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후한서 동이열전 옥저/예(濊)
게시물ID : history_1056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etraisol
추천 : 4/5
조회수 : 78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7/12 13:50:30
[후한서] 권85 동이전  / 옥저
 
東沃沮在高句驪蓋馬大山之東[一], 東濱大海;北與挹婁、夫餘, 南與濊貊接. 其地東西夾, 南北長[二], 可折方千里. 土肥美, 背山向海, 宜五穀, 善田種, 有邑落長帥. 人性質直彊勇, 便持矛步戰. 言語、食飲、居處、衣服有似句驪. 其葬, 作大木槨, 長十餘丈, 開一頭爲戶, 新死者先假埋之, 令皮肉盡, 乃取骨置槨中. 家人皆共一槨, 刻木如(主)[生], 隨死者爲數焉. 
 
[一]蓋馬, 縣名, 屬玄菟郡. 其山在今平壤城西. 平壤即王險城也. 
[二]夾音狹.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 동쪽에 있고 (1) 동쪽으로 바다에 닿는다. 북쪽으로 읍루, 부여, 남쪽으로 예맥(濊貊)과 접한다. 그 땅은 동서간으로는 좁고 (2) 남북간으로는 길어 가히 천리이다. 
 
토지는 비옥하고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어 오곡에 적합하고 밭작물도 잘된다. 읍락에는 장수(長帥)가 있다. 인성은 소박, 정직하고 굳세고 용맹하며(質直彊勇) 모(持)를 사용하는 보전(步戰)에 익숙하다. 언어, 음식, 거처, 의복은 구려(句驪)와 유사하다. 
 
장례를 치를 때는 길이 10여 장의 큰 목곽(木槨)을 만드는데 한쪽 머리를 열어두어 문으로 삼는다. 새로 죽은 자가 있으면 먼저 가매장했다가 가죽과 육신이 썪으면 뼈를 취해 곽 안에 둔다. 가인(家人)들이 모두 곽 하나에 함께 들어가고, 살아있을 때 형상으로 나무를 깎아 죽은 이의 숫자에 맞춘다.
 
(1)개마(蓋馬)는 현(縣) 이름이고 현도군에 속한다. 그  산은 지금의 평양성(平壤城) 서쪽에 있다. 평양은 즉 왕험성(王險城)이다.
(2)‘夾’의 발음은 ‘狹’
 
武帝滅朝鮮, 以沃沮地爲玄菟郡. 後爲夷貊所侵, 徙郡於高句驪西北, 更以沃沮爲縣, 屬樂浪東部都尉. 至光武罷都尉官, 後皆以封其渠帥, 爲沃沮侯. 其土迫小, 介於大國之閒, 遂臣屬句驪. 句驪復置其中大人(遂)爲使者, 以相監領, (貴)[責]其租稅, 貂布魚鹽, 海中食物, 發美女爲婢妾焉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옥저 땅을 현도군으로 삼았다. 그 뒤에 이맥(夷貊)의 침입을 받아 군(郡)을 고구려 북서쪽으로 옮기면서 옥저는 현(縣)으로 하여 낙랑 동부도위(東部都尉)에 속하게 했다. 광무제 때에 이르러 도위 관직을 파하고 그 뒤 그 거수(渠帥)를 봉하여 옥저후(沃沮侯)로 삼았다. 
 
그 땅이 작고 대국 사이에 끼어 있어 마침내 구려에 신속(臣屬)했다. 구려는 거듭하여 대인(大人)을 사자(使者)로 임명해 함께 다스리도록 하고 조세와 담비, 포, 물고기, 소금(貂布魚鹽), 해산물을 책임지우고 미녀를 뽑아 비첩(婢妾)으로 삼았다.
 
又有北沃沮, 一名置溝婁, 去南沃沮八百餘里. 其俗皆與南同. 界南接挹婁. 挹婁人憙乘船寇抄, 北沃沮畏之, 每夏輒臧於巖穴, 至冬船道不通, 乃下居邑落. 其耆老言, 嘗於海中得一布衣, 其形如中人衣, 而兩袖長三丈. 又於岸際見一人乘破船, 頂中復有面, 與語不通, 不食而死. 又說海中有女國, 無男人. 或傳其國有神井, 窺之輒生子云[一]. 
 
[一]魏志曰, 毌丘儉遣王頎追句驪王宮, 窮沃沮東界, 問其耆老所傳云
 
또한 북옥저가 있는데 일명 치구루(置溝婁)이고, 남옥저에서 8백리 떨어져있다. 그 풍속이 모두 남옥저와 같다. 남쪽으로 읍루와 접하는데 읍루인은 배를 타고 약탈하기를 좋아한다. 북옥저가 이를 두려워해 매년 여름이면 바위동굴(巖穴)에 숨고, 겨울이 되어 뱃길이 막히면 읍락으로 내려와 거주한다. 
 
그곳의 노인이 말하길, 일찍이 바다에서 포의(布衣) 하나를 얻었는데 그 모양이 중국 옷 같고 양쪽 소매 길이가 3장이었다고 했다. 또한, 한 사람이 부서진 배를 타고 있는 걸 보니 정수리에 얼굴 하나가 더 달려 있었는데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고 음식을 먹지 않아 죽었다고 했다. 또 말하길, 바다 중간에 여국(女國)이 있는데 남자가 없다고 했다. 혹 전하기로는 그 나라에 신령스런 우물(神井)이 있어 이를 엿보면 자식을 낳는다고 했다. (1)
 
(1)[위지魏志]에 의하면, 관구검이 왕기(王頎)를 파견해 구려왕 궁을 추격했을 때 옥저의 동쪽 경계 끝에 이르러 그곳의 노인이 전하는 바를 들었다고 한다


[후한서] 권85 동이전  / 예 (동예)
 
濊北與高句驪、沃沮, 南與辰韓接, 東窮大海, 西至樂浪. 濊及沃沮、句驪, 本皆朝鮮之地也. 昔武王封箕子於朝鮮, 箕子教以禮義田蠶, 又制八條之敎 [一]. 其人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 飲食以籩豆. 其後四十餘世, 至朝鮮侯準, 自稱王. 漢初大亂, 燕、齊、趙人往避地者數萬口, 而燕人衛滿擊破準而自王朝鮮, 傳國至孫右渠. 元朔元年[二], 濊君南閭等畔右渠, 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 武帝以其地爲蒼海郡, 數年乃罷. 至元封三年, 滅朝鮮, 分置樂浪、臨屯、玄菟、眞番四(部)[郡][三]. 至昭帝始元五年, 罷臨屯、眞番, 以幷樂浪、玄菟. 玄菟復徙居句驪. 自單單大領已東, 沃沮、濊貊悉屬樂浪. 後以境土廣遠, 復分領東七縣, 置樂浪東部都尉. 自內屬已後, 風俗稍薄, 法禁亦浸多, 至有六十餘條. 建武六年, 省都尉官, 遂棄領東地, 悉封其渠帥爲縣侯, 皆歲時朝賀. 
 
[一]前書曰, 箕子敎以八條者, 相殺者以當時償殺, 相傷者以穀償, 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人五十萬. 音義曰:「八條不具見也.」 
[二]武帝年也. 
[三]番音潘. 
 
예(濊)는 북쪽으로 고구려, 옥저, 남쪽으로 진한(辰韓)과 접한다. 동쪽으로 큰 바다에 막히고 서쪽으로 낙랑에 이른다. 예와 옥저, 구려는 모두 본래 조선의 땅이다. 
 
옛날 무왕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했는데 기자는 예의(禮義-예의와 의리), 전잠(田蠶-밭농사와 누에)를 가르쳤고 또 팔조지교(八條之敎)를 만들었다. (1) 사람들이 마침내 서로 도둑질하지 않아 문을 닫지 않고 지내게 되었다. 부인들은 정숙하고 변두(籩豆-籩은 대나무,豆는 나무로 만든 식기나 제기)로 음식을 먹었다. 
 
그 후 40여 대가 지나 조선후 준(準)에 이르러 스스로 왕을 칭했다. 한나라 초에 큰 난리가 일어 (조선으로) 몸을 피한 연(燕), 제(齊), 조(趙)나라 사람들이 수만 명이었는데,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준(準)을 격파하고 스스로 조선의 왕이 되었고 국통을 전해 손자인 우거(右渠)에 이르렀다. 
 
원삭(元朔) 원년(B.C 128),(2) 예군(濊君) 남려(南閭) 등이 우거에 모반하여 28만 명을 인솔해 요동으로 와서 내속(內屬)했고 무제는 그 땅을 창해군(蒼海郡)으로 삼았는데 몇 년 뒤에 폐지했다. 
 
원봉(元封) 3년(B.C 108년)에 이르러 조선을 멸하고 낙랑(樂浪), 임둔(臨屯), 현도(玄菟), 진번(眞番)(3)의 4부(군)로 나누어 설치했다.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B.C 82년)에 이르러 임둔, 진번을 파하고 낙랑, 현도에 병합시키고 현도는 다시 구려로 옮겼다. 단단대령(單單大領) 동쪽으로부터 옥저, 예(濊), 맥(貊)은 모두 낙랑에 속하게 했다. 
 
그 뒤 (낙랑의) 관할구역이 광대하고 멀었으므로 다시 영동(領東) 7현을 떼어내어 낙랑 동부도위를 설치했다. 내속된 이후부터 풍속이 점차 각박해지고 법금(法禁) 또한 많아져 60여 개 조목에 이르게 되었다. 
 
건무(建武) 6년(서기 30년), 도위(都尉) 관직을 폐지하여 마침내 영동의 땅을 포기하고 모두 그 거수(渠帥)들을 현후(縣侯)로 봉했는데 모두 세시(歲時)로 조공했다.
 
(1)[전한서]에 이르기를, 기자가 가르친 8조라는 것에는, ‘살인한 자는 바로 죽인다’, ‘상해를 입힌 자는 곡물로 배상한다’, ‘도둑질한 자는 남자는 가노(家奴)로, 여자는 계집종(婢)으로 삼는데 속전하려면 50만을 지불해야 한다’ 등이 있었다고 하였다. [音義]에서는 팔조를 모두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2)무제의 연호
(3)‘番’의 발음은 ‘潘’
 
無大君長, 其官有侯、邑君、三老. 耆舊自謂與句驪同種, 言語法俗大抵相類. 其人性愚愨, 少嗜欲, 不請匄. 男女皆衣曲領. 其俗重山川, 山川各有部界, 不得妄相干涉. 同姓不昏. 多所忌諱, 疾病死亡, 輒捐棄舊宅, 更造新居. 知種麻, 養蠶, 作綿布. 曉候星宿, 豫知年歲豐約. 常用十月祭天, 晝夜飲酒歌舞, 名之爲「舞天」. 又祠虎以爲神. 邑落有相侵犯者, 輒相罰, 責生口牛馬, 名之爲「責禍」. 殺人者償死. 少寇盜. 能步戰, 作矛長三丈, 或數人共持之. 樂浪檀弓出其地. 又多文豹, 有果下馬[四], 海出班魚, 使來皆獻之. 
 
[四]高三尺, 乘之可於果樹下行. 
 
대군장(大君長)은 없고 그 관직으로는 후(侯), 읍군(邑君), 삼로(三老)가 있다. 노인이 스스로 말하길 구려(句驪)와 동종(同種)이라고 하는데, 언어와 법속이 대체로 비슷하다. 그 인성이 우직, 성실하고 욕심이 적어 청하거나 구걸하지 않는다. 남녀가 모두 곡령(曲領-깃이 둥근 옷)을 입는다. 
 
산천(山川)을 중시하는 풍속이 있는데 산천에 각각 영역이 있어 함부로 서로 범하거나 건널 수 없다. 같은 성씨는 혼인하지 않는다. 기휘(忌諱-꺼리고 금기시하는 것)이 많아 병에 걸려 사람이 죽으면 옛 집을 버리고 다시 새 집을 지어 거주한다. 마(麻)를 심고 양잠(養蠶)할 줄 알고 면포(綿布)를 만든다. 별자리를 살펴 그 해의 풍흉을 예측한다. 
 
늘 10월이면 하늘에 제사지내며 밤낮으로 음주 가무를 즐기는데, 이를 무천(舞天)이라 한다. 또한 호랑이를 제사하여 신으로 섬긴다. 읍락이 서로 침범하면 벌하여 노비, 우마(牛馬)를 물리는데 이를 책화(責禍)라 한다. 살인자는 사형에 처한다. 도둑이 적다. 
 
보전(步戰)에 능하고 길이 3장의 모(矛)를 만들어 쓰는데 간혹 여러 명이 함께 잡고서 사용하기도 한다. 낙랑의 단궁(檀弓)이 그 땅에서 산출된다. 또한 무늬 있는 표범이 많고 과하마(果下馬)가 있으며(4) 바다에서는 반어(班魚)가 산출되는데 사자가 와서 이를 모두 헌상한 일이 있다
 
(4)키가 3척이라 이 말을 타고 과일나무 아래를 지날 수 있다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