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마 센스가 있는 내 친구 이야기다.
내 친구들을 굳이 사농공상으로 분류하자면 대부분이 '상'급에 속한다.
그래서 상스러운 녀석들이 많은데 유일하게 이 친구만이 선비의 관상이었다.
눈이 맑고 밝은 빛이 나며 눈썹이 초승달 모양에 미간이 지저분하지 않으며
인중이 오목하고 인당이 넓어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꼴을 가지고 있었다.
과장 좀 보태서 대충 둥그런 얼굴을 그려놓고 눈코입 대신 '정의'라는
글자를 새겨놓으면 얼추 비슷할 정도였다.
행동도 그 얼굴에 걸맞게 얼마나 정직했냐면 그를 신뢰한 선생이 자습시간에
떠든 사람을 적으라고 시켜놓으면 본인의 이름도 당당히 기재할 정도였다.
그 명단을 보고 흠칫 놀란 선생이 그 친구를 유독 더 흠씬 두들겨 패는 이유는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도 누락되어 있었다.
어떤 일이든 불의를 못 참던 내 친구는 길거리 시정잡배와의 몇 번의 실랑이를
통해 귀중한 경험을 얻고 결국은 가끔 불의도 참는 모습으로 변모되었지만
유격훈련 때 힘드냐는 조교의 질문에 힘들다고 몇 번을 되물어도 그렇다고 우렁차게
대답하는 우직함은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하였다.
이러한 진실성 때문이었을까, 그 친구는 우리 중 최초로 연애를 하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우리와는 멀어지게 되었다.
시답지 않는 커플이라는 눈꺼풀에 우정 이라는 진정한 가치가 가려진 배신자 녀석
따위에게 우리의 시간을 할애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곧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은 바쁜 사람들이나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우리는
탐탁지는 않았지만 계속 바쁘다는 녀석을 삼고초려하여 오래간만에 뭉치게 되었다.
늘 그랬듯이 당구장에서 고량주와 탕수육을 시켜놓고 부먹 찍먹으로 논쟁한
우리는 역시 2:2 당구가 제맛이라며 배신자에게 관용을 베푼 우리의 넓은 배포를
자화자찬했다.
4:4 아니 결국 4:3으로 맞짱을 떴던 과거를 즐겁게 얘기하며 녀석의
최근 근황을 이야기하던 중 녀석의 전화가 울렸다.
본의 아니게 통화 내용을 들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는 놀랍게도
당구장이 아닌 실험실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왜 딱딱 거리는 소리가 들리느냐는 추궁에 관성의 법칙 실험을 위해 진자운동을
관찰 중이라며 수구와 적구의 회전력에 따른 변화인 마세이 법칙을 증명하고
있다며 위기를 가까스로 벗어나는 중이었다.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친구의 거짓말, 더군다나 그 능숙함에 우리는
모두 충격에 휩싸여있었다.
검은 소 흰 소에게 누가 일 잘하느냐며 질문할 것 같았던 정승 같은 녀석이
갑자기 검은 소로 변해서는 흰 소가 더 잘하니까 쟬 더 굴리십시오 하는 느낌이랄까.
그 검은 소는 불량배보다도 강력한 무언가에 비인도적인 탄압과 핍박을 받으며
역경과 고난의 밭을 갈고 있음이 분명했다.
전화를 끊고 우리의 반응을 본 친구는 씁쓸한 표정으로 술 한 잔을 원샷 하더니
담담히 그간의 일을 우리에게 말해주었다.
자신의 거짓 없는 모습에 반한 여자친구의 기대에 부응하기로 마음먹은 친구는
매사에 한 치의 거짓 없이 솔직하게 그녀를 대했다.
이를테면 머리를 새로 했는데 어떠냐는 질문에 무슨 용기로 그런 결단을 내린것인지
미용실에 소송을 넣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었으며
놀이동산을 다녀와서 어떠냐는 질문에 중력가속도로 떨어지는 놀이기구를 보며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떠오르는 것은 흥미로웠지만 내 기분도 자이로 드롭했다며
굳이 다시 올 필요는 없다는 등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대답했다는
것이었다.
모쏠인 내 친구들은 손바닥으로 눈을 가려도 하늘이 가려지지 않는다며
올곧은 친구의 기개를 크게 칭찬했다.
결정적으로 친구는 그녀에게 최근에 살이 좀 찐 거 같으냐는 질문을 받고야
말았다는 것이다.
다들 침을 꿀꺽 삼키며 어떻게 대답했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정밀한 계량은 안 해보았지만, 눈에 띄게 부피가 증가한 것으로 보이며
밀도를 추정해보건대 그동안의 괴랄한 섭취량에 대비하여 운동량이 현저히
떨어져서 질량보존의 법칙에 입각하여 굉장한 체중 증가가 진행된 것으로
간주된다고 했단다.
당최 어떻게 연인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가만히 그의 얼굴을 보니 기분 탓일까 얼굴형이 조금은 틀어져 있었다.
거대한 덤프트럭에 치인듯한 강한 물리적 충격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얼굴
형태가 바뀔 리가 없어서 최근에 교통사고를 당했냐고 물었다.
내 친구의 눈은 덫에 걸린 사슴새끼마냥 슬퍼보였다.
그와중에 또다시 재촉하는듯한 친구의 전화벨이 울렸다.
쩔쩔매며 전화를 받는 꼴을 보니 그 어머어마했던 선비의 관상은 온데간데 없고
추노꾼에게 족쇄가 채워진 왠 노비의 관상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