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서] 권85 동이전 / 부여
[後漢書]卷八十五 동이열전(東夷列傳) (夫餘)
夫餘國, 在玄菟北千里. 南與高句驪, 東與挹婁, 西與鮮卑接, 北有弱水. 地方二千里, 本濊地也.
부여국은 현도 북쪽 천리에 있다. 남쪽으로 고구려, 동쪽으로 읍루, 서쪽으로 선비(鮮卑)와 접하고 북쪽에 약수가 있다. 사방 2천리이고 본래 예(濊)의 땅이다.
初, 北夷索離國王出行[一], 其侍兒於後妊身[二], 王還, 欲殺之. 侍兒曰:「前見天上有氣, 大如雞子, 來降我, 因以有身.」王囚之, 後遂生男. 王令置於豕牢[三], 豕以口氣噓之, 不死. 復徙於馬蘭[四], 馬亦如之. 王以爲神, 乃聽母收養, 名曰東明. 東明長而善射, 王忌其猛, 復欲殺之. 東明奔走, 南至掩?水[五], 以弓擊水, 魚鱉皆聚浮水上, 東明乘之得度, 因至夫餘而王之焉.
[一]「索」或作「橐」, 音度洛反.
[二]妊音人鴆反.
[三]牢, 圈也.
[四]蘭卽欄也.
[五]今高麗中有蓋斯水, 疑此水是也.
당초 북이(北夷) 색리국(索離國)의 왕이 출행하였다가 (1) 시아(侍兒-시녀)가 뒤에 임신하자 (2) 왕이 돌아와 그녀를 죽이려 했다. 시아가 말했다, “전에 하늘에 기운이 있는걸 보았는데 크기가 계란만 하였습니다. 그것이 제게 내려와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그녀를 감옥에 가두었는데 뒤에 마침내 남자아이를 낳았다. 왕이 돼지우리에 놓아두자 (3) 돼지가 입김을 불어넣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구간으로 옮기니 (4) 말 또한 입김을 불어넣었다. 왕이 이를 신이하게 여겨 그 모친에게 거두어 기르게 하고 동명(東明)이라 이름지었다. 동명이 장성하여 활을 잘 쏘니 왕이 동명의 용맹함을 꺼려 또다시 죽이려 했다. 동명이 남쪽으로 달아나 엄?수(掩?水)에 이르러 (5) 활로 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모두 모여 물위로 떠올라 동명이 이에 올라타 물을 건널 수 있었고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1) ‘索’은 혹은 ‘橐’(탁)이라고도 하는데 발음은 ‘度洛’(반절 표기)
(2) ‘妊’의 발음은 ‘人鴆’
(3) ‘牢’는 ‘圈’(가축의 우리)
(4) ‘蘭’은 ‘欄’(가축의 우리)
(5)지금 고려에 개사수(蓋斯水)가 있는데 이 개사수가 이것(본문중의 엄?수)이 아닐까 생각된다
於東夷之域, 最爲平敞, 土宜五穀. 出名馬、赤玉、貂豽[六], 大珠如酸棗. 以員柵爲城, 有宮室、倉庫、牢獄. 其人麤大彊勇而謹厚, 不爲寇鈔. 以弓矢刀矛爲兵. 以六畜名官, 有馬加、牛加、狗加, 其邑落皆主屬諸加. 食飲用俎豆, 會同拜爵洗爵, 揖讓升降. 以臘月祭天, 大會連日, 飲食歌舞, 名曰「迎鼓」. 是時斷刑獄, 解囚徒. 有軍事亦祭天, 殺牛, 以蹄占其吉凶[七]. 行人無晝夜, 好歌吟, 音聲不絕. 其俗用刑嚴急, 被誅者皆沒其家人爲奴婢. 盜一責十二. 男女淫皆殺之, 尤治惡妒婦, 既殺, 復尸於山上. 兄死妻嫂. 死則有槨無棺. 殺人殉葬, 多者以百數. 其王葬用玉匣, 漢朝常豫以玉匣付玄菟郡, 王死則迎取以葬焉.
[六]豽似豹, 無前足, 音奴八反.
[七]魏志曰:「牛蹄解者爲凶, 合者爲吉.」
동이의 영역에서 가장 평평하고 넓직하며 토지는 오곡(五穀)에 적합하다. 명마(名馬)과 적옥(赤玉), 담비(貂)와 놜(豽)이 나오는데, (6) 큰 구슬은 대추 크기만 하다. 원책(員柵-둥근 성책)을 성(城)으로 삼고 궁실, 창고, 감옥이 있다. 사람들은 신체가 장대하고 강용(彊勇)한데 성품이 근후(謹厚)해 노략질하지 않는다. 궁(弓), 시(矢), 도(刀), 모(矛)를 병장기로 삼는다.
6가지 가축이름을 딴 관직으로 마가(馬加), 우가(牛加), 구가(狗加) 등이 있고 그 읍락은 모두 제가(諸加)에 예속된다. 음식을 먹을 때 조두(俎豆)를 사용하고, 회동할 때 배례하여 잔을 씻고 (단을) 오르내리며 읍양(揖讓)한다. (옮긴이-주객의 상견례를 묘사하는 듯. 중국예법과 유사한 것으로 묘사)
섣달에 하늘에 제사 지내는데 대회를 열어 연일 음식, 가무를 즐기니 이를 영고(迎鼓)라 한다. 이때에는 형옥(刑獄)을 금하고 죄인을 풀어 준다. 또한 군사를 일으킬 때도 하늘에 제사 지내는데, 소를 죽여 그 발굽으로 길흉을 점친다. (7) 길을 갈 때 밤낮 없이 노래 부르기를 좋아해 그 노랫소리가 끊어지지 않는다.
그 풍속은 형벌이 엄격해 사형 당한 자는 그 가인(家人)들을 모두 노비로 삼고 도둑질한 자는 12배를 배상시킨다. 남녀가 음란하면 모두 죽인다. 특히 투기하는 여인을 미워하여 (여인을) 죽인 후 그 시신을 산에 버린다. 형이 죽이면 형수를 처로 삼는다.
사람이 죽으면 곽은 있으나 관은 없다. 다른 사람을 죽여 순장(殉葬)하는데 (순장되는 이가) 많을 때는 백여 명에 이른다. 왕을 장사 지낼 때는 옥갑(玉匣)을 사용한다. 한조(漢朝)에서는 늘 옥갑을 현도군에 비치해두었는데 왕이 죽으면 이를 가져다 장례에 사용했다.
(6) ‘豽’은 표범과 비슷한데 앞다리가 없고 발음은 ‘奴八’(반절 표기)
(7)[위지魏志]에 이르기를 – 발굽이 갈라지면 흉조, 붙어 있으면 길조로 여긴다
建武中, 東夷諸國皆來獻見. 二十五年, 夫餘王遣使奉貢, 光武厚答報之, 於是使命歲通. 至安帝永初五年, 夫餘王始將步騎七八千人寇鈔樂浪, 殺傷吏民, 後復歸附. 永寧元年, 乃遣嗣子尉仇台(印)[詣]闕貢獻, 天子賜尉仇台印綬金綵. 順帝永和元年, 其王來朝京師, 帝作黃門鼓吹、角抵戲以遣之. 桓帝延熹四年, 遣使朝賀貢獻. 永康元年, 王夫台將二萬餘人寇玄菟, 玄菟太守公孫域擊破之, 斬首千餘級. 至靈帝熹平三年, 復奉章貢獻. 夫餘本屬玄菟, 獻帝時, 其王求屬遼東云
건무(建武-후한 광무제 즉위연호) 중에 동이의 여러 나라가 모두 와서 조공했다.
건무 25년(서기 49년), 부여왕이 사자를 보내 조공하자 광무제가 후하게 답례했다. 이때부터 사절이 해마다 통했다.
안제 영초(永初) 5년(111년)에 이르러 부여왕이 처음으로 보기(步騎) 7-8천 명을 이끌고 낙랑을 침략해 그 관원과 백성을 죽이고 다치게 했다. 그 후에 다시 귀부(歸附)했다.
영녕(永寧) 원년(120년), 적자인 위구태(尉仇台)를 파견해 대궐로 나아가 조공하자 천자(天子)는 위구태에게 인수(印綬)와 금, 비단을 하사했다.
순제 영화(永和) 원년(136년), 부여왕이 경사(京師)에 내조(來朝)하자 황제가 황문고취(黃門鼓吹-궁중음악의 일종)와 각저희(角抵戲)를 베풀었다.
환제 연희(延熹) 4년(161년), 사신을 보내 조하(朝賀)하고 공물을 바쳤다.
영강(永康) 원년(167년), 부여왕 부태(夫台)가 2만여 명을 이끌고 현도를 침략했는데 현도태수 공손역(公孫域)이 이를 격파하고 천여 급의 머리를 베었다.
영제 희평(熹平) 3년(174년), 다시 봉장(奉章)하여 조공했다. 부여는 본래 현도(군)에 속했는데 헌제 때 부여왕이 요동(군)에 속하도록 요청했다고 한다.
[후한서] 권85 동이전 / 읍루
後漢書_卷八十五 동이열전(東夷列傳) (挹婁)
挹婁, 古肅愼之國也. 在夫餘東北千餘里, 東濱大海, 南與北沃沮接, 不知其北所極. 土地多山險. 人形似夫餘, 而言語各異. 有五穀、麻布, 出赤玉、好貂. 無君長, 其邑落各有大人. 處於山林之閒, 土氣極寒, 常爲穴居, 以深爲貴, 大家至接九梯. 好養豕, 食其肉, 衣其皮. 冬以豕膏塗身, 厚數分, 以禦風寒. 夏則裸袒, 以尺布蔽其前後. 其人臭穢不絜, 作廁於中, 圜之而居. 自漢興已後, 臣屬夫餘. 種衆雖少, 而多勇力, 處山險, 又善射, 發能入人目. 弓長四尺, 力如弩. 矢用楛, 長一尺八寸, 青石爲鏃, 鏃皆施毒, 中人即死. 便乘船, 好寇盜, 鄰國畏患, 而卒不能服. 東夷夫餘飲食類(此)皆用俎豆, 唯挹婁獨無, 法俗最無綱紀者也
읍루(挹婁)는 옛날의 숙신국(肅愼國)이다. 부여 북동쪽 천여 리에 있다. 동쪽으로 대해(大海)에 닿아 있고 남쪽으로 북옥저(北沃沮)와 접하는데 그 북쪽 끝은 알 수 없다. 토지는 산이 많고 험하다. 사람의 형상은 부여와 닮았으나 언어는 각기 다르다. 오곡(五穀), 마포(麻布)가 있고 적옥(赤玉), 호초(好貂)가 산출된다.
군장(君長)이 없고 읍락마다 각각 대인(大人)이 있다. 산과 숲 사이에서 사는데 토기(土氣)가 매우 차가워 항상 동굴을 파서 거주하며 (동굴이) 깊을수록 귀하게 여겨 대가(大家)는 사다리 아홉 개 깊이에 이른다. 돼지 기르기를 좋아해 그 고기를 먹고 가죽으로 옷을 해 입는다.
겨울에는 돼지기름을 몸에 바르는데 두텁게 여러 번 발라 바람과 추위를 막는다. 여름에는 벌거벗은 채 지내는데 짧은 베조각(尺布)으로 앞뒤를 가린다. 사람들은 냄새가 나고 불결해 중앙에 화장실을 만들고 이를 둘러싸서 거주한다.
한나라가 흥한 이후로 부여에 신속(臣屬)했다. 무리의 수가 비록 적지만 용맹하고 힘이 세다. 또한 활을 잘 쏘아 사람을 쏘면 능히 눈을 맞춘다. 활은 길이가 4척인데 그 힘이 쇠뇌(弩)와 같다. 화살로는 호나무(楛)를 쓰는데 길이 1척 8촌이고, 푸른 돌을 화살촉으로 쓰는데 화살촉에는 모두 독을 발라 사람이 맞으면 죽는다.
배를 타고 약탈하는 것에 능해 이웃 나라들이 두려워하고 근심하나 급히 제압하지는 못한다. 동이, 부여에서는 음식을 먹을 때 모두 조두(俎豆)를 사용하나 오직 읍루만은 조두가 없고 법속에 가장 기강(綱紀)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