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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다리 회담'에 대한 잡설
게시물ID : sisa_105544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페소아
추천 : 68
조회수 : 3220회
댓글수 : 13개
등록시간 : 2018/05/07 23:4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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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도보다리 회담에 대해 미술사적으로 분석한 글이 아직은 없는 것 같아서, 지식이 일천하고 두서없지만 한 번 적어봤습니다. 

글에 들어가기에 앞서, 도보다리 회담 아이디어를 낸 것이 탁현민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언론 기사들이 있는데, 저는 기레기가 언급하는 '청와대 핵심관계자' 같은 말보다는, 탁현민과 직접 통화했다는 김어준의 말을 더 신뢰합니다.

설령 그 핵심관계자 말대로 다른 사람이 아이디어를 냈다고 해도, 김어준과 통화한 것을 보면 탁현민도 도보다리 회담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 것은 분명해 보이고요. 탁현민을 칭찬하는 것은 도보다리 때문만이 아니라, 도보다리를 포함해서 한 번 진지하게 언급하려 했던 것이라.

 

 

 

표현의 정치, 그리고 정치의 표현

 

 

존 케이지가 1952'433'의 침묵의 피아노를 '연주'하며 소음을 음악으로 전환 시켰을 때, 음악은 추상에서 현실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침묵 사이에 퍼져나오는 소음은 피아노 선율을 대체했다. 그것은 아름답지도 비율적이지도 않았지만, 실체적이었다.



도보다리.jpg
 


2018427. 36분의 소음.


전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시대의 방향을 결정지를 가장 중대하고 긴밀한 대화가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와 새소리만이 평화롭게 여백을 채워나갔다. 오직 손짓과 표정, 입의 움직임으로밖에 파악할 수 없는 무언의 교감이 사람들의 인식을 파고들었다. 그것은 기묘한 충격이었고, 잔잔한 감동이었다.

 

그곳에서 소음은 정치가 되었고, 외교가 되었고, 가장 세련되고 파격적인 정상회담이 되었으며, 시대적 전환점의 상징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어떤 행위에 의미를 담아 상징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은 어떤 문화에도 존재하며, 가장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정치적 행위이다. 누군가는 스포트라이트 아래서 연설을 했고, 누군가는 바로 그 연설자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들에게 사죄하기 위해 강제 수용소에서 묵념했고, 누군가는 국내용 소고기 햄버거를 먹었고, 누군가는 수입용 소고기 스테이크를 먹었다.

 

각각의 찰나의 이미지는 뉴스를 통해 수십, 수백 번씩 반복되며 상징체계를 이루고 퍼져나가 실재를 웃도는 파급력으로 사람들의 관념에 뿌리를 내린다. 그러나 정치인들이 달가워하며 유용하게 이용하고 있는 미디어는 매우 빈번히, 마치 양날의 검처럼 그들의 숨을 옥죈다. 통제할 수 없는 순간의 모습, 감정, 언어가 가면의 균열 사이에 삐져나와 끝없는 조롱의 대상이 되고, 이윽고 그 균열이 그 사람의 대표 이미지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미지 정치'는 언제나 있었지만, 20세기를 넘어 21세기에도 그 위상은 여전히 강력하다. 누군가는 언론과 미디어의 끊임 없는 서포트를 받고, 누군가는 적대적인 미디어의 압박에, 단 한 번의 말실수도 하지 않으려 자신을 절제할 수밖에 없다. 하루에 밥 한 끼는 꼭 기자와 먹으라는 여의도 요물의 금옥 같은 조언처럼, 미디어는 정치인의 이미지를 다듬고, 상징을 생산하고, 프레임을 만들어준다. 물론 그 반대도.

 

그러나 미디어의 이런 권력욕, 혹은 눈물 나는 노력은 언제나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는데, 첫째는 서포트 해주는 정치인의 본질적 천박함, 수준의 저열함, 내면의 빈곤함에서 오는 이미지 메이킹의 한계이며, 둘째는 미디어 자신의 본질적 천박함, 수준의 저열함, 감각적 빈곤함에서 오는 촌스러운 표현의 한계이다. 그렇게 환상적으로 수준 낮은 조합을 통해 만들어진 정치적 제스쳐를 보면 매우 곤혹스럽다. 실로 조야해서 비극적이라, 반대로 희극이 되어버린 명작을 보며 비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참기 위해서는 상당한 인내가 요구된다.


그래서 언제나, 정치표현은 세련되기 매우 힘들고, 감동적이기는 그 이상으로 어렵다. 거짓된 표현의 정치는 20세기의 찬란했던 영광을 뒤로한 채, 비참한 조롱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분열된 자신의 이미지를 완벽히 수습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지금, 약삭빠른 두뇌와 감언이설로 대변되는, 정치력으로 단수를 나누던 구시대 정치인들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무수히 뻗어 나가는 단편적 이미지들은 수습할 길을 잃은 채, 그러나 매우 핵심적으로, 그 인물의 공허한 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미지 정치의 시대는 앞으로도 계속되겠지만, 포장하기 위한 표현의 정치는 명백히 종말에 다다르고 있다.

 

이제는 자신의 분열된 이미지를 통제하려 애쓰는 사람이 아닌, 자신의 본 모습에 이미지들이 자연스럽게 소급되는 진실한 사람이 정치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 디지털 혁명은 일상생활의 편의와 사람들 인식의 전환을 넘어, 진정한 종착점인 정치적 변화에 다다르고 있다. 각본에 쓰인 표현의 정치를 하려는 사람이 아닌, 진정성 있는 정치를 위해 자신을 표현해야 하는 사람이 인정받아야 하는 시대가. 그리고 그 시대정신의 전환점에 문재인 정부가 있다.

 

정권을 잡았던 각 정부는 지도자의 가치관에 따라 각각의 정체성이 표면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이번 문재인 정부의 기본적 방향성은, 문재인 대통령 본인의 가치관이 그대로 반영된 듯한 투명한 실용주의다. 어떤 일을 추진함에 군더더기를 최대한 배제하고, 빈틈없이 계획을 추진해나간다. 과정은 최대한 공개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직접적인 언급, 정부 발표, 혹은 대변인 브리핑 중에 어떤 사안이 언급되면, 이미 그 사안은 상당한 진척을 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외교 부분에서 정부가 언급한 사안은 반드시, 라도 해도 좋을 정도로 언제나 만족스러운 결과로 돌아왔다. 포장하기 위한 언론플레이를 하지 않으며, 장황한 비전이나 허황된 단어를 나열하지도 않는다. 의심과 불신으로 점칠 됐던 9년의 세월을 지나, 정부의 언어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매우 곤란한 임무를 1년도 안 돼서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신뢰는 언론 적폐들의 비협조를 넘어선 저열한 비방과 거짓 날조에 대비되어 더욱 드높아지고 있다. 물론 그들이 원했던 결과는 아니었지만, 합리적 이해를 넘어선 감정적 신뢰의 길을 열어준 것은 다름 아닌 언론에 대한 불신이었다. 그럼에도 문재인 정부는 지지자들만의 정부가 아닌 대한민국 모든 국민의 정부이기에, 언론과 지속적인 브리핑을 하고, 소통의 창구도 늘리는 등 국민의 이해와 관심과 참여를 높이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해왔고, 그 중심에는 함축적이고 세련된 상징적 표현의 제스쳐가 있었다.

 

이러한 정치표현은 언론이 사안을 보도하지 않거나 축소하고, 왜곡하며 적대적인 단어를 통해 악의적으로 이미지를 실추시키려는 현 상황과, 쉼 없이 나오는 뉴스 물량에 맞서기 위한 방편이기도 한 동시에, 촛불 혁명을 일으킨 일반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세련된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방법론이며, 또한 가장 성공적으로 문재인 정부의 실용성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문재인 정부의 진정성이 의심할 수 없이 올곧기 때문일 것이다. 이념에 따라 호불호는 있을 수 있으나 우리나라의 15% 정도를 제외하고 문재인 정부가 국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까마귀가 공작새의 깃털로 외향을 꾸미면 조롱의 대상이 되지만, 봉황의 깃털 손질이 과장된 포장이라고 비웃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이러한 치밀하고 세련된 정치적, 외교적 제스처가 사람들 사이에 탄성으로 번질 때, 늘 언급되는 이름이 있다.


탁현민 행정관의 상징적 정치표현은 매번 마주할 때마다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게 한다. 장진호, 하얼빈을 넘어 독도 새우, 남북합동공연, 그리고 그 정점을 찍은 이번 도보다리 회담. 그의 재능만을 냉정하게 판단한다면 분명 자주 접할 수 없을 탁월한 것이며, 개인적으로 이런 은유적이며 함축적인 정치표현의 예시를 본 적은 극히 드물다. 이는 그가 예외적일 정도로 인문학과 예술을 접목할 수 있는 놀라운 균형감각과 실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과 동시에, 그는 없는 것을 만들지 않고, 이미 존재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진정성을 좀 더 명확히, 그리고 섬세하게 돋보이게 하는 역할에 충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도보 다리에서의 대화의 자리를 만들고 계획한 사람은 있다. 그러나 거기 앉아 30분 이상 이야기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그 모든 대화가 계획됐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도보 다리 대담이 세계의 주목을 받는 이유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진지하고 솔직한 두 정상의 모습이 가감 없이 생중계됐기 때문이다. 그 자연스러운 모습에는 국가의 미래를 위해 의견을 교환하는 진정성이 함축적으로 드러났다. 그것은 21세기 들어와 가장 중요한 정치사적 밀담이, 가장 개방된 형태를 통하여 예술적으로 표현된 순간이기도 했다.

 

 


포스트 정치예술(Post-Political Art)의 예시

 

모든 예술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만드는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기 때문에 이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예술이 권력이나 종교에 빌붙어 연명하던 시대에도, 그것을 탈피하고 예술을 그 자체로 존재시키기 위해서, 그 본질적 순수함을 논했던 모더니스트들이 외쳤던 선언문(Manifesto)들도 다분히 정치적이었다. 비타협은 비타협 자체로도 정치적 행위였다. 심지어 자신들이 진정한 새로운 예술의 시대정신이라 외치던 선언문들은 서로 각기 다른 선언들을 은연중에 깔보거나 무시하기도 했다. 매우 정치적으로.


근본적 정체성을 제외하고 봐도, 카메라를 대신해 전쟁의 참상을 표현했을 때, 혁명을 표현하거나 시민운동과 함께했을 때, 권력에 대한 저항과 풍자는 미술사에서 매우 빈번한 소재였다. 그리고 근대화에서 탈 근대화로 진입하던 60~70년대에 일어났던 아나키즘과 그와 함께 움직였던 여러 인권운동의 시작과 함께 정치예술(Political Art)은 진정으로 정치적 행위로 간주 되기 시작했다. 예술은 언제나 저항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모던시대에 외쳤던 예술의 순수를 이제는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나 본질이 사라진 시대에 존재의의적 숙명을 논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정치예술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그것을 만드는 예술가의 정치 성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거칠고 직선적인 표현에 미학적 상징성이나 참신성을 논하기 힘들어졌으며, 비난과 풍자로 점칠 된 단순한 선동 물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었다. 정치예술은 여태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나오겠지만, 태생적 한계와 표현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날 길은 없어 보인다. 안타깝게도 표현의 행위가 언제나 예술의 진보로 이어지지는 못한다.

 

정치예술은 비타협이나 비난, 풍자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쉽지 않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지만, 정치예술을 만드는 예술가 부류는 언제나 소수의 의견을 대변하고, 과격한 진보적인 성향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며 이들은 보통 진보적 정치인, 혹은 세력과 긴밀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지젝의 사상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를 향한 염세적 냉소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고, 현실적 대안보다는 유토피아에 대한 무분별한 망상을 세상에 강요하는 경우가 대단히 빈번하다. 이들에게 정부의 잘 한 부분을 인정하거나, 그것을 주제로 표현하라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그들은 권력의 도구가 되는 것에 결벽적 알레르기 증상을 보일 것이다. 평등의 유토피아를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숭배하는 그들에게 현실에 대한 타협을 이야기할 수는 없고, 냉소하며 풍자하고 싶은 욕망 너머의 무언가를 기대하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예술가가 아닌 탁현민에게 현재의 정치예술을 넘은, 포스트 정치예술 표현에 대한 일말의 가능성을 보게 되며, 동시에 이 가능성에 대한 예시는 이 한 번으로 끝날 확률이 높을 것이라는 결론에 성급하게 도달한다. 탁현민 정도의 역량이 있는 행정관은 드물고, 그런 행정관이 세팅한 상징적 정치 미학을 완벽하게, 혹은 그 이상으로 소화하여 대중이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물론, 감탄하며 바라보게 되는 지도자는 문재인 대통령 외에 다시 만날 수 있을지 확신할 수도 없으며, 이 두 조합을 한 번에 마주할 가능성은 더욱더 낮기 때문이다.


탁현민의 재능은 참신함보다 균형에 있는 듯 보인다. 정치적 소재에 의미를 담아 상징으로 전환한 뒤 풀어내는 능력이 매우 뛰어난데, 여기서 중요한 점이 그런 정치학적 이해, 인문학적 소양, 미학적 감각,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치밀한 설계와 명료함이 모두 아우러져야 대중적 호응이 따라오게 된다. 예술가 중에 본인의 재능에 심취해 대중적 호응이나 이해를 얻지 못하거나, 스스로 이해를 받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애쓰는 경우는 매우 빈번하다. 자신의 재능에 취하지 않고, 그렇다고 세련미 떨어지는 것을 만들지 않고, 모든 사람이 감탄할만한 상징적 표현이 가능한 것은 예술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 정말 드문 능력이다.

 

물론 탁현민은 예술가가 아니다. 정부를 위해 일하는 행정관이며, 행정관이기 이전에는 공연기획자였다. 엄밀히 말하면 탁현민은 없는 것을 만들지는 않는다. 그의 특출남은 이미 존재하는 것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세팅하고, 보다 감성적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하는 연출의 재능에 있다. 공연기획자였던 시절 비틀즈의 매니저였던 브라이언 엡스타인을 언급하며, 아티스트를 완벽히 이해하여 최고의 재능을 뽑아내 세팅하는 점에 감탄했다고 말했던 그는,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새로운 시대정신의 기준이 될 인물을 만나 그를 이해하고, 그의 진정성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고 있다. 그는 아티스트는 아니지만, 훌륭한 큐레이터이다. 특히나,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시간과 자유가 없음에도, 정부의 국정 운영에 발맞춰 타협하면서, 늘 확실하고 섬세한 상징을 찾아내어 일반 감수성에 와닿고 공감할 수 있게 표현한다는 점은, 그를 이번 정부의 매우 특별한 존재로 인식되게 한다.

 

지도자의 정치적 행위를 미학적 상징주의로 다듬는 것에서 오는 대중의 불신은 인류사에 공통적인 상식이었다. 정치인 대부분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상징을 이용했고, 문화를 통제했고, 시대정신을 고착시켰으며, 학자와 언론들은 몇몇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바로 그 권력의 수하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 문재인 정부의 이 상징적 정치표현에 대한 대중의 거부감이 없다는 사실이, 권력 불신에 대한 일반 대중의 근본적 가치관이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이것은 다시 1년여 전, 인류사의 유례없을 시민의 무혈 촛불 혁명을 통한 새로운 정치지형의 탄생을 떠올리게 한다. 상징 분석적 관점에서 박근혜는 그야말로 한국 전근대 상징들의 총체적 집합체였다. 박정희에서 박근혜로 넘어온 왕권주의와 거짓신화의 상징이자, 최태민, 최순실로 이어지는 구세대 미신의 정점. 그리고 그 구시대의 망령은 국민의 손으로 처단됐고, 2017년에서야 비로소 진정으로 새로운 시대정신이 발아하게 됐다.


껍데기는 가라. 그리고, 이제 갈 수밖에 없는 시대가 왔다. 그 시대정신 아래에서 여전히 남아있는 구시대의 잔재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이제는 진정성이 있는 정치인과 지도자만이 국민의 지지를 받는 시대가 왔다. 플라톤의 미학을 언급할 때 언제나 고대 정신체계를 비판하기 위해서만 언급하지만, 곤혹스럽게도 때로, 지금처럼 그 탁월함을 다시 꺼내서 재해석해야 할 때가 오곤 한다.

 

진실한 것은 선하며, 그래서 도덕적이고, 그리하여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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