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urisociety.kr/sub.php?board=D1&id=440
패망으로 기울어가는 일본 제국주의
1929년 발생한 대공황 이후 경제위기에 빠진 일본은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일본은 1931년 9월 18일, 만철폭파사건 조작1)으로 만주사변을 일으켜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웠다. 일본은 이후 1937년 7월 7일, 노구교사건2)을 빌미로 중국을 침략하는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은 중일전쟁에서 어려움에 봉착했다. 전쟁 초기 일본군에 밀리던 중국은 제 2차 국공합작을 통해 지구전과 유격전을 벌려 일본군의 진출을 저지했다. 조선인들도 일본을 반대하는 무장투쟁에 앞장섰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계열의 조선인 항일무장독립운동세력들은 중국공산당과 동북항일연군을 결성해 만주에서 일본군과 적극적으로 교전하여 일본 대륙침략의 배후를 교란하였다. 일부 조선 청년들은 중국공산당의 팔로군에 들어가 화북지역에서 활동했다. 1940년 9월에는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도 광복군을 조직하는 등 조선과 중국민중들의 항전으로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 의도는 점점 파탄나고 있었다.
여기에 일본의 중국침략을 견제하려던 미국까지 경제제재로 일본을 압박했다. 1941년, 미국은 영국, 네덜란드, 중국의 국민당과 손잡고 일본에게 필요한 석유, 고무, 철광석, 식량 등에 대해 수출을 금지하였다. 당시 일본은 연료 및 원료를 미국에 상당수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경제봉쇄는 일본 경제에 큰 타격이 되었다.
궁지에 몰린 일본은 전쟁이라는 충격적 방식으로 동남아시아를 병합하여 자원을 확보하기로 결정하였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벌어졌다. 일본은 진주만 공습과 더불어 동남아시아의 영국과 프랑스 식민지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동남아시아와 태평양까지 전선이 확대되자 전쟁물자 조달에 어려움이 가중되었고 1943년을 전후하여 점차 패퇴하기 시작했다.
전후 세계 질서에 대한 미국의 구상
미국은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지 2주 만에 미국 외교협회를 통해 “전쟁과 평화 기획”을 만들어 전후 미국 중심의 새로운 국제질서에 대한 전략과 청사진을 마련했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1941년 이후에는 국무부 내에 “전후 대외정책에 관한 자문위원회”를 구성했고, 이 두 기구를 중심으로 미국의 대외정책을 구상하고 정부에 입안했다.3)
1940년과 1941년 전반기에 미국 외교협회가 “전쟁과 평화 기획”에서 밝힌 미국 중심의 새로운 질서는 미국의 영향력을 전 세계로 확장시키고, 미국의 지배하에 통합된 세계경제 체제를 건설하며, 새로운 국제기구와 제도로 유지되는 전혀 새로운 체계였다.
이런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위협할 수 있는 요인이 바로 소련을 대표로 점차 확산되고 있던 사회주의였다. 미국은 소련를 자신이 수립하고자 했던 세계체제에 근본적인 적대국가로 인식했다. 소련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이탈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들이 대공황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은데 반해 1928년부터 5개년 계획을 추진하여 1932년에는 세계 제 2위의 공업국으로 부상하여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었다. 미국은 독일과 일본과의 전쟁 때문에 소련과 협조관계를 가졌지만 전쟁이 끝나가면서 사회주의의 확산을 저지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특히 전쟁특수로 공황을 극복했던 미국이 호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비대해진 군수산업을 유지해야 했는데, 미국은 전쟁 이후 소련을 잠재적인 적국으로 상정하여 군수산업을 유지하려 했다.
미국의 ‘신탁통치’ 방안은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탁통치를 실시하여 공동 군정을 실시할 때 여러 자본주의 국가들이 소련을 견제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동시에 식민지 독립운동 세력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제국주의가 점령한 식민지에는 독립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많은 국가에서 독립운동은 식민통치를 반대하는 것과 더불어 자본주의까지 반대하는 사회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따라서 식민지의 독립운동을 놔둘 경우 사회주의 성향의 친 소련정부가 세워질 가능성이 높았다. 이런 상황은 미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세계체제에 해를 끼치는 것으로 미국은 이를 막아야 했고, 신탁통치로 식민지 독립운동세력을 제어하려 했다.
미국은 원래 신탁통치를 모든 식민지에 확대시키려 했다. 식민지를 독립시켜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지배독점을 깨고 미국의 자본을 자유롭게 진출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미국이 국제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국제연합(UN)을 만들 구상이 진행되고, 미국이 달러경제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기구인 국제통화기금(IMF), 국제개발은행(IBRD)을 만들어 미국중심의 자본주의 체제가 구축되어 가면서 연합국이 장악한 식민지까지 독립시킬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신탁통치는 독일, 일본 등 패전국이 보유하고 있던 11개 식민지 지역에 일부 실시되었고 승전국인 연합국의 식민지 지역이었던 아프리카와 인도차이나 반도 대부분의 지역은 전쟁 이후에도 한동안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반도에 신탁통치를 구상했던 미국
미국은 일본이 차지하고 있던 만주와 대만은 중국에 돌려주고, 일본은 자신이 점령하여 소련을 견제하려 했다. 그리고 일본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한반도를 일본에게서 분리하여 연합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통해 소련의 한반도 진출을 견제하고 한반도에 친미국가를 세울 구상을 했다.
미국은 한반도의 안보적 요소를 우선적으로 고려했다.4) 한반도는 중국으로 진출하는 교두보의 역할을 하고 있었고, 만주와 함께 소련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중요한 위치였다. 그리고 미국은 한국이 즉시 독립을 할 경우 민족주의자들에 의한 자원과 산업의 국유화 위험이 있고, 미국의 개입력 약화가 예상되므로 신탁통치를 실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결론을 내렸다.5) 미국의 신탁통치 구상은 안보적인 측면과 경제적인 측면을 모두 고려한 방안이었던 것이다.
미국은 한국이 자치능력이 없다고 규정하며 신탁통치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6) 그러나 이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식민지 민족해방 운동이 민족주의 국가 건설로 이어지게 될 경우 미국의 이익을 침해할 것을 우려하여 만들어낸 핑계에 불과했다.7) 미국이 말하는 자치능력이 있는 국가는 자신이 50년 동안 식민통치를 하여 친미국가가 된 필리핀 같은 나라를 말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신탁통치 구상 실행 - 카이로회담
미국은 1942년에서 1943년 중반에 이르는 기간 중에 한국의 전후처리에 관한 원칙과 세부적 문제점에 대한 검토를 일단락 지었다.8) 미국은 한국의 전후처리 안에 대해 카이로회담을 거쳐 다른 참가국의 동의를 얻으려고 하였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카이로회담을 위한 준비모임에서 “신탁통치안의 가능성을 매우 강조하고 이를 모든 종류의 상황에 폭넓게 적용해야한다. 안보의 관점에서 세계의 많은 부분을 국제신탁하에 두어야 한다.”고 하여 신탁통치를 식민지 종속 지역에 추진할 뜻을 내비쳤다.
카이로회담은 1943년 9월 이탈리아가 항복한 이후 전세가 유리해진 연합국이 2차 세계대전의 수행과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인 회담이다. 한국의 신탁통치문제는 카이로회담에서 일본을 처리하는 문제를 논의하면서 함께 논의되었는데, 미국은 카이로 회담을 이용하여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 실시를 합의하여 했다.
카이로 선언의 초안을 작성한 사람은 미국의 홉킨스로 루즈벨트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이었다. 홉킨스는 초안에서 한국의 독립을 “가능한 가장 빠른 순간에”(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 한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이를 “적절한 순간에”(at the proper moment)라고 수정했다. 영국과 중국에 열람된 후 이 “적절한 순간에”라는 문구는 선언문을 최종 수정하는 과정에서 “적절한 과정을 거쳐”(in due course)라고 확정되었다.
루즈벨트가 언급한 “적절한 순간”은 신탁통치가 끝나고 자치를 할 수 있는 능력이 된 순간을 의미하는 것이고 최종 확정된 “적절한 과정”은 바로 신탁통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의도는 조선에 ‘신탁통치’를 실시하겠다는 것이었고, 미국의 구상대로 연합국은 카이로 회담에서 조선을 ‘적절한 과정’을 거쳐 독립시키기로 하여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에 사실상 합의했다.
▲ 카이로회담
신탁통치를 위한 한반도점령 구상
미국이 주장한 ‘신탁통치 실행’ 과정은 ‘점령과 군정 → 신탁통치 → 독립’의 3단계로 구성되어 있었다. 미국은 1944년 2월 8일, “한국의 해방-점령”을 작성하여 한국을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한국의 해방-점령”보고서가 미국 국무부 영토연구국의 최초보고서일 정도로 미국은 한국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어 3월 25일과 27일에는 국간지역위원회에서 ‘민간구제’와 ‘일본인 전문관료의 처리’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등 미국은 이미 1944년 초부터 한국 점령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9)
처음에 미국의 국무부는 한국에 대해 어느 한 국가가 단독으로 점령하여 군정을 하는 것 보다는 연합국이 공동점령-중앙집권적 공동 군정을 실시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만약 한국을 특정나라의 세력에 두게 된다면 지리적으로 가까운 소련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고 인식했기 때문에 여러 나라가 군정에 참여하는 형식으로 소련의 독점 가능성을 제어하려 한 것이었다. 또한 미국의 대외관계위원회는 소련의 한반도 독점을 방지하기 위해 연합국의 공동점령과 유엔에 의해 10~15년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을 주장하고 최초 신탁통치의 기본연한에 대해 토론하기도 했다.10)
반면 미국의 군부는 국무부와는 달리 다국적 지배양식에 반대하면서 한반도를 단독 점령할 것을 주장했다. 1944년 4월 11일자 해군부의 보고서는 “한국은 독립될 때까지 미국에 의해 통치되어야 한다”고 했다. 1945년 초 전쟁장관 스팀슨과 해군장관 포레스탈 등은 “신탁통치 같은 막연한 계획보다 실제적 점령을 포함한 ‘태평양의 방위체계’를 구축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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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조선을 일본에게 넘겨준 미국은 신탁통치를 앞세워 1943년 카이로 회담을 통해 조선에 다시 개입하기 시작했다. 1905년에는 미국의 군사력이 동아시아 전체를 장악하기에는 약했기 때문에 일본에게 일시적으로 양보했지만, 1940년대 세계 최대의 국가가 된 미국은 이제 직접 조선에 들어오려 했다.
중국을 비롯한 해외에서 그리고 국내에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민족해방을 위해 싸웠지만 미국에게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미국은 자신들의 세계패권을 위해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사회주의 세력을 견제하려 했다. 미국에게 한반도는 사회주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신탁통치를 해서라도 차지해야할 중요한 요충지였다.
주석
1) 일명 류타오거우(柳條溝事件, 류조구사건) 사건이라 알려진 사건이다. 일본이 전 만주를 점거할 의도로 지금의 심양외곽 류조구에서 스스로 만주철도 선로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의 소행이라고 트집을 잡아 만주에 침략한 군사행동의 빌미로 삼았다.
2) 노구교는 북경의 서남쪽 15km에 있는 다리이다. 일본군이 이 부근에서 야간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몇 발의 총성이 난 후 일본군 사병 1명이 행방불명되었다. 사병은 용변중이어서 20분 만에 복귀하였으나 일본은 중국군이 사격을 했다고 주장하며 이를 구실로 군대를 출동시켜 중국군을 공격하였다. 중국 측의 양보로 협정을 맺었으나 일본은 군대를 증파하였고, 결국 7월 28일 베이징에 대한 총 공격을 개시한다.
3) 정용욱, 『해방 전후 미국의 대한정책』,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20p, 29p
4) 정용욱, 위의 책 26p
5) 정용욱, 위의 책 27p
6) 『포춘』(Fortune)에 실린 [태평양관계]라는 기사에는 한국의 독립운동단체가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고 분열되어 있으며 정통성도 없다는 내용이 기재되었다. 또한 한국인들이 자치능력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용욱, 위의 책 42p
7)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보면 한국인의 정치적 미성숙, 자치능력의 부재를 가정할 그 어떤 근거도 없었다. 안소영, 앞의 글, 184p
8) 미국은 1943년 4월과 5월 사이에 영토 및 국경문제(T-316), 경제문제(T-317), 국내정치구조(T-318), 독립문제(T-319) 등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안소영, 앞의 글, 186p~189p
9) 이완범, 『삼팔선 획정의 진실』, 지식산업사 2001년, 47~48p
10) 이완범, 위의 책, 50~53p
11) 정용욱, 앞의 책, 58~5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