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금정보 : Alice: Madness Returns OST - Track 20 - Surreal >
지난 3주 동안 저는, 소위 말하는 "꿈 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정신분석이나 신비체험을 위해서는 아닙니다.
저는 그런 쪽에는 이렇다 할 관심이 없는 사람이거든요.
다만 저는 특이한 꿈을 무척 자주 꾸는 편입니다.
그것도 딱히 특별한 것은 아니고, 제 성격이 다소 신경질적이고 스트레스에 취약하다보니
잠에 잘 들지도 못하고 오밤 중에 별 이유없이 깨고 그러거든요. (오늘도 그렇네요.)
숙면을 취하질 못하니 꿈을 자주 꾸게 되고, 꿈을 꾸는 횟수가 많다보니 이상한 꿈도 많다.
그런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제가 꿈 일기를 쓰기 시작한 계기도 약 3주 전에 꾼 특이한 꿈 때문입니다.
그 날, 꿈 속에서 저는 사람들에게 쫒기고 있었습니다.
바로 등 뒤를 쫒기는 건 아니고,
몇 명의 패거리가 온 동네에 깔려 저를 찾아 두리번 거리고 있고
저는 그들에게 들키지 않고 그 곳을 빠져나오거나 몸을 숨길 곳을 찾고 있었죠.
전 긴장을 숨긴 채, 짐짓 태연한 척 인파에 섞여 "공항역(空港驛)"으로 들어갔습니다.
공항역은 물론 실존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하지만 꿈이란게 대게 그렇듯, 저는 "도망치려면 공항역이 제일이지!"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공항역은 공항에 거대 상가복합단지와 백화점 따위가 결합되 있는 곳인데,
좌우간 구조가 대단히 복잡하고 유동인구가 많아, 추적자를 따돌리기도 좋은 곳이었습니다.
더군다 들키지 않고 탑승수속을 밟을 수만 있다면 완벽하게 도망칠 수 있으니, 이만한 곳이 없었죠.
하지만 그들도 예상했는지, 공항역에는 도처에 추적자들이 깔려 있었습니다.
매표소와 탑승구는 물론이고, 단지에도 모든 층에도 곳곳에 저를 쫒은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행동패턴이 완전히 예상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점점 조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단지 내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보니 금새 길도 잃어버리고, 모통이를 돌 때마다 주위를 살피는 추격자들이 보이자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누가 무슨 이유로 나를 쫒는 건지.
잡히면 어떻게 되는지 아무 것도 모르면서도
"이럴 바에야 시내에 있는게 나앗겠다. 어딘지도 모르고 이렇게 뛰어다니다가 재수없게 마주치면 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끔찍한 좌절감에 저를 덥쳐왔습니다.
저는 놈들에게 잡힐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어 난간에 손을 뻗었습니다.
이걸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자살을 결심한 순간 "이게 꿈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그리고 생각을 하면 할 수록 "이건 틀림없이 꿈이다"는 확신이 강해졌습니다.
꿈을 자주 꾸는 분들은 그런 경험이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아, 이 꿈 전에 꾼 적이 있는데...!"라는 생각에 단순한 꿈이 자각몽으로 바뀌거나,
"이 장소는 꿈 속에 자주 나오는구나... 또 여긴가."하는 때가 있잖아요.
저에겐 공항역이 그런 공간이었습니다.
공항역 꿈은 이따금 꾸는 낯익은 꿈이고, 이곳에서 수없이 헤멨던 기억이 물밀듯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마치 필승법을 눈치 챈 게이머가 된 기분이 들었습니다.
공항역은 내부구조가 너무 복잡해서 몇 번을 와도 길을 잃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공항역이 "공항역(-驛)"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지하에 폐쇄된 지하철 역이 있기 때문이다!
지하는 버려진지 오래되어서 사람은 커녕 경비요원들도 들어오지 않는다.
그 놈들한테 들키지 않고 지하 폐역 시설 안으로만 들어가면 나는 안전하다.
뚜렷한 희망이 생기자 마음도 진정이 되고, 무엇보다 꿈이라는 걸 깨닫자 여유가 생겼습니다.
지금까지 별의 별 악몽을 다 꾸었지만 꿈 때문에 죽은 적은 없었거든요.
그래도 꿈 속에서 자살하거나 추적자에게 잡히는 건 불쾌한 일이니,
저는 조심스럽게 주위의 눈을 피해 지하로 향했습니다.
폐역에 들어가는 방법은 우선 지하2층 상가까지 내려간 뒤,
서점 뒤 쪽 지하 3층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비상계단으로 들어가,
그 계단 벽면에 붙은 배전반을 통해 내려갑니다.
이게 조명 배전반이 아니라, 엘레베이터 기계실에 연결된 배전반이라
위 아래로 뻥 뚫려있고 철제 사다리까지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걸 타고 밑으로 한 층 내려가면 옆으로 1m 높이의 작은 통로가 뻗어있는데,
그 통로는 폐역의 보일러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쓰고 나니 괜히 찝찝하네요. 이건 저만 아는 사실인데ㅎㅎ)
<그림 3. 아이오와 주 신시내티 지하철. 위키백과>
폐 지하철역은 딱 저런 식입니다.
공사를 끝내놓고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채 방치된 듯,
도색도 되어있지 않고, 낙서도, 쓰레기도, 쥐새끼 한 마리도 없이,
부스러진 시멘트 가루만 날리는 음침한 곳이었습니다.
이 지하철도 텅 비었을 뿐 쓸데없이 구조가 복잡한건 마찬가지였습니다.
기둥을 따라 쭉 걷다보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고,
계단을 따라 한 층 내려가면 윗층과 똑같은 구조가 반복되는 식입니다.
하지만 어떨 때는 방향이 90도로 돌아가 있기도 하고,
한번에 두 층을 내려가, 건너 뛴 중간층을 가기 위해서는 건너편 계단을 타야 하는 등.
오히려 특징이 없어서 길 찾기가 더 힘든 곳이었습니다.
추격자들이 쫒아오는 기색은 없지만,
만의 하나의 경우가 있으니 좀 더 깊이 내려가기로 하고
차분히 축축한 시멘트를 밟으며 걷고 있자니 괜시리 쓸쓸해졌습니다.
"이제 언제까지 이 꿈을 꾸고 있어야 하는 걸까."
"왜 자꾸 이런 꿈을 잊을만하면 한 번 씩 꾸게 되는걸까."
"죽으면 꿈에서 깰 텐데, 여기까지 와서 죽으려면 시멘트에 머리를 들이받는 수 밖에 없나."
"여기는 몇 번을 와도 매번 헷갈리는구나."
"기왕이니 온 김에 지리를 익혀두자."
따위의, 한편으론 현실적이고 한편으론 비현실적인 기묘한 생각을 하며 한층한층 지하로 내려가고 있자니,
정말 뜬금없이, 아무 이유도 없이, 억울하고 화가 났습니다.
꿈에서 깬 지금 생각하면, 갑자기 사람이 미쳐버린 것마냥
눈물을 질질 흘리면서 악을 쓰고 쌍욕을 하고, 뒤집어져서 발버둥 치다가, 일어나서 주먹으로 벽을 쿵쿵 치고...
왜 갑자기 그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왜 이 미친 동네는 올 때마다 길을 모르겠냐고!!! 나는 왜 매번 여길 기어들어오냐고!!!"라거나
"그 미친 놈들은 왜 나만 못 죽여 안달이야!! 위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같은 정신나간 소리를 하면서 발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여튼 이런 곰팡내나는 하수구같은 데서 버티느니,
차라리 나가서 그 놈들한테 잡혀서 빨리 꿈이나 깨자는 마음에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벌써 길을 잃었는지, 암만 가도 같은 곳만 뱅뱅 도는 것 같더라구요.
그 때, 철로 건너편에서 마주오는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여기가 제가 말한 "특이한" 부분입니다.
지금까지는 한번도 지하에서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거든요.
빨간 떡볶이코트를 입은, 중고등학생 쯤 되어보이는 여자였습니다.
저는 간신히 발견한 사람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걸었습니다.
"야, 이 개같은 X아! 넌 왜 여기서 돌아다녀!"
제가 왜 그렇게 정신이 돌아버렸는지는 아직도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전 분명 "사람을 만나서 다행이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차마 말하기 힘든 미친 폭언이었습니다.
(재차 말씀드리지만, 전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설사 내면의식에 그런 충동이 있다고 해도, 현실에선 철저한 통제력이 있는 사람이에요!
솔직하게 쓰는 글이니까 그런갑다 하고 믿어주세요ㅠㅠㅠ)
"씨X, 넌 뭐하는 X이야! 여길 어떻게 알고 왔어! 내가 여기서 한 번도 사람 만난 적이 없는데!!"
저의 미치광이같은 욕설에, 여자는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넌 여기 온 적 없어."
라고 차갑게 대꾸했습니다.
전 말문이 막혀 멀뚱히 서서 어버버거리며 힘겹게 다시 물었습니다.
"뭐...?"
"너 이 꿈 처음 꾼다고." 그 순간 머리가 새하얘지면서 찬물을 뒤집어 쓴듯이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대로 굳어있다가,
언제 깨었는지도 모르게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침대 위에서도 입을 멍하니 열고 침을 질질 흘리고 있더라구요.
일어나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전 분명 "공항역"에 대한 꿈을 수차례 꾼 것 같긴 한데
정확히 언제 그런 꿈을 꿨는지.
어떤 계기로 지하 폐역으로 들어가는 복잡한 통로를 알아낸 건지.
그 때는 어떻게 꿈에서 깨어났는지.
중요한 부분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럼 저는 정말 그 여자의 말처럼 공항역 꿈을 처음 꾼 걸까요.
난 공항역에 비오는 날에 간 적도 있고, 한 여름에 간 적도 있고,
너무 추웠던 날도 있고, 더워서 땀에 흠뻑 젖은 적도 있고,
넘어져서 옷을 더럽힌 날. 도망치다 핸드폰을 떨어뜨린 날. 배전반 안에서 발목을 접질린 날도 있는데...
그 여자의 말대로라면, 저는 어제 하룻밤 꿈 사이에
몇날 며칠을 공항역에서 헤메고 또 헤메다
그 여자를 만나 깨달음을 얻은 탓에 겨우 탈출할 수 있었던 거였던 걸까요.
저는 지금도 과거에 공항역 꿈을 수 차례 꿨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증명은 커녕, 스스로 확신할만한 근거도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3주 전의 일입니다.
그 날은 하루 종일 그 꿈을 곱씹다가, 그 내용을 최대한 상세히 노트에 적어두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은 그 날의 "꿈 일기"를 바탕으로 쓴 것 입니다.
아침마다 꿈 일기를 쓰는 건, 솔직히 귀찮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눈이 살짝 뜨였다 싶으면 침대에 불이 붙은 것 마냥 튀어올라서,
냅다 화장실로 달려가 샤워를 하고 알바를 하러 튀어나가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꿈의 내용은 전부 잊혀지고, 뭐라도 한 글자 쓸거리도 남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그 때의 꿈이 잊혀질 즈음.
제가 다시 공항역 꿈을 꾸게 된다면, 그 때는 이 꿈 일기가 확실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나
제가 다시 공항역 꿈을 꾸게 되었을 때.
꿈 일기장에 공항역 이야기만 새하얀 백지로 남아있는 소름돋는 심령현상이 일어날 것을 대비하여,
여기 오유 공게에도 그 흔적을 남기는 바입니다.
길고, 난잡하고, 불쾌하고, 별로 무섭지도 않고, 순전히 개인적인 목적으로 쓴 글이었습니다만,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이 계시다면 새삼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해몽을 원해 쓴 글은 아니지만, 여러분의 의견을 들려주신다면 기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