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글귀이자, 모토로 삼는
노무현 대통령 말씀인데
신영복 선생께서 노무현 대통령 묘역 묘비문으로 써주셨었네요.
두 분의 아름다운 생철학이 훌륭한 묘비문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봉하로 가는 길은 멀었다. 봉하가 멀다는 것은 물론 거리 때문만은 아니지만 지난 2일 서울에서 아침 8시에 출발하여 고속도로를 그야말로 고속으로 달려 오후 1시경에야 겨우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멀고 작은 시골 마을이 지금은 연간 1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변방의 창조성을 이처럼 분명하게 보여주는 현장이 달리 있을 것 같지 않다. 온 국민이 오열했던 비극의 현장, 작은 고인돌 하나로 남은 묘역이 그 변방의 고독을 떨치고 새로운 시대의 ‘시작’으로 도약하고 있었다. 변방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현대사에서 광주와 노무현은 시대를 가르는 아이콘이다. 누구도 광주의 비극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없듯이 누구도 노무현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그 이전과 그 이후를 확연히 나누는 역사의 분기점이 아닐 수 없다. 500만 애도의 물결이 보여준 것은 한 마디로 ‘회한(悔恨)’이었고 ‘각성(覺醒)’이었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회한이었고 권력이 얼마나 비정한 것인가를 깨닫고, 좋은 정치란 과연 어떤 것인가를 깨닫는 통절한 ‘각성’이었다. 이곳을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생환(生還)하는 것이 바로 그 회한과 각성이었다.
내가 쓴 글씨는 묘석을 받치고 있는 강판 앞부분에 새겨져 있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적 역량입니다.” ‘작은 비석위원회’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어록 중에서 뽑은 글귀이지만 놀랍게도 이 묘비문 역시 ‘각성’을 호소하고 있다.
우리는 참배를 마치고 사저(私邸)에 들러 봉하를 찾아온 까닭을 말씀드리고 권양숙 여사의 안내를 받아 ‘사람 사는 세상’ 앞에서 사진촬영을 했다. 문재인 이사장은 참여정부 마지막 장·차관 모임 때 노무현 대통령이 이 글씨를 부탁하는 자리에 함께 있었다고 했다. 그가 떠난 사저에 걸려 있는 글씨가 다시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사저에는 또 한 개의 내 글씨가 남아 있었다. ‘愚公移山’이다. 우공이산은 아흔 살이 넘은 우공이라는 노인이 집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산을 옮기는 고사이다. 지수(智수)라는 사람이 그 어리석음을 비웃었지만 그는 자기가 이루지 못하더라도 자자손손이 이어가면 언젠가는 산을 옮길 수 있다는 우직한 신념을 버리지 않는다. 천상의 옥황상제가 그 뜻을 가상하게 여겨 산을 옮겨주었다는 고사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옥황상제가 옮겨주었다는 부분을 민중이 각성함으로써 거대한 역사를 이룩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노 대통령이 퇴임한 후 자신의 아이디를 ‘노공이산’(盧公移山)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은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일이 얼마나 멀고 험한 길인가를 몸소 절감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대통령의 자리가 진보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적절한 자리인가를 고민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새 시대의 맏형이 되지 못하고 구시대의 막내가 된 것을 개탄했다. 우공의 우직함에서 위로를 받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기사 전문:
http://www.shinyoungbok.pe.kr/?mid=frontier&document_srl=49148&listStyle=view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