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튼...
바츠해방전쟁에서 가장 압권인 부분을 꼽으라면 나는 두말할 필요없이 아키러스의 선언을 꼽겠다.
DK연합이 바츠해방군에 쫓겨 오만의 탑에 은신해 있을 때, 혈맹원들의 약해진 마음을 다 잡은 명문이다.
"세상에도 선과악이 존재하듯이 리니지2에도 선과악이 존재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선을 지향하고 선택합니다.
하지만 본혈맹은 선보다는 과감하게 악을 선택하였습니다.
악이 있었기에 선이 더욱더 빛날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억지로 선이라고 우기고 싶지 않습니다. 당당하게 악이었다고 자신있게 말하고 싶습니다...(하략)"
사실 바츠해방전쟁의 원인은 이들의 악행에 있었고, 이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이들은 강했고, 강했기에 이들 앞에서 대놓고 악이라 손가락질 할 수 없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선언이 나올 당시 DK연맹은 풍전등화의 상황에 놓여 있었고, 덕분에 리니지세계 내에서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솔직히 자신들이 한 짓이 있으니... 뭐라 반박할 말도 없고, 그나마 이젠 다 망해가고...
연이은 패배로 사기가 떨어진 DK혈맹원 상당수는 이때 다른 서버로 이전하거나 게임을 접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키러스의 연설은 혈맹원들에게 존재의 정당성과 정체성에 확신을 가져다 주었다.
누군가에겐 말도 안 되는 궤변이었지만, 누군가에겐 감동적인 구원의 메시지였다.
“그래 난 악이야~. 악으로서 당당하면 되는 거야. 악이면 어떠랴~! 이 세계가 원래 그런데...”
어쨋든 아키러스는 이 유명한 선언을 통해 바츠연합에 쫓기고 있던 혈맹원들의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고, 반격을 가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이거 참... 당당한 악이라...
(어디서 많이 겪어 본 듯한 느낌이다.
아무리 무슨 짓을 저질러도 당당한 보수인사들, 그리고 그들에게 무조건 표를 던지는... 음... 암튼 뭐 그렇다.)
하지만 솔직히 이 선언의 효과는 그 이상이었다.
아키러스는 자신을 악으로 정의함으로써 바츠해방군을 선의 자리에 서게 만들었다. 선과 악의 프레임을 만들어낸 것이다.
바츠해방군? 그래 넌 선이고, 난 악이다.
바츠해방군은 선이 되었지만, 이로 인해 자기도 모르게 선의 올가미에 빠져들고 말았다.
리니지세계의 근간은 레벨업과 아이템에 있다. 레벨업을 위해서는 아이템이 필요하고, 아이템을 위해서는 레벨업이 필요하다.
레벨업이 될수록 좋은 아이템을 얻을 수 있고, 좋은 아이템을 얻을수록 레벨업이 쉬워진다.
그리고 이를 위한 최적의 방법은 고랩 몬스터가 있는 사냥터를 독점하는 것이다.
선과 악이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라, 오직 레벨업과 아이템을 위한 노가다만이 존재하는 세계였던 것이다.
그런데 아키러스가 자신을 악으로 정의하면서 자연스럽게
악은 사냥터를 독점하는 것, 이를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것.
선은 사냥터를 개방하는 것, 이를 위해 어떤 희생이든 감수하는 것이라는 도식이 만들어졌다.
악은 나 자신에 충실한 것, 선은 나와 같이 너를 배려하는 것으로 정의된 것이다.
바츠서버에서 악은 분명하다. 자기 맘대로 세금을 올리고, 사냥터를 독점하고, 반항하면 쫓아가 척살하는 것이다.
악이란 원래 그렇다. 자기만 생각하면, 그게 타인에게 악이 된다. 어려울 게 없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 힘만 있다면... 나에겐 좋은 것이기도 하다. 꼭 할 필요는 없지만, 힘만 있다면 누구든 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이 선언은 악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 셈이 되었다.
하지만 선은 분명하지 않다. 선이 되기 위해서는 타인을 배려해야 한다.
세금을 내리고, 사냥터를 개방하고, 타인의 캐릭터를 척살하지 않는 것... 그 이상이 필요하다.
타인... 타인은 내가 아닌 존재, 나와 다른 존재, 그래서 이해하기 힘든 존재이다.
그리고 그런 타인은 나를 제외한 다른 모두, 너무 많고 너무 다양한 존재들이다.
그들 모두를 나를 위하듯 배려해야 한다. 어떻게 이들 모두를 배려할 수 있단 말인가?
이로써 선은 당연한 가치지만 현실적으로 이룰 수 없는 이상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선의 이데올로기 자체에 있다.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선은, 절대선이다.
칸트의 정언명법처럼 꼭 지켜야만 하고, 행해야만 하는 선이다. 무조건 해야 하고, 어기면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도덕적 기준도 높고, 게다가 지켜야 할 것도 많다. 단순히 세금을 내리고, 사냥터를 개방하고, 타인의 캐릭터를 척살하지 않는 것을 넘어...
말도 조심해서 눈짓하나 손짓하나에도 예의를 담아 마음을 다해 상대방을 배려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을 희생할 줄도 알아야 한다.
한 마디로 선하다는 말은 완벽하다는 의미이고, ‘선’의 이름이 붙는 순간 완벽해져야만 한다.
선하기 위해서는 성자가 되어야 한다.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는 모두가 바라는 것이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이를 실행하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자기 혼자 하는 게임이 아니라, 파티나 혈맹을 만들어 집단으로 행동해야 하는 게임 내에서
자기 혼자 고고한 척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군주가 착해도 혈맹원까지 착하란 법은 없다.
모두의 법, 게임의 기본 룰이 레벨업과 아이템획득이고, 이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사냥터 독점인 상황에서
무한한 사랑과 용서, 희생을 이야기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DK혈맹의 세도우여솔만 해도, 전략적 이유때문에 혈맹원들을 끌고 반란군을 잡으러 다녔지만,
혈맹원들이 사냥을 할 수 없어 불만을 터트리자, 회군해야 하지 않았던가?
앞에서 이야기했듯, 바츠해방전쟁은 선과 악의 싸움이 아니라 레벨업과 아이템을 위한 싸움, 사냥터를 둘러싼 이권다툼에서 비롯되었다. 리니지세계는 선악이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라, 레벨업과 아이템획득을 위한 무한경쟁이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문제는 이 무한경쟁을 어떤 방식으로 풀어나갈 것인가,
DK연맹처럼 ‘나만 좋으면 돼, 나만 아니면 돼’를 외치며 힘으로 억누르고 독점할 것인가,
아니면 바츠해방군처럼 ‘바츠해방’을 외치며 자유롭고 열린 공간을 추구할 것인가에 있었다.
물론 이를 선과 악으로 정의하고 선을 지향할 수도, 즉 모두가 양보하고 도와주며 게임을 할 수도 있다.
그것이 일반유저들의 바람이고 이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사냥터를 독점할 수 있는 힘을 가졌을 때,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은, 글쎄...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게다가 선이라는 이름을 마빡에 달고 원하든 원치 안든 절대적인 선을 지키기 위해 양보하며 살아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잠시 고대그리스의 ‘기게스의 반지’라는 우화를 살펴보자.
이야기는 간단하다. 어느 왕국에 기게스라는 양치기가 있었는데,
그가 어느 날 들판에서 반지를 주워 살펴보니
이 반지를 끼면 마치 샤우론의 절대반지처럼 투명인간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곧바로 왕궁으로 들어가 왕을 살해하고 왕비와 결혼해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리스인들은 이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답은 ‘당연하다’이다.
그들에게 선이란 단순무식하게 요약해 ‘악을 행할 힘이 없기에 행하는 것’이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기에 타인이 바라는 대로 사는 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선이었다.
‘기게스의 반지’는 ‘국가론’에서 글라우콘이 스승 소크라테스에게 질문하면서 나오는 이야기로,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 이것이 ‘좋은 짓이다.’ 혹 ‘나쁜 짓이다.’라고 딱 잘라 말하지 않는다.
선이란 행동만으로 따질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기게스가 죽인 왕이 독재자였다면, 수많은 사람을 죽인 학살자였다면 그의 행동을 나무랄 수 있을까?
히틀러를 암살하려던 사람들 중에는 디트리히 본회퍼라는 목사도 있었다.
미친 사람이 운전대를 잡았다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 미친 사람을 운전대에서 끌어내려야 한다고,
다시 말해 살인마를 잡기 위해 살인마저 불사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예가 너무 극단적이라면,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우리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선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절대악이다.
하지만 현실세계는 군대,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살인을 허용한다.
이상적으론 죽이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서, 현실적으론 서로 죽이기 위해 착실히 준비하고, 때가 되면 과감히 결행하는 것이 현실이다.
전쟁이 터진다면, 과연 살인을 하는 것이 옳을까? 가만히 앉아 죽음을 기다리는 게 옳을까?
선의 개념에 비춰볼 때, 이건 아닌데라고 웅얼거리면서 우리는 군대에 간다.
어찌해야 할까? 그래도 선의 굴레에 얽매여 선만 주장하는 것이 정답일까?
선을 지향하는 것 자체를 나무랄 생각은 없다. 선을 행한다면 얼마나 좋은가?
문제는 방법이다. 자신의 선을 어떻게 현실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야 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를 위한 방법은 무수히 많고, 다양하다. 무엇이 더 옳다 그르다 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택할 수도 있고, 꼼수를 부려 병역을 회피 할 수도 있다.
제대 후 세계평화운동을 벌이거나 대안으로 모병제를 제시할 수도 있다.
어떤 것이 옳을까? 우리는 아직 정답을 모른다.
결국 선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추구하고 현실화 시켜야 하는 그 무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선이다. 혹 저것이 선이다 주장하고 결정해 버리면... 선은 ‘선’이라는 이름만 남긴 채 소멸되고 만다.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칸트의 정언명법 같은 절대선을 제시하기보다 행위의 ‘목적’을 따졌다.
항해를 위해서는 선장이 있어야 하고,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의사가 있어야 한다.
선원이 선장 대신 자기 맘대로 배를 항해하면 배가 좌초하고, 환자가 의사 대신 병을 고치면 자기 몸을 잃게 된다.
그가 볼 때, 선이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목적에 부합하는 것,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물론 행위의 목적, 존재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 뚜렷한 답이 없던 플라톤으로서는 이데아를 제시하는 것으로 문제를 풀어나가지만, 그래서 이 또한 사상누각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겉으로 보기엔 더 명확해 보이는 절대선보다) 선과 악의 경계가 명확해 보인다.
선과 악은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눈앞에 케익이 있다면 이것을 먹는 것이 나를 위한 선일 것이다.
하지만 케익 뒤에 형이나 누나가 있다면, 혹 거지가 있다면 케익을 양보하는 것이 선이 될 것이다.
양보하지 않으면 머리통에 꿀밤을 맞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선이란 어떤 행동을 했느냐의 문제를 넘어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의 이데올로기에만 얽매이면 문제의 본질을 놓치게 된다.
바츠해방군은 선만 마빡에 붙였을 뿐, 선의 목적이 무엇인지,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왜 사냥터를 독점했어, 왜 성을 독차지했어, 왜 세금을 내리지 않아, 왜 먹튀 해, 왜 양보 안 해 등등...
지엽적인 선만 따지다 보다 당장 눈앞의 적을 놓쳐버렸고, 결국 그들에게 역전패 당하고 말았다.
바츠해방전쟁의 시작부터 끝까지, 전쟁의 주역이었던 혈맹들은 서로 양측을 오가며 배신과 배반을 일삼았고,
그 이유는 결국 누가 어떤 사냥터를 소유하느냐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세계에 누가 선할 수 있고, 계속해서 선을 유지할 수 있을까?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세계... 그것이 기본 룰인 세계에서 아키러스는 자신을 악으로 정의함으로써
악은 악이 아닌 필수적인 행동이 되고, 선은 선이 아닌 가식적 행동이 되고 말았다.
선으로 지목된 바츠해방군으로서는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게 되고,
외부에서는 선으로 지목된 바츠해방군을 겉과 속이 다른 비열한 무리로 보게 된 것이다.
이는 바츠해방군이 불러온 결과이기도 하다.
그들은 선을 외쳤지만, 그 선을 어떻게 현실화시킬 것인지에 대해서는 준비하지 못했다.
SNL에 배기성이 나와 이들을 패러디하면서 했던 말처럼, 승리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승리한 후를 준비하는 게,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그들은 선의 이데올로기에 얽매여 자신들의 세계가 약육강식의 세계라는 점을 간과했다.
내가 선이라는 간판만 가지고 있으면, 선의 헤게모니만 쥐고 있으면 승리하리라는 계산만 있었다.
그 세계에서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채, 선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기에,
자신들의 욕심을 정당화하기에 급급했다.
그리고 그건 지금 우리의 현실도 마찬가지다.
분명 우리 앞에는 새누리당으로 대표되는 거악들이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김대중, 노무현 이후 소위 진보진영에는 이들과 싸울만한 인물도 세력도 없다.
서로 희생하라고만 할 뿐, 자신을 희생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걸 하려고 하니까 그런 거다.
선이 악이다. 또는 악이 선하다는 식의 궤변을 늘어놓자는 게 아니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쓰잘데기 없이 선이라는 이상을 물고 늘어지지 말라는 거다.
민주당은 선인가? 광주는 선인가? 진보는 선인가?
아니 모두 진흙탕을 살아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이 조금은 나아지기를 바라는...
누군가에게 무엇인가 당한 자로서, 억울한 자로서, 구원을 바라는 세력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들이 수구꼴통보다 나으면 얼마나 더 낫다는 건가? 힘이 없다는 건 자랑이 아니다.
어차피 자신의 욕구와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고 집단이지 않은가?
우리는 선을 바라고 외치지만, 한 없이 선할 수는 없다.
그런데 왜 굳이 선과 악의 프레임에 갇혀 선의 코스프레를 하다 침몰하려 하는가?
물론 누군가가 선과 악의 프레임을 씌우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인터넷에서 접할 수 있는 바츠해방전쟁은 대부분 1차 뿐이다.
4년 넘게 전쟁이 이어졌다면서 다루는 것은 1차 전쟁, 1년 반 정도의 역사뿐이고,
그다음은 아키러스가 독재하다 스스로 물러났데요. 아키러스 열라 짱~. 그래 악이면 뭐 어때? 이 정도다.
여기에 양념을 살짝 치면, 바츠해방군의 잔당들은 자신들이 졌다는 걸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저항하다 사라졌어요. 열라 불쌍~ 정도다.
마치 ‘자 선이라는 거 별거 아냐. 선하지도 않은 것들이 선한 척 하다 다 망했어.
현실에서 선은 언제나 패할 뿐이야. 선? 그래 멋있지. 그런데 선은 영원히 악을 이길 수 없어. 그러니 가만히 있어.’ 딱 그런 생각만 들게 한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이후 일어난 2차 전쟁에 대해서는 다들 침묵한다.
지지리 재미없고, 복잡하고,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니편 내편, 선과 악을 가릴 수 없는 난장판이었기 때문이겠지만,
바츠서버가 해방된 것은 이 2차 전쟁 덕분이었다.
선과 악의 프레임을 벗어나 단 하나의 목표, DK로부터 서버를 해방시킨다는 목표를 향해 달렸을 때,
서로가 답을 찾기 위해 대화하고 타협했을 때, 지난한 협상을 감수하고 싫어도 도우면서 목표를 향해 달렸을 때,
자유를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선에 얽매이지 말자.
선에 얽매이다보면 이런 생각이 들게 된다.
선을 추구해야 하는데, 정의를 추구해야 하는데, 세상은 왜 이 모양 이 꼬라지지?
어차피 이런 세상이라면 당당하게 악으로 사는 게 낫지 않아?
아무리 내가 선하게 살아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관두자.
하지만 선과 악이란 그리 쉽게 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관점과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상대적 가치에 불과하다.
그런 선을 가지고 혁명을 일으킨다면 일시적인 아드레날린 정도는 되겠지만, 이름뿐인 선이 승리를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선이란 사상누각, 그림의 떡, 불판위의 얼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선을 외치기보다, 왜 선을 외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가 믿고 있는 절대선이라는 개념을 버려야 한다.
착하고 싶다고? 선하고 싶다고?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절대선, 고정된 관념의 선을 벗어던져야 한다.
상황과 맥락부터, 자신의 입장부터 살펴보고, 선을 따져야 한다.
선이란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그 공간, 그 시간, 그 순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실 혁명이란 승리가 보장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다. 할 수밖에 없기에 하는 것이다.
혁명해서 승리할 것인가 실패할 것인가를 따지면서 하는 혁명은 혁명이 아니다.
물론 혁명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단지 세상을 변화시킬 기회를 제공할 뿐이다.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기회, 그것이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르는 기회일 뿐인 것이다.
그러니 혁명에 얽매이지 말자. 지금 당장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고 실망하지 말자.
스스로부터 변화하자. 패배주의에서 벗어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