에 기대어 앉아계신 어머니의 모습. 사람이 들어오는데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가까이 가서 손목을 잡아보았다. 손가락이 닿자마자 알 수 있었다. 차갑고 딱딱했다. 맥이 느껴지지 않는다. 호흡이 멎은 지 오래였다.
목덜미에 감긴 벨트를 풀어냈다. 어머니는 고개를 떨구었다.
새로운 무덤이 생겼다. 잔디가 채 자리잡지 않아 직사각형의 흙구덩이가 그대로 보인다. 눈물을 흘리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하루를 뜬 눈으로 지냈다. 그는 배달부가 두툼한 신문을 집어 던지는 소리에 깨어났다. 사회는여전히 바쁘게 움직였다. 막히는 고속도로 위에서 욕설을 날리고, 직장에서상사 눈치를 보며, 집에 돌아와 TV를 보며 쉰다.
그는 이웃집 아이들이 웃으며 눈사람을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부모님의 죽음 이전과 이후의변화는 없었다. 굳이 찾아보자면 몇 사람의 울적한 기분이겠지. 가장소중한 두 사람이 죽었는데도, 세상은 너무나 평화롭고 조용해서, 마치두 사람의 죽음 따위는 이 세상에 아무런 파장도 일으키지 못했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알게 된 스미스는 울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두 사람의 죽음에무감각한 사회가 한 명의 기분을 신경 써줄 리 없으니까. 그래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스로 어딘가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처음으로 ‘좀웃어봐.’라는 말을 들었을 때였다.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이하나같이 그런 소리를 했다. 우울해 보인다, 얼굴에 주름잡히겠어, 너 그러는 거 보기 안 좋아.
감정이 무뎌간다. 억지로라도 웃으면 저절로 행복한 기분이 든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억지로라도 무표정한 얼굴을 지으면 무감각해지는 것도 일리가 있다. 얼마안가 친구들의 타박이 줄어들었다. 처음에는 입꼬리를 억지로 잡아 늘이던 녀석들이, 이제는 별 다른 행동도 하지 않는다. 익숙해졌다는 것이겠지.
사람은 이렇게 변해가는구나, 하고 느꼈다.
1월은 펜실베니아 주립대학 입학시즌이었다. 스미스는 집을 팔고 대학 근처에 조그만 원룸을 샀다. 당장 쓸 돈을 제한 남은 돈은 죄다 신탁기금에 넣어뒀다. 고교시절친구들과의 연락도 모조리 끊어버렸다. 국토방위청년단에서 알게 된 사람들의 목록도 연락처에서 지워버렸다. 새로운 시작을 한다고 마음먹었다. 이제 모든 것을 떨쳐낼 수 있다고생각했다.
그 ‘새로운 시작’이란 게 몹시 외롭다는 것을 깨닫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PIC 2부
1화 “닮았다고, 생각했어.”
2026년.
6월 30일.
미군 소속 상병의 코뼈를 부러뜨리고 러시아 군인들 앞에서 망신을 줬다. 그 결과는 영창도, 정신병원 치료도 아닌 3일짜리 휴가증. 전혀 예상치도 못했다. 그는 병원 현관문으로 나와 몇 걸음 앞으로걸어가다가, 멈춰 섰다. 손에 쥐어진 카드를 본다. 회색 디지털 위장무늬에 흰색으로 쓰여진 글자. 육군장병교통카드. 버스, 기차, 비행기모두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도대체 왜 이런 결정이 내려진 것일까. 어쩌면 행정적인 실수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미군이라는 조직 자체가 원래 이렇게 관대한 것일지도. 어쩌면, 행정담당자가 말했던 것처럼 ‘높으신 분’이 뒤를 봐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렇게 온 기회를 흘려 보낼 생각은 없었다.
오후 4시. 스미스는 필라델피아 공항으로 향하는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얼마 안 되는 짐을 군용 더플백에 쑤셔 넣고 그걸 좌석 위에 있는 화물칸에 집어넣었다. 지금은 자리에 앉아 비행기가 출발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이웅성거리는 소리가 차츰 잦아들었다. 스피커에서 기장의 안내방송이 시작했다. 이제 이륙할 모양이다. 기장은 자신을 소개하고, 그들이 탄 이 여객기를 소개하고, 항로를 대충 안내한다. 날씨는 맑고 바람은 세지 않다. 안전벨트를 매세요.
모든 게 평소와 같았는데, 기장이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지금 비행기 안에는 우리나라를 위해 싸우는 군인이 타고 있습니다. 출발하기 전에, 그 분을 위해서 큰 박수를 보내주십시오.”
조건 반사처럼 승객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스미스도 성의 없이 손뼉을 치다가, 갑자기 그 군인이라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휴가증을받으면서 같이 받은 육군장병교통카드. 탑승 수속을 밟을 때 사용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조금 겸연쩍어졌다.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 사람들은 그 군인이 실제로는 다른 이를 몇 명이나 죽인 살인자라는 것을 모른다. 만약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행동할까? 사람을 죽인 죄인이국가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다면,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위해서 박수를 쳐줄까?
비행기가 활주로로 향했다.
스미스는 좌석을 조금 눕히고 편하게 앉았다. 그는 이내 잠들었다.
필라델피아 공항에서 환승한다. 목적지는 펜실베니아 유니버시티파크 공항. 펜실베니아 주립대학 근처에 있는 작은 공항이다. 다음 비행기는 두시간 뒤에나 출발한다. 도착하면 해가 이미 지평선 아래로 떨어져 있겠지. 지금도 해가 꽤 기울어져 있었다. 공항 식당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라운지에 있는 의자에 앉아 시간을 때웠다.
3일짜리 휴가 전부를 펜 주립대학에서 보낼 것이다. 그곳에서 특별히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은아니었다. 대학교 말고도 갈 수 있는 장소도 많았다. 사실, 펜 주립대학에 가는 것은 꽤나 위험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가야하는 이유는, 보고 싶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울해 보이네요.”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 들은 말이다. 작년 5월초, 교양과목 조별과제를 위한 회의에서. 생전 처음 보는사람에게 한 말 치고는 가시가 돋쳐 있다.
“그럴지도.”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그녀와의 첫번째 대화는 그렇게 싱겁게 끝났다. 그들의 대화가 조별회의의 맥락을 잠시 끊었지만, 얼마 안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회의가 이어진다.
스미스는 그 때 졸업반 학생이었다. 그녀는 3학년. 그는 공과대학 소속이었고, 그녀는 자연대학에 다닌다. 조별토론을 위해 배정된 테이블에서 그와 그녀의 공통점은 단 하나, ‘정의에대하여’라는 교양과목을 수강하고 있다는 것. 그마저도, 스미스는 별로 관심이 없는데 비해 그녀는 열성적이었다. 마치 서로가광학이성질체라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그는 오른손잡이, 그녀는왼손잡이.
우연한 계기가 없었다면 그녀와 만날 일도 없었을 터였다. 우연히 둘 다 같은 조가 되었다. 우연히 둘 다 사례 수집과 분석 역할을 맡았다.
“이따가 같이 만나서 조사하죠? 오후 3시 도서관에서.” 그녀가 말했다.
존 스미스는 레나 로빈슨과 그렇게 만났다.
오랜 기억이 떠오른다. 처음으로 도서관 4층에 갔을때가 생각난다. 금요일 오후 3시. 로빈슨이 자료를 조사해야 한다며 끌고 갔다. 그들이 처음 만나고두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4층 자료보관실은 도서관의 다른 곳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좀 더 착 가라앉았다. 고요함과 차분함이 대기 중에 응결되어 뿌옇게 보이는 모습을 상상했다. 햇빛에비치는 먼지를 뚫고, 그녀와 함께 법률자료가 비치된 서재로 걸어간다.책이 가득한 선반을 스치면 나무 향이 희미하게 느껴진다. 싫지는 않은 냄새다.
로빈슨이 펜실베이니아 지방법원 판례집을 서재에서 뽑아 옆에 서있는 스미스에게 떠넘긴다. 거의한 뼘 두께의 책이 두 권, 세 권씩 쌓이자 슬슬 무거워 진다. 그래도앓는 소리는 내지 않는다. 근처 책상에 자리를 잡는다. 판례집한 권씩을 끌어다 읽기 시작한다. 로빈슨은 가져온 핸드백에서 노트와 볼펜을 찾는다. 스미스는 mp3와 이어폰을 주머니에서 꺼낸다.
2021년 하반기 지방법원 판례집. 그는 대충 펼친 페이지를 읽었다.1248페이지. 1급살인으로 기소된 범인. 가택에침입해서 칼로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
그는 몇 페이지 더 넘겨봤다. 그 사건에 대한 증거자료가 이어진다. 칼날이 중지손가락 만한 주머니칼.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사람은 이렇게 조그만 것에 맞아도 잘만 죽어나간다. 과일 깎는 용도로나쓰일법한 칼이 심장이나 동맥 따위를 푹 찌르면 그걸로 끝이다. 다음페이지에 나온 피해자의 사진이 그것을잘 증명해준다. 배에 난 상처는 손바닥 하나로도 넉넉히 덮을 수 있을 정도로 작지만, 이 사람은 결국 과다출혈로 죽었다.
뒷장을 넘겨본다. 검사 측 주장과 피의자 측 주장. 피의자는줄곧 진짜 사람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냥 조금 ‘무력화’시키려고 배때지를 찔렀다고 한다. 검사 측은 그걸 개소리라고 일축한다. 양측의 진흙탕 싸움이 끝나고, 판사가 피의자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약물주사로 사형 예정. 지금쯤이면 이미 고인이겠지.
재미있는 장면은 끝났다. 그는 지루하게 문장을 눈으로 읽다가 그냥 mp3에서 나오는 음악에 집중한다. 누군가 어깨를 툭툭 치면서 음악감상을방해한다. 옆을 돌아봤다. 레나 로빈슨이 이쪽을 쳐다본다. 무의식 중에 노래를 흥얼거리기라도 했나? 그녀가 입을 연다.
“뭐 들어요?”
“음악.” 그는 성의 없게 대답했다.
“같이 들어도 돼요?”
솔직히, 싫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어폰이 스테레오라서한 쪽만 들어서는 의미가 없었으니까. 왼쪽은 베이스만 들리고, 오른쪽은보컬만 있다. 그래도 앞으로 한 달은 같이 일해야 할 사람에게 째째하게 구는 것도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결국 그는 한 쪽 이어폰을 내주었다. 선이 좀 짧았기에, 그녀가 이쪽으로 가까이 붙었다. 머리에서 나는 라벤더 향이 느껴질정도였다.
팔만 조금 움직여도 서로의 몸이 닿는다. 한편으로는 거부감이 들지만, 그보다 더 큰 감정을 차지하는 것은 설렘이었다.
도대체 몇 년 만일까, 다른 사람과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어본 것은.
3시간 뒤, 그들은 일을 마치고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좀 쉬기로 했다. 육체노동을 한 것도 아닌데, 꽤나 피곤하다. 도서관이 너무 건조했는지 눈이 따끔거린다.
도서관 옆에 있는 흔한 프랜차이즈 카페로 들어간다. 2층 창가자리에 앉는다. 창 밖은 가로수가 대부분 가로막고 있다. 그 사이로 보도를 걷고있는 대학생들의 모습이 보인다.
“학과가 어디에요?”
기계공학부.
“거기서 무슨 일을 하죠?”
그냥 이것저것.
레나 로빈슨은 아까부터 재잘재잘, 시끄럽다. 스미스는몇 마디씩 대꾸해주면서 창밖에 시선을 두었다. 보잘것없는 풍경. 차라리로빈슨의 얼굴을 보는 편이 이득이겠다 싶어 고개를 돌린다. 시선을 마주한다. 그녀와 이야기한다. 로빈슨이 질문을 하고 스미스가 답한다. 어째서인지 대화가 계속 이어지지 않고 뚝뚝 끊긴다. 그게 누구 때문인지, 스미스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너무 짧게 대답하고 있으니.
어느 샌가 커피를 다 비웠다. 별 수 없이 그녀가 뜨거운 카푸치노를 다 마시길 기다린다. 이쪽의 시선을 느꼈는지 후후 불어가면서 마신다. 굳이 그럴 필요는없는데.
카페에서 나온다. 그녀가 산다는 기숙사와 그의 원룸은 전혀 다른 방향이다. 그런데 로빈슨은 이쪽을 쫓아온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다.
한참을 길 따라 걷는데, 그녀가 또 말을 건다.
“존, 꿈이 있어요?”
꿈? 굉장히 뜬금없는 질문이다. 장래희망을 묻는것인가? 우리가 코흘리개 때부터 가지고 다니다가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버리는 그거?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적당한 직장을 잡아서 안정적인 삶을 사는 것.”
그녀는 그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것보다는 더 좋은 이유가 있을걸요. 당신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가 고작 그거라니, 서글프지 않아요?”
이야, 약장수 같은 소리를 하네. 저 말을 들으니까생각나는 것은, 좋아, 꿈을 갖자! 가 아니다. 시중에 몇 십 권이고 나와서 똑같은 소리를 지껄이는자기개발서가 생각난다.
“그러는 너는 무슨 꿈을 가지고 있는데?”
로빈슨은 대답을 하려다, 그만 뒀다. 미안하다는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아, 전 이쪽으로 가는 길이라서, 그러니까, 헤어질 시간이네요. 다음에 또 만나요!”
스미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갈 길을 갔다. 얼마 뒤 집에 도착했을 때는, 그녀와 무슨 대화를 했는지조차 까먹어버렸다.
그 다음주 금요일 오후 5시경. 그들은 저번 주에그랬던 것처럼, 도서관에서 나오자마자 카페로 향했다. 햇빛은점점 강해지고 있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로빈슨은 눈을 찡그린다.
“존, 뭐 물어 볼 게 있는데.”
로빈슨은 가볍게 묻는다. 처음에 있었던 버거워하는 분위기 따위는 이미 없다. 그녀는 빠르게 친해졌다. 스미스는 아직도 약간 낯설다.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다가오는 것일지라도, 거리는 줄어든다. 스미스는 로빈슨과 가깝게 지내고 있다.
“에릭이 발표한 주제는 어떻게 생각해?”
“누구?”
스미스는 멍하게 대답했다. 에릭이 누구지? 출석부를 때 몇 번 들어본 이름이긴 하다.
“DC/12V 티셔츠 입고 온 애.”
주황색 티셔츠였나. 사람은 기억난다. 짧게 깎은머리에 호리호리한 남자였지. 그가 앞에 나와서 뭔가 떠들었다는 것도 기억이 난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다. 레나 로빈슨은 결국 그 주제를 다시 설명해야했다.
“가족을 죽인 범죄자랑 그 복수를 한 남자 있잖아.”
“아, 그거 영화로 나왔었지. 살인자를 추적해서 복수를한다. 그거 꽤 흔한 소재야.”
“에릭은 남자는 잘못이 없다고 말했어.”
“물론이지.”
스미스가 대답하자, 로빈슨은 흐응, 하고 콧소리를냈다.
“나는 죄는 결국 남는다고 말했고.”
“내 이성도 같은 의견이야.”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 종합적으로 말이야. 이성이랑 감성이 따로 놀지 말고.”
솔직히 말하자면, 이래저래 귀찮다. 여기서 뭐라고대답하든 로빈슨은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라고 묻겠지. 수렴식연쇄질문법. 왜? 라는 질문을 반복해서 근본적인 원인을 찾는방법. 질문은 사회질서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은 뿌리를 찾아내거나,아니면 스미스가 나가떨어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난 한 가지만 생각할래.”
그녀가 뭔데? 하는 표정을 짓는다. 스미스는, 지금 생각해보면 얄궂게도, 이렇게 말했다.
“죄는 씻을 수 없다는 거.”
“논점일탈. 10점 감점입니다, 존.”
카페 1층은 사람이 많아 시끌시끌하다. 2층으로올라간다. 창가자리에 앉는다. 로빈슨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왜 꿈을 가져야 하는지 알아? 그녀는 꼭 초빙강사처럼 이야기한다. 반쯤은 알 수 없는 의무감에, 나머지 반은 자아도취에 빠진 것 같다. 단순하거나 유치한 목표를 세워도 좋아, 그게 발전해서 더 큰 꿈이되니까. 스미스는 이런 뜬구름 잡는 소리를 언제까지 들어야 하나 생각했다.
이야기가 길어진다.
그건 그렇고. 마침내 스미스가 말한다. 저번 주에네 꿈이 뭔지 알려준다고 했지?
로빈슨은 대답한다. 그건, 좀 나중에. 일단은 들어봐.
왜 말을 안 하지? 뭔가 켕기는 것이 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그게 뭘까? 자신의 꿈이 흔해서? 뻔해서? 고귀하지 않아서? 유치해서? 아니면, 불법인 것이라서? 그럼 왜 저번 주에는 말하려다가 말았는데? 스미스는 일단 그녀의 말을 듣기로 한다.
그러니까, 남의 소망을 비웃으면 못 써.
아, 그녀는 자신의 꿈이 비웃음 받는 것을 싫어하는 게 들림 없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스미스가 그렇게 하지 않도록 말로 유도했던 게지. 그는그녀가 커피 마시는 틈을 타 말했다.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남의 꿈을 비웃거나 하지 않아. 그게아무리 어설프고 엉망진창이라고 하더라도 말이야. 그래서 말하는 건데,이제 슬슬 네가 가진 목표가 뭔지 말해주지 그래.”
그녀가 커피잔에서 시선을 땐다. 이쪽을 쳐다본다.
“넌 남의 바램을 비웃어 넘기는 사람이 아니야.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도 아니고, 그렇게 장난이 심한 사람도 아니니까.”
로빈슨은 잔을 한 손으로 빙빙 돌리면서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런 말을 할 기회가 없어. 지금이야 내 꿈이 뭔지 궁금해서잔소리도 들어주지만 그게 뭔지 알고 나면 다른 소린 들으려고도 안 할 거잖아? 내 최종 목표는 네가꿈을 갖게 만드는 거지, 내 꿈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고.”
헛다리 짚었군. 이런, 아직도 연습이 한참 필요하다. 심리학 강의를 몇 번 들었다고 남의 의중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지.
근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언제부터이렇게 친해졌지? 아니, 생각을 정정한다. 로빈슨이 왜 이렇게 친한 척 하지? 최종 목표가 뭐? 왜 그런 걸 해주려고 하지?
“너는… 왜 나한테 이렇게 친절한 거야? 네 말대로라면난 꿈도 없는 찌질이에다가 말도 제대로 안 들어주는 답답한 사람이지. 그런데 왜 이렇게 노력해주는 건데?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거야?”
무슨 이유에서 일까, 레나 로빈슨은 시선을 떨구었다. 그모습을 보니 이상한 생각이 든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로빈슨이 나쁜 짓을 했나, 내게 빚을 지고 있나, 하는 생각.물론 그런 기억은 없다.
그녀는 탁자 위에 올린 손을 꼼지락거린다.
“닮았,다고… 생각했어. 처음 봤을 때부터.”
어디가? 생각 없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간신히 붙잡는다. 스미스는 곰곰이 생각했다. 하지만 같은 질문만 떠오른다. 어디가 닮았다는 거야?
로빈슨의 후속 설명을 기다렸지만, 그녀의 입 밖에서 나오는 말은 전혀 뜬금없다.
“있지, 잘려나간 팔다리는 다시 생기지 않아.”
스미스는 아까의 질문을 하려다 관뒀다. 그녀가 화제를 돌리고 싶어한다면 그렇게 해줘야겠지.
“내가 어릴 때는 그걸 이해할 수 없었어. 한 번 실수해서 툭,잘리면 정말 그게 끝인가? 평생 그쪽 팔 없이 지내야 하는 걸까?”
손바닥을 펴고 이쪽으로 들이댄다. 하얗고, 가느다랗고, 길게 뻗은 손가락. 분위기나 문맥 따위 상관없이 엉뚱한 생각이 든다.
“손은 서른 개 정도의 뼈와 그만큼의 관절을 골조로 하고 있어. 손가락 하나를 움직일 때도 손목과팔뚝에 달린 수천 개의 근섬유다발을 움직여. 이렇게.”
그녀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는다. 짧은 손톱이 우아하게 호를 그린다.
레나는 손을 다시 거둔다.
“이 손으로, 어떤 사람은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난자를 쥐어짜내고, 다른 이는 활대의 기울기와 빠르기 만으로 음정이 바뀌는 연주를 해내지. 누군가는염료를 조합하고 배열해서 훌륭한 그림을 그려. 인체라는 것은 대단히 정밀한 기계야. 그 사실을 깨달은 뒤에야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어.”
그녀는 남은 커피를 모두 비웠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인정하기 싫은걸. 다리야 어떻다 치더라도 팔은 안 되지. 두 팔이 모두 잘려나가면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의수를차도 한계는 있으니까.”
그녀는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강조하듯 두 팔을 쫙 뻗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팔을 주고 싶었어. 기계가 아니라 진짜 자기 자신의 팔을 말이야. 그러면 그들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겠지. 그게내 소원이야.”
레나는 팔을 거두고 시계를 쳐다봤다.
“이제 가야겠어.”
카페에서 나온다. 스미스도 같이 따라나왔다. 저번주에 갔던 길을 똑같이 걸어간다.
“어디로 가는 거야?” 스미스가 묻는다.
“연구실에.” 로빈슨이 짧게 대답했다.
“저번주에도…?”
“매일 수업이 끝나면 연구실에 가. 말했잖아, 내꿈.”
그걸 끝으로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그들은 저번 주에 헤어졌던 그 교차로에서 갈라섰다. 스미스는 몇 걸음 앞으로 가다가 멈춰서, 로빈슨의 걸어가는 뒷모습을지켜봤다.
로빈슨은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알고 있다. 스스로 정한 삶의 목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 스미스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펜실베이니아 유니버시티파크 공항에 도착했다. 해는 이미 지평선 아래로 내려간 지 오래다. 40인승짜리 경비행기에서 내려 2층짜리 공항 건물로 걸어간다.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냄새가 느껴진다. 싸구려 향수 내음. 공중화장실에나 뿌릴 법한, 조잡한 꽃 향기가 나는 향수다. 대학교 시절 매번 뉴욕이나 시카고에 놀러 갔다 돌아올 때면 맡았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는데, 아직 잊지 않았다. 기특하기도하지.
공항에서 나온다. 여기서 펜 주립대학까지 가는 무인버스가 있다. 15분 간격으로 배차되어 있다고 기억한다.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모니터는 다음 차가 6분 뒤에 온다는 것을 알려 준다. 그동안 주변을 둘러본다. 가로등 조명 아래로 캐리어를 끌고 주차장으로 향하는 사람들. 어디선가 울리는 후진 경고음, 때맞춰서 비행기가 착륙하는지, 프로펠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생각보다 크지는 않은 소리다.
버스가 온다. 올라탄다. 육군장병교통카드를 RFID인식기에 가져다 댄다. 삑하는 전자음이 울린다. 뒤쪽으로 조금 걸어가 창가 쪽 자리에 앉는다.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승객은 기껏해야 열 명 남짓. 대부분 학생, 아니면 학생을 보러 방문한 가족들이다.
밖을 쳐다본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가로등불빛이 휙휙 스쳐가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본다. 건물이 천천히 뒤쪽으로 흘러가는 모습을 감상한다. 전혀 움직이지 않는 보름달을 올려다 본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얼굴을 바라본다.
대학교 정문을 통과할 때 즈음해서 학생들이 많이 타고 내린다. 조금 더 가서 버스가 기숙사단지 옆을 지난다. 학생 절반 가까이가 여기서 내리고, 또그 만큼이 탄다. 스미스는 눈을 들어 기숙사 건물을 올려다본다.
레나 로빈슨의 기숙사 방에 들어간 적이 한 번 있다. 여름 방학이 시작하는 시기였다. 기숙사 입사생 일부는 방을 뺐다. 로빈슨도 방을 뺐다. 본가에 돌아간다, 학교를 졸업했다,집을 구했다 따위의 이유가 아니었다. 그녀는 조그만 연구실을 방학 동안 사용할 수 있도록허가를 받았다. 그게 결정 나자 아예 연구실에 살림을 차렸다. 처음그걸 알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길거리를 걷다가 낑낑거리면서 커다란 상자를 들고 가는 그녀를보았다.
스미스의 몸 안 어딘가에 잠들어있던 기사도 정신이 그녀를 도우라고 소리쳤다. 그 주장에 동의했다. 스미스는 상자를 들었다. 묵직하다.도와줄까? 레나는 그의 팔에 들린 상자를 쳐다보더니 조그맣게 말한다.
“…맘대로 해.”
레나의 방에는 그림이 걸려 있다. 다른 생활용품이 죄 상자에 담긴 가운데, 그림 세 점이 액자에 담긴 채 책상 위에 올려져 있다.
초록색, 파란색, 흰색 등 원색을 이용해 그린 추상화가한 점. 깨끗한 백사장과 푸른 하늘이 그려진 해변의 그림 한 점. 그리고금발 여자애가 그려진 그림. 그림에 있는 서명은 엘리엇 로빈슨, 이라고읽힌다.
“누가 그린 거야?”
로빈슨은 왼손 오른손에 든 책가방의 무게를 가늠하고 있었다. 질문은 들리지 않은 모양이다.
“이 그림…”
“우리 아버지가 그렸어. 화가이셨거든.”
“어째서 과거형이지?”
“…지금은 쉬고 계셔.”
스미스는 여자애가 그려진 그림을 들고 자세히 살핀다. 흰색 셔츠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밤갈색치마를 입고 있다. 바람이 불어 휘날리는 금발 아래로 동그란 두 눈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환하게 웃는 얼굴.
“이건 누구야?”
대충 짐작은 가지만. 그는 레나와 그림 속의 아이를 번갈아 쳐다본다. 다른 점이 꽤나 많다. 레나는 머리카락이 갈색이고, 피부는 더 하얗고, 키도 크다. 눈매도다소 날카로워진 것 같아. 하지만 한 가지는 전혀 변하지 않았는데, 그림에서도선명하게 강조된 파란색 홍채다.
“이건 나야. 아마 9살 때.”
“이 때는 귀여웠구나.”
“어째서 과거형이지?” 레나가 샐쭉해져서 묻는다. 대답하지않는다.
짐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매미가 한창 울어댄다. 커다란상자를 하나 가득 채운 것은 책. 대체로 전문서적이다. 분야는아마 생물학 쪽이겠지.
“방학 때 계속 여기 있을 거야? 놀러 나가는 것도 좋을 텐데.”
“지금이 아니면 혼자서 연구실을 쓸 시간이 없어. 작업이 거의 마무리 단계야. 이제 조금만 더하면 끝나.”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는 연구실에 간이 침대까지 들여놓았었다.
“그러는 너는 방학동안 어디 있을 건데?”
레나가 묻는다.
“시카고에서 일주일정도 있다가 올거야. 그 다음에는 기숙사에 머물면서 친구들이랑 놀러나갈 생각인데.”
그녀는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다. 입가를 오물거리며 뭔가를 말하려 한다. 스미스가 그녀를 쳐다본다. 레나는,시선을 피하다가 조그맣게 말한다.
“혹시 시간 있으면 연구실에 들러. 역시 혼자서는 좀 외롭겠어.”
레나의 연구실은 그렇게 넓지 않았다. 연구실 한 쪽 구석을 차지한 매트리스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것일지도 모르겠다. 책상과 컴퓨터, 싸구려 책상과 매트리스. 여기저기 널린 옷가지들. 연구실이라기 보다는 그냥 숙직실같다.
“생각했던 거랑 좀 다르네.”
“뭘 기대했는데?”
“포르말린 병에 담긴 동물들, 현미경, 해부된 개구리랑메스.”
“그런 것들이라면 실험실에 있어. 여긴 그냥 기숙사 같은 곳이야. 잠을 자고, 데이터를 분석하고, 논문쓰는곳.”
공과대학 연구실은 이런 식으로 쓰지 않는다. 최소한 침대랑 옷가지를 가져다 놓지는 않지. 이건 그냥 로빈슨이 조금 이상한 거다.
놀러왔긴 했는데 막상 할 일이 없었다. 스미스는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눈앞에 보이는 모니터에는 쓰다만 논문 파일이 보인다. 끝에서 몇페이지를 읽는다.
“이게 그 신체재생성 논문이야?”
“그래. 그거 이제 거의 완성된 거야.”
“이거 다 쓰면 어떻게 할 건데?”
“일단 지도교수가 첨삭을 조금 해 줄거야. 그 다음에 내용이 괜찮다면 과학 저널에 올리기로 했어. 그렇지 않아도 졸업 논문으로 쓸 거고.”
“셀지나, 네이처지 같은거?”
그녀는 웃었다.
“거기까지는 무리인 것 같지만, 뭐, 대충 그런 거.”
연구실에 오래 있을 이유는 없었다. 방 안에 눈길을 끄는 게 있는 것도 아니고, 더 이상 도와줄 일도 없다. 딱히 볼일도 없으니, 이제 가볼게. 스미스는 그렇게 말하고 뒤돌아 섰다.
“잠깐 기다려.”
어깨에 손이 닿는다. 그쪽으로 몸을 돌린다. 레나가생각보다 가까이 서 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싶었는데, 그녀가 갑자기 목덜미를 껴안는다.
입술에 말랑한 것이 닿는다.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큽, 하는 소리와 함께, 호흡은 정말로 멎는다. 갑작스럽게 들이쉰 공기에는 라벤더 향과 체취가섞여 있다.
레나가 천천히 뒤로 물러선다. 까치발을 내리면서 눈높이가 내려간다. 시선을 마주치는 눈동자가 사라지고 나서야 간신히 숨을 쉴 수 있었다. 가슴이두근거린다. 귓가가 빨개진 것이 피부로 느껴진다.
레나를 쳐다본다. 그녀는 수줍게 시선을 피한다. 입술에손가락을 대고 있다.
“감사의 표시야. 짐 옮겨줘서 고마워.”
방학이 끝날 즈음, 로빈슨의 논문이 완성되었다. 지도교수가논문을 보고 크게 호평했다고 한다. 논문은 유명한 저널에 보내졌고, 심사를거치는 중이라고 들었다. 잘 됐다. 설령 저널에 실리지 않는다고해도 좋은 스펙으로 남겠지. 그녀는 이제 어떻게든 보상을 받을 것이다.학위나, 조교수 임용, 연구원 섭외, 두둑한 현찰, 어쩌면 그 이상도 말이다.
버스에서 내린다. 여기서부터는 방향이 다르다. 길거리를따라 걷는다. 대학교 한 복판을 관통해서 지나가고 그 뒤로도 십 몇 분 간을 또 걸어야 그가 사는 집에도착한다. 벌써 한 달 넘게 방을 비우고 있었다. 월세가아니었기에 돈 문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신경 쓰이는 것은 밤손님이 들었을까 하는 문제다. 훔쳐갈 만한 값어치 있는 물건은 없지만, 엉망이 된 집안을 보면심란하겠지. 잠들기 전에 집 청소를 해야 하는 일은 없길 바란다.
갈증을 느낀다. 주변을 둘러보다 근처에 보이는 주점으로 들어간다. 상호는 C2H5OH. 단도직입적이다. 여기에 와본 적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른편에는 길다란 바에 의자가 8개 나란히 놓여있고 반대편에는 테이블세 개가 놓여 있다 뒤쪽에 테이블 네 개가 더 있다. 그 가운데 가장 구석에 처박힌, 7번 테이블에서 레나와 술을 마신 적 있다.
“존?”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부른다. 입구 쪽 두번째 테이블을 차지한 남자였다. 스미스는 그를 알아봤다.
“에릭.”
그와 합석한다. 에릭 렌츠. 스미스와 같은 과를나온 동기. 지금은 피로파괴 분야에서 대학원생 과정을 밟고 있다고 들었다. 절친하지는 않아도 밥 한끼 사줄 정도는 된다. 에릭이 바텐더에게맥주 두 잔을 주문한다. 맥주가 도착하자, 그는 한 잔을내밀며 이렇게 말한다.
“약속은 지켰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
건배. 쨍, 맥주잔이 맞부딪히고, 거품이 좀 튄다. 빈 속에 시원한 맥주를 쏟아 넣는다.
“그래서.”
에릭이 입가를 슥 닦아내며 말했다.
“그 동안 어디 있었어?”
사실대로 말해봐야 믿을 리 없다. 그걸 믿는다고 해도 곤란해진다. 그가 전에 받았던 명령서에는 연구소에서 일어난 일을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는 경고문구가 적혀 있었다. 명령을 괜히 어길 생각은 없었다.
“그냥. 어디로 좀 떠나 있었어. 유럽 쪽으로.”
에릭은 스미스가 대학에 있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다. 그 동안 종적을 감춘 것도그 일 때문이라고 짐작하는 것 같았다. 반은 맞았다. 그리고나머지 반을 고쳐줄 생각은 없었다.
한참 후에야 에릭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맥주가 거의 바닥을 드러낼 때였다.
“블랙이 죽었대. 듣기로는 그 사건의 중요 용의자라는 것 같았어. 혹시…”
스미스는 조용히 대답했다.
“천벌을 받은 거야.”
남은 술을 모두 비웠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맥주고마웠어, 라는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간다.
술에는 익숙하지 않다. 대학교에서 끝내 익숙해지지 못한 것들 가운데 하나다. 걸음걸이에 약간의 비틀거림을 추가하려면 반 리터의 맥주로도 충분했다. 감각이무디어지고 반응속도가 느려진다. 머릿속은 마치 수족관처럼 된다. 느긋하게헤엄치는 감각의 파편과 물거품처럼 터져나가는 기억들.
대학교 교정을 걷는다.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면서. 레나와함께 공부를 했던 카페는 여전히 손님이 많다. 손님들이 너무 많아 시끄러워지면 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스미스의 손을 잡아 끌었다. 소음을 피해 그 옆에 난 길을 따라 산책을 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도서관이 나온다. 4층 열람실에서 펜실베이니아 지방법원 판례를 찾아본 적이 있다. 레나는자료를 수집하는 역할을 맡았다. 스미스는 1급살인자에게 약물사형을내린 판결문을 베개 삼아 자는 역할이었다.
도서관은 아직도 불이 켜져 있었다. 밝은 형광등 빛이 유리창을 통해 새어 나온다. 카페는 문을 닫았다. 1층과 2층모두 불이 꺼져 컴컴하다. 스미스는 그 앞을 지나가며 셔터 내린 유리문을 흘깃 쳐다본다. ‘CLOSED.’
저 멀리 화학관 실험실이 보인다. 스미스는 공학을 전공하면서 기초적인 화학 실습을 해본 적있다. 1학년 때였을 것이다. 은도금 실험이었지. 그는 아직도 그 실험을 기억하고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도은도금 제품을 하나 만들 수 있다. 실제로 그가 직접 만든 물건도 있다. 지금 왼손 약지에 낀 반지.
노점상에서 산 5달러짜리 구리반지 두 개. 그 위에짧은 글귀를 새기는 데 5달러가 추가로 들었다. 화학처리한 구리 반지에 니켈 도선을 걸어서 은도금 용액에 빠뜨리고 전류를 흘린다. 도금된 반지를 꺼내 후처리한다.
선물을 어떻게 줄까 특별히 생각해본 기억은 없다. 그냥 집에 있는 초콜릿 상자에 넣어서 가져다준 것 같다. 그걸 주면서 뭐라고 말했는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오직기억에 남는 장면은, 그녀가 반지를 보면서 환하게 웃는 모습, 반지를들여다 보면서 귓가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장면, 반지에 새겨진 글귀를 천천히 읽는 입술과 목소리.
금요일 오후 2시 10분경. 인문관 정문을 통해 학생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들 사이에 존과 레나가끼어있다. 둘은 함께 걸어간다. 주로 말하는 쪽은 레나. 존은 듣는 쪽이다. 그들은 스미스가 지금 서 있는 곳을 지나 도서관으로향한다. 레나 로빈슨의 얼굴은 언제나 웃음기를 띄고 있다. 존스미스 또한 즐거워 보인다.
행복한 순간은 꽃과 같다.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스미스는그에 동의한다.
그가 살았던 원룸은 대학교 북문 방면에 있다. 빌딩의 이름은 ‘INERTIA’. 처음 여기에 왔을 때 저 상아색 현판을 쳐다보면서 쓸데 없는 상념에 잠긴 적 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이름을 지었을까? 투숙객이 계속 여기에 머물기를기대한 것일까? 타성과 무력감에 젖어 외부의 힘에 떠밀리면서? 지금은그런 생각을 품지 않는다. 무뚝뚝하게 걸어간다.
로비로 들어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8층 802호. 문 앞에 서면, 근 한 달 동안 쌓인 광고지 대 여섯 장이 보인다. 대충 뜯어버린다. 현관 앞에 서서 비밀번호 037041을 입력한다. 건조한 쇳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풀린다. 안으로 들어간다. 현관은 먼지가 좀 쌓인 것을 빼면 떠날 때와 똑같았다. 집 안도 마찬가지. 다른 사람이 들어온 흔적 따위는 없다.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는데 책상 선반 위에 놓인 화분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바싹 굳어버린 원예용 발포제에 꽂힌, 말라 비틀어진 꽃 한 송이가 담겨 있다. 꽃잎은 이미 시들어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화분을 통째로 들어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옷을 대충 벗어 던지고 욕실로 들어간다.
그는 샤워를 끝내고 나와 침대 위에 웅크렸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기가 베개를 적신다. 기분 나쁘게 축축하지만 꼼짝도 하기 싫다. 술기운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도 풀리지 않은 여독 때문일까. 눈꺼풀이 너무나 무겁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잠들겠지. 되도록이면 꿈을 꾸지 않길 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