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서] 권85 동이전 / 고구려
後漢書_卷八十五 동이열전(東夷列傳)
高句驪, 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地方二千里, 多大山深谷, 人隨而爲居. 少田業, 力作不足以自資, 故其俗節於飲食, 而好修宮室. 東夷相傳以爲夫餘別種, 故言語法則多同, 而跪拜曳一脚, 行步皆走. 凡有五族, 有消奴部, 絶奴部, 順奴部, 灌奴部, 桂婁部[一]. 本消奴部爲王, 稍微弱, 後桂婁部代之. 其置官, 有相加,對盧,沛者,古鄒大加,[二]主簿,優台,使者,帛衣,先人. 武帝滅朝鮮, 以高句驪爲縣[三], 使屬玄菟, 賜鼓吹伎人.
[一]案今高驪五部:一曰內部, 一名黃部, 即桂婁部也;二曰北部, 一名後部, 即絕奴部也;三曰東部, 一名左部, 即順奴部也;四曰南部, 一名前部, 即灌奴部也;五曰西部, 一名右部, 即消奴部也.
[二]古鄒大加, 高驪掌(賀)[賓]客之官, 如鴻臚也.
[三]前書元封中, 定朝鮮爲眞番、臨屯、樂浪、玄菟四(部)[郡]
고구려는 요동 동쪽 천리에 있다. 남쪽으로 조선, 예맥, 동쪽으로 옥저, 북쪽으로 부여와 접한다. 그 땅은 사방 2천리에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사람들은 여기를 따라 거주한다. 논밭이 적어 부지런히 경작해도 자급하기에 부족하다. 이 때문에 음식을 절약하는 풍속이 있지만 궁실(宮室)을 꾸미는 것을 좋아한다.
동이가 서로 전하기로는 부여별종(夫餘別種)이라고 한다. 그래서 언어와 법칙이 대부분 같고 궤배(跪拜-무릎꿇고 엎드려 절함)할 때 다리 하나를 끌고, 행보(行步)할 때 모두 뛰어다닌다.
모두 다섯 부족으로, 소노부(消奴部)[삼국지]-연노부(涓奴部)로 표기,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가 있다. (1) 본래 소노부에서 왕이 나왔으나 점차 미약해져 그 뒤에는 계루부가 이를 대신했다.
그 관직으로는 상가(相加), 대로(對盧), 패자(沛者), 고추대가(古鄒大加), (2) 주부(主簿), 우태(優台), 사자(使者), 조의(帛衣), 선인(先人)이 있다.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를 현(縣)으로 삼아 현도(군)에 속하게 하고 (3) 고취(鼓吹-궁중의식 때 쓰이는 음악 또는 악기), 기인(伎人)을 하사했다.
(1)지금의 고려 5부로 보면, 첫째, 내부(內部), 일명 황부(黃部)가 계루부이고, 둘째, 북부(北部), 일명 후부(後部)가 절노부이고, 셋째, 동부(東部), 일명 좌부(左部)가 순노부이고, 네째, 남부(南部), 일명 전부(前部)가 관노부이고, 다섯째, 서부(西部), 일명 우부(右部)가 소노부이다.
(2)고추대가(古鄒大加)는 고려에서 빈객을 접대하는 관직으로, 홍려(鴻臚-중국의 관직명)와 같다
(3)[전한서]에 의하면 원봉(元封-한무제 때 연호) 중에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 임둔, 낙랑, 현도 4부(군)을 설치했다고 하였다.
其俗淫, 皆絜淨自憙, 暮夜輒男女群聚爲倡樂. 好祠鬼神、社稷、零星[四], 以十月祭天大會, 名曰「東盟」. 其國東有大穴, 號禭神, 亦以十月迎而祭之. 其公會衣服皆錦繡, 金銀以自飾. 大加、主簿皆著幘, 如冠幘而無後;其小加著折風, 形如弁. 無牢獄, 有罪, 諸加評議便殺之, 沒入妻子爲奴婢. 其昏姻皆就婦家, 生子長大, 然後將還, 便稍營送終之具. 金銀財幣盡於厚葬, 積石爲封, 亦種松柏. 其人性凶急, 有氣力, 習戰斗, 好寇鈔, 沃沮、東濊皆屬焉. 句驪一名貊(耳). 有別種, 依小水爲居, 因名曰小水貊. 出好弓, 所謂「貊弓」是也[五].
[四]前書音義:「龍星左角曰天田, 則農祥也. 辰日祠以牛, 號曰零星.」風俗通曰「辰之神爲靈星」, 故以辰日祠於東南也.
[五]魏氏春秋曰:「遼東郡西安平縣北, 有小水南流入海, 句驪別種因名之小水貊」
그 풍속은 음란하고, 청결한 것을 좋아한다. 한밤중이 되면 남녀가 무리지어 모여 노래부른다. 귀신(鬼神), 사직(社稷), 영성(零星)(4)에 제사 지내는 것을 좋아해 10월에 제천대회(祭天大會)를 열어 이를 동맹(東盟)이라 한다. 그 나라 동쪽에 대혈(大穴)이 있어 이를 수신(禭神)이라 불렀는데,[삼국지]에는 ‘隧神’으로 표기 또한 10월에 이를 영접하고 제사지낸다.
공적인 모임에서는 의복으로 모두 비단옷을 입고 금은(金銀)으로 장식한다. 대가(大加), 주부(主簿)는 모두 (머리에) 책(幘)을 쓰는데 관책(冠幘)처럼 뒷부분이 없다. 소가(小加)는 절풍(折風)을 쓰는데 그 형태는 고깔과 같다. 감옥은 없고 죄인이 있으면 제가(諸加)가 평의(評議)해 사형에 처하고 그 처자는 노비로 삼는다.
혼인할 때는 모두 처가에서 살다가 아들을 낳아 장성한 뒤에 이들을 데리고 돌아오며, 장례에 쓸 물건(送終之具)을 조금씩 준비한다. 금은과 재물 비단을 아끼지 않고 후하게 장례를 치르는데 돌을 쌓아 봉분으로 삼고 또한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는다.
그 인성(人性)이 흉급(凶急)하고 기력(氣力)이 세고 전투에 능해 약탈을 좋아하며 옥저(沃沮), 동예(東濊)를 모두 복속했다. 구려(句驪)는 일명 맥(貊)이라고도 한다. 그 별종(別種)이 있는데 소수(小水)에 의지해 살았으므로 소수맥(小水貊)이라 불렀다. 좋은 활이 산출되는데 이른바 맥궁(貊弓)이 이것이다. (5)
(4)[전한서-音義]에서 ‘용성(龍星)의 좌각(左角)을 천전(天田)이라 하니 즉 농상(農祥)이다. 진일(辰日)에 우성(牛星)에 제사하는데 이를 영성(零星)이라 불렀다’고 했다. [풍속통風俗通]에서 ‘진(辰)의 신(神)이 영성이다’고 했으니 진일(辰日)에 남동쪽에 제사지낸 것이다.
(5)[위씨춘추魏氏春秋]에 이르기를 – 요동군 서안평현 북쪽에 소수(小水)가 있는데,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흘러 바다로 유입된다. 구려의 별종이므로 소수맥(小水貊)이라 했다.
王莽初, 發句驪兵以伐匈奴, 其人不欲行, 彊迫遣之, 皆亡出塞爲寇盜. 遼西大尹田譚追擊, 戰死. 莽令其將嚴尤擊之, 誘句驪侯騶入塞, 斬之, 傳首長安. 莽大說, 更名高句驪王爲下句驪侯, 於是貊人寇邊愈甚. 建武八年, 高句驪遣使朝貢, 光武復其王號. 二十三年冬, 句驪蠶支落大加戴升等萬餘口詣樂浪內屬. 二十五年春, 句驪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祭肜以恩信招之, 皆復款塞
왕망 초에 구려병(句驪兵)을 뽑아 흉노를 토벌하려 했다. 고구려인들이 따르지 않자 강박(彊迫)하여 파견했는데 모두 새(塞) 밖으로 달아나 도적이 되었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추격했으나 싸우다 죽었다.
왕망이 장수 엄우(嚴尤)에 명하여 이를 공격하게 했는데 구려후 추(騶)를 새(塞) 안으로 유인하여 참하고 그 수급을 장안으로 보냈다. 왕망이 크게 기뻐하였고 고구려왕(高句驪王)을 하구려후(下句驪侯)로 고쳐 불렀다. 이때부터 맥인(貊人)들이 변경을 약탈하는 일이 더욱 심해졌다.
건무(建武) 8년(서기 32년), 고구려가 사자를 보내 조공하자 광무제가 다시 그 왕호(王號)를 회복시켰다.
건무 23년(서기 47년) 겨울, 구려 잠지락부의 대가(大加) 대승(戴升) 등 만여 명이 낙랑으로 와서 내속했다.
건무 25년(서기 49년) 봄, 구려가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침략했는데 요동태수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의로 달래자 모두 돌아가 새(塞)에 머물렀다.
後句驪王宮生而開目能視, 國人懷之, 及長勇壯, 數犯邊境. 和帝元興元年春, 復入遼東, 寇略六縣, 太守耿夔擊破之, 斬其渠帥. 安帝永初五年, 宮遣使貢獻, 求屬玄菟. 元初五年, 復與濊貊寇玄菟, 攻華麗城[六]. 建光元年春, 幽州刺史馮煥、玄菟太守姚光、遼東太守蔡諷等將兵出塞擊之, 捕斬濊貊渠帥, 獲兵馬財物. 宮乃遣嗣子遂成將二千餘人逆光等, 遣使詐降;光等信之, 遂成因據險阨以遮大軍, 而潛遣三千人攻玄菟、遼東, 焚城郭, 殺傷二千餘人. 於是發廣陽、漁陽、右北平、涿郡屬國三千餘騎同救之, 而貊人已去. 夏, 復與遼東鮮卑八千餘人攻遼隊[七], 殺略吏人. 蔡諷等追擊於新昌, 戰歿, 功曹耿耗、兵曹掾龍端、兵馬掾公孫酺以身扞諷, 俱沒於陳, 死者百餘人. 秋, 宮遂率馬韓、濊貊數千騎圍玄菟. 夫餘王遣子尉仇台將二萬餘人, 與州郡幷力討破之, 斬首五百餘級.
[六]華麗, 縣, 屬樂浪郡
[七]縣名, 屬遼東郡也
그 후 구려왕 궁(宮-6대 태조대왕)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볼 수 있었고 국인(國人)들이 이를 두려워했다. 장성하자 용맹하고 굳세어 여러 번 변경을 침범했다. 화제 원흥(元興) 원년(105년) 봄, 다시 요동에 들어와 6개 현을 약탈하자 태수 경기(耿夔)가 이를 격파하고 거수(渠帥-중국 고대사서에서 주변민족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범칭. 군장君長보다는 격이 낮음)를 참했다.
안제 영초(永初) 5년(111년), 궁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현도에 속할 것을 청했다.
원초(元初) 5년(118년), 다시 예맥(濊貊)과 함께 현도를 약탈하고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했다. (6)
건광(建光) 원년(121년) 봄, 유주자사 풍환,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 등이 군사를 이끌고 새(塞)를 나와 고구려를 공격해, 예맥의 거수를 포획하거나 죽이고 병마(兵馬)와 재물(財物)을 노획했다. 이에 궁이 사자(嗣子-적자,상속자)인 수성(遂成-7대 차대왕, 태조대왕의 동생)을 보내 2천 여명을 지휘해 요광 등을 맞이하게 하고 사신을 보내 거짓항복 하였다.
요광 등이 이를 믿자 수성은 험요지를 점거해 대군(大軍)을 차단하고 은밀히 군사 3천 명을 보내 현도, 요동을 공격해 성곽을 불태우고 2천여 명을 살상했다. 이때 광양, 어양, 우북평, 탁군속국(광양, 어양 등은 모두 유주 소속의 군郡)에서 3천여 기병을 뽑아 함께 구원하게 했는데 이미 맥인(貊人)은 떠난 후였다.
여름, (고구려는) 다시 요동의 선비(鮮卑)족 8천여 명과 함께 요수(遼隊)(7)를 공격해 관원과 백성을 죽이고 약탈했다. 채풍 등이 신창(新昌-요동군 신창현)에서 요격했으나 싸우다 죽었고, 공조 경모, 병조연 용단, 병마연 공손포는 몸으로 채풍을 지키다 모두 진중에서 전사했다. 사망자가 백여 명이었다.
가을, 마침내 궁이 마한, 예맥의 수천 기병을 이끌고 현도를 포위했다. 부여왕이 아들인 위구태를 보내 2만여 명을 이끌게 했는데 주군(州郡)의 병력과 힘을 합해 이를 격파하고 5백여 급의 머리를 베었다.
(6)화려(華麗)는 현(縣)이고 낙랑군에 속한다
(7)현(縣)의 이름이고 요동군에 속한다
是歲宮死, 子遂成立. 姚光上言欲因其喪發兵擊之, 議者皆以爲可許. 尙書陳忠曰:「宮前桀黠, 光不能討, 死而擊之, 非義也. 宜遣弔問, 因責讓前罪, 赦不加誅, 取其後善.」安帝從之. 明年, 遂成還漢生口, 詣玄菟降. 詔曰:「遂成等桀逆無狀, 當斬斷葅醢, 以示百姓, 幸會赦令, 乞罪請降. 鮮卑、濊貊連年寇鈔, 驅略小民, 動以千數, 而裁送數十百人, 非向化之心也. 自今已後, 不與縣官戰斗而自以親附送生口者, 皆與贖直, 縑人四十匹, 小口半之.」
이 해(121년)에 궁이 죽어 아들 수성이 즉위했다. 상(喪) 당한 것을 틈타 출병하여 공격할 것을 상언(上言)하자 의논하는 사람들이 모두 허락할 만하다고 여겼다. 상서 진충(陳忠)이 말했다, “이전에 궁(宮)이 사나워 요광이 토벌하지 못하다 그가 죽자 공격하려는 것은 의롭지 않습니다. 마땅히 사람을 보내 조문하고 이전의 죄를 꾸짖되 용서하여 죽이지 말고 뒷날을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안제(安帝)가 이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