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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서해에 관한 두번째 글 혹은 반론입니다.
게시물ID : history_1046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etraisol
추천 : 5/5
조회수 : 39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7/05 16:51:01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istory&no=9937&s_no=9937&kind=search&search_table_name=history&page=1&keyfield=subject&keyword=%BA%CE%BF%A9

재야사학 : 부여(夫餘)의 위치.. 에 관해 쓰신 글인데, 서해에 관해 쓴다는 글이 여기서 벗어날리는 없어보이니 그냥 이것을 토대로 작성해보지요,

今陝西甘州衛西有張掖河, ;古羌穀水.. 出羌中, 北流至衛西;張掖河, 合弱水, 東北入居延海, 俗謂之黑河.. 
據後漢書東夷傳 : 夫餘國北有弱水.. 晉書四夷傳 : ;婁國東濱大海, 北極弱水.. 
唐書北狄傳 : 貞觀三年以奚國阿會部;弱水州.. 則似弱水自居延澤東北流, 曆夫餘 · ;婁之北境, 而歸於東海..

사실상 서해 논쟁에 있어 핵심은 이 문구일텐데 두번째와 세번째 단락은 이의가 있을리가 없습니다. 부여국 북쪽에는 약수가 흐르고 읍루와 부여 북쪽의 경계를 흘러 동해로 가는게 약수다 이니 말입니다, 문제는 첫번째 단락 장액하(흑하)는 감주(지금의 감숙성)서쪽, 강중에서 발원하며 이것이 약수와 합류해 거연해로 간다 일텐데

우선적으로 지형을 보자면 가운데 천해天海를 기점으로 아래의 전해前海 서쪽의 서해 동쪽의 동해를 두고 있습니다,

즉 서해와 동해라는 것은 가운데 천해를 기준으로 정한 명칭이지 어떠한 국가의 국경이나 위치에 따른 것이 아님을 알수 있습니다.

1302917343253_1.gif

사실 이 해 라는 글자는 굉장히 많이 쓰입니다, 서안 옆에도 청해라는 호수가 있는 것 처럼 큰 강이나 호수에 쓰이는데, 이것을 바다로 보아야 하는가는 너무 성급한 결정이라고 볼수 밖에 없습니다.

고고학적 접근은 무조건 버리고 사료적인 접근만을 행하는 현재 상황에서도 이러한 접근방식을 통한 비정을 해본다면 여러 오류에 봉착할수 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상기 링크된 글에서 현조님이 인용하신 후한서 동이열전의 다른 부분인 부여편을 보면 

夫餘國, 在玄菟北千里. 南與高句驪, 東與挹婁, 西與鮮卑接, 北有弱水. 地方二千里, 本濊地也. 

부여국은 현도 북쪽 천리에 있다. 남쪽으로 고구려, 동쪽으로 읍루, 서쪽으로 선비(鮮卑)와 접하고 북쪽에 약수가 있다. 사방 2천리이고 본래 예(濊)의 땅이다.

라고 합니다, 분명 약수가 북쪽에 있는 것은 맞으나 예(濊)가 나오는게 문제입니다, 같은 사료에 이르기를

濊北與高句驪、沃沮, 南與辰韓接, 東窮大海, 西至樂浪. 濊及沃沮、句驪, 本皆朝鮮之地也

'예(濊)는 북쪽으로 고구려, 옥저, 남쪽으로 진한(辰韓)과 접한다. 동쪽으로 큰 바다에 막히고 서쪽으로 낙랑에 이른다. 예와 옥저, 구려는 모두 본래 조선의 땅이다.'

뭔가 이상하니 일전에 현조님이 가져오신 옥저편을 가져와 보겠습니다.

東沃沮在高句驪蓋馬大山之東[一], 東濱大海;北與挹婁、夫餘, 南與濊貊接. 其地東西夾, 南北長[二], 可折方千里. 土肥美, 背山向海, 宜五穀, 善田種, 有邑落長帥. 人性質直彊勇, 便持矛步戰. 言語、食飲、居處、衣服有似句驪. 其葬, 作大木槨, 長十餘丈, 開一頭爲戶, 新死者先假埋之, 令皮肉盡, 乃取骨置槨中. 家人皆共一槨, 刻木如(主)[生], 隨死者爲數焉. [一]蓋馬, 縣名, 屬玄菟郡. 其山在今平壤城西. 平壤即王險城也. [二]夾音狹.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 동쪽에 있고 (1) 동쪽으로 바다에 닿는다. 북쪽으로 읍루, 부여, 남쪽으로 예맥(濊貊)과 접한다. 그 땅은 동서간으로는 좁고 (2) 남북간으로는 길어 가히 천리이다.

토지는 비옥하고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어 오곡에 적합하고 밭작물도 잘된다. 읍락에는 장수(長帥)가 있다. 인성은 소박, 정직하고 굳세고 용맹하며(質直彊勇) 모(持)를 사용하는 보전(步戰)에 익숙하다. 언어, 음식, 거처, 의복은 구려(句驪)와 유사하다. 

장례를 치를 때는 길이 10여 장의 큰 목곽(木槨)을 만드는데 한쪽 머리를 열어두어 문으로 삼는다. 새로 죽은 자가 있으면 먼저 가매장했다가 가죽과 육신이 썪으면 뼈를 취해 곽 안에 둔다. 가인(家人)들이 모두 곽 하나에 함께 들어가고, 살아있을 때 형상으로 나무를 깎아 죽은 이의 숫자에 맞춘다.

(1)개마(蓋馬)는 현(縣) 이름이고 현도군에 속한다. 그 산은 지금의 평양성(平壤城) 서쪽에 있다. 평양은 즉 왕험성(王險城)이다. 

(2)‘夾’의 발음은 ‘狹’


예나라가 중국 일통이라도 했던걸까요? 아니 분명 사료에는 부여는 동옥저의 북쪽이라 되어있는데 비정하신 부여의 위치는 서쪽이군요,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같은 사료의 고구려를 보지요,

高句驪, 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地方二千里, 多大山深谷, 人隨而爲居. 少田業, 力作不足以自資, 故其俗節於飲食, 而好修宮室. 東夷相傳以爲夫餘別種, 故言語法則多同, 而跪拜曳一脚, 行步皆走. 凡有五族, 有消奴部, 絶奴部, 順奴部, 灌奴部, 桂婁部[一]. 本消奴部爲王, 稍微弱, 後桂婁部代之. 其置官, 有相加,對盧,沛者,古鄒大加,[二]主簿,優台,使者,帛衣,先人. 武帝滅朝鮮, 以高句驪爲縣[三], 使屬玄菟, 賜鼓吹伎人. 

[一]案今高驪五部:一曰內部, 一名黃部, 即桂婁部也;二曰北部, 一名後部, 即絕奴部也;三曰東部, 一名左部, 即順奴部也;四曰南部, 一名前部, 即灌奴部也;五曰西部, 一名右部, 即消奴部也. [二]古鄒大加, 高驪掌(賀)[賓]客之官, 如鴻臚也. [三]前書元封中, 定朝鮮爲眞番、臨屯、樂浪、玄菟四(部)[郡] 

고구려는 요동 동쪽 천리에 있다. 남쪽으로 조선, 예맥, 동쪽으로 옥저, 북쪽으로 부여와 접한다. 그 땅은 사방 2천리에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사람들은 여기를 따라 거주한다. 논밭이 적어 부지런히 경작해도 자급하기에 부족하다. 이 때문에 음식을 절약하는 풍속이 있지만 궁실(宮室)을 꾸미는 것을 좋아한다. 동이가 서로 전하기로는 부여별종(夫餘別種)이라고 한다. 그래서 언어와 법칙이 대부분 같고 궤배(跪拜-무릎꿇고 엎드려 절함)할 때 다리 하나를 끌고, 행보(行步)할 때 모두 뛰어다닌다. 

모두 다섯 부족으로, 소노부(消奴部)[삼국지]-연노부(涓奴部)로 표기,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가 있다. (1) 본래 소노부에서 왕이 나왔으나 점차 미약해져 그 뒤에는 계루부가 이를 대신했다. 그 관직으로는 상가(相加), 대로(對盧), 패자(沛者), 고추대가(古鄒大加), (2) 주부(主簿), 우태(優台), 사자(使者), 조의(帛衣), 선인(先人)이 있다.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를 현(縣)으로 삼아 현도(군)에 속하게 하고 (3) 고취(鼓吹-궁중의식 때 쓰이는 음악 또는 악기), 기인(伎人)을 하사했다. 

(1)지금의 고려 5부로 보면, 첫째, 내부(內部), 일명 황부(黃部)가 계루부이고, 둘째, 북부(北部), 일명 후부(後部)가 절노부이고, 셋째, 동부(東部), 일명 좌부(左部)가 순노부이고, 네째, 남부(南部), 일명 전부(前部)가 관노부이고, 다섯째, 서부(西部), 일명 우부(右部)가 소노부이다. (2)고추대가(古鄒大加)는 고려에서 빈객을 접대하는 관직으로, 홍려(鴻臚-중국의 관직명)와 같다 (3)[전한서]에 의하면 원봉(元封-한무제 때 연호) 중에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 임둔, 낙랑, 현도 4부(군)을 설치했다고 하였다.


중국이 넒은 건 알겠습니다만 요동 동쪽 천리에 걸쳐 고조선과 부여 사이에 접한다니 '리' 라고 하는 도량형이 이때만 다른건 아닐텐데 하는 것은 둘째치고 역시나 불가능한 지형 묘사를 하고 있군요,


혹시 모르니 또 찾아보니 진서 동이전이 있습니다.

<夫餘國>在<玄 >北千餘里, 南接<鮮卑>, 北有<弱水>, 地方二千里, 戶八萬, 有城邑宮室, 地宜五穀. 其人强勇, 會同揖讓之儀有似中國. 其出使, 乃衣錦 , 以金銀飾腰. 其法, 殺人者死, 沒入其家; 盜者一責十二; 男女淫, 婦人妬, 皆殺之. 若有軍事, 殺牛祭天, 以其蹄占吉凶, 蹄解者爲凶, 合者爲吉. 死者以生人殉葬, 有 無棺. 其居喪, 男女皆衣純白, 婦人著布面衣, 去玉佩. 出善馬及貂 ·美珠, 珠大如酸棗. 其國殷富, 自先世以來, 未嘗被破. 其王印文稱[<穢王>之印]. 國中有古<穢城>, 本<穢貊>之城也.

 '부여국'은 '현토' 북방 천여리에 있다. 남쪽은 '선비'에 접하고, 북쪽은 '약수'에 있고, 그 땅은 이천여리이며, 호는 팔만호이다. 성읍과 궁실이 있으며, 땅은 오곡에 마땅하다, 그 사람들이 강하고, 용감하며 모임에서 서로 읍하고, 사양의 예의로 중국과 같음이 있다. 나타날때는 옷은 비단으로 하고, 금은으로 허리띠를 꾸민다. 

그 법은 살인한자는 죽이고, 그 집을 압수한다. 도둑질한 자는 하나로 인해 열두사람을 꾸짓고, 남녀가 음탕하고 부인이 시샘하면 모두 이를 죽인다. 만일 군사를 일으키면, 소를 죽여 하늘에 제사하고, 그 굽을 보아 길흉을 점치는데, 굽이 흩어지면 흉하고, 합해지면 길하다. 죽은자는 산사람을 순장하고, 곽은 있으나 관은 없다.(??) 상을 당하면, 남녀는 모두 순백색의 옷을 입고, 부인은 베를 짜서 얼굴을 가리고, 옥노리개를 땐다. 

좋은 말과, 담비, 아름다운 진주가 나온다. 진주는 크기가 대추만 하다. 나라가 성하고, 부유하니, 스스로 선대부터 내려오니, 아직까지 이르러 깨뜨리지 못하였다. 그 왕의 도장 무늬를 '예왕'의 도장이라 일컷는다. 나라 가운데에 예로부터 '예성'이 있었는데, 본래 '예맥'의 성이었다.


여기서도 예나라의 땅이었다는데 중요한게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진주입니다.

땅이나 강가에서 야생의 진주가 자생할리가 있는지는 글쎄요, 혹시나 발견하신 분들은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肅愼氏 (숙신씨) <肅愼氏>一名< 婁>, 在<不咸山>北, 去<夫餘>可六十日行. 東濱大海, 西接<寇漫汗國>, 北極<弱水>. 其土界廣 數千里, 居深山窮谷, 其路險阻, 車馬不通. 夏則巢居, 冬則穴處. 父子世爲君長. 無文墨, 以言語爲約. 有馬不乘, 但以爲財産而已. 無牛羊, 多畜猪, 食其肉, 衣其皮, 績毛以爲布. 有樹名 常, 若中國有聖帝代立, 則其木生皮可衣. 無井 , 作瓦 , 受四五升以食. 坐則箕踞, 以足挾肉而啖之, 得凍肉, 坐其上令暖. 土無鹽鐵, 燒木作灰, 灌取汁而食之. 俗皆編髮, 以布作 , 徑尺餘, 以蔽前後. 將嫁娶, 男以毛羽揷女頭, 女和則持歸, 然後致禮 之. 婦貞而女淫, 貴壯而賤老, 死者其日卽葬之於野, 交木作小槨, 殺猪積其上, 以爲死者之糧. 性凶悍, 以無憂哀相尙. 父母死, 男子不哭泣, 哭者謂之不壯. 相盜竊, 無多少皆殺之, 故雖野處而不相犯. 有石 , 皮骨之甲, 檀弓三尺五寸, 矢長尺有咫. 其國東北有山出石, 其利入鐵, 將取之, 必先祈神. 

'숙신씨'는 일명 '읍루'이다. '불함산'의 북쪽에 있으며 '부여'에서 가히 육십일을 간다. 동쪽으로 큰 바다에 임하고 서쪽은 '구만한국'에 접하고, 북쪽은 '약수'이다. 그 땅의 경계는 길이가 수천리이다. 깊은 산속과 막힌 골짜기에 거하여 그 길이 험하므로, 수레와 말이 통하지 않는다. 여름은 집에서 거하고 겨울은 동굴에서 거한다. 부자가 대를 이어 군장을 하고 글과 먹이 없어 말로써 약속을 한다. 말이 있으나 타질 않고, 다만 재물로써 인정하여 그친다.

소와 양은 없고, 돼지를 많이 사육하여 그 고기를 먹고 그 가죽을 입으며, 그 털을 꼬아 베를 만든다. 나무중에 '낙상'이란 나무가 있어 만약 중국에서 성제가 서면 그 나무의 껍질로써 가히 옷을 만든다. 우물과 부엌이 없어 기와로 솥같은 것을 만들어 사오되 정도를 받아 먹는다. 앉은때는 걸터 앉아 발로 고기를 끼워서 이를 먹는다. 고기가 얼어 있으면, 그 위에 걸터 앉아 따뜻하게 한다. 

땅에서 소금이 나오질 않아 나무를 태워서 재를 만들고 물을 부어 그 즙을 먹는다. 풍속은 모두 편발이고, 베를 지어 '첨(소매가 짧은 헡옷)'을 짓는다. 길이가 한척정도로 앞뒤만을 가린다. 장차 시집가고 장가들 때 남자는 털과 깃털로써 여자의 머리에 장식하고, 여자는 응하여 곧 보전하여 돌아온다. 그러한 연후에 라야 예로써 장가든다. 부인은 정조를 지키지만, 여자는 음란하고, 귀한 사람은 굳세지만 천한사람은 쇠하였다. 

죽은 자는 그날 바로 들에 장사지내고 나무를 얶어 작은 곽을 만들고 돼지를 죽여 그 위에 쌓는다. 이로써 죽은 자의 양식으로 한다. 성질은 포악하고 사나우며 근심하고 슬퍼하지 않음을 높힌다. 부모가 죽어도 남자는 울지 않고 우는 자는 씩씩하지 아니하다고 이른다. 훔치는 것은 많고 적음이 없이 모두 죽이고 고로 비록 들에 거하더라도 이를 해치지 않는다. 돌화살촉이 있고, 가죽과 뼈로 갑옷을 만들고 단궁이 있어 길이가 삼척 오촌이다. 화살은 긴것과 짧은 것이 있다. 나라의 동북쪽 산에서 돌이 나오니 이 날카로움이 쇠를 뚫는다. 장수는 이를 취할때, 반드시 먼저 신에게 고한다.


역시 진서에 나오는 묘사로 약수의 위치를 언급하기에 가져와 봤습니다만 보시다시피 60일을 가는 거리임에도 약수가 여전히 맞닿아 있으며 동쪽으로 큰 바다가 있고 동쪽으로는 큰 바다를 접하였으며 서쪽은 구만한국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는데 국경선이 수천리에 달하는 거대한 국가라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현조님의 주장을 추종하자면 도저히 추정 가능한 지형 묘사가 아니지요,


이 문제를 떠나 다른 사료를 보자면 전한서 동이 열전을 보겠습니다.

元封三年夏, 尼谿相參乃使人殺朝鮮王右渠來降. 王險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已又反, 復攻吏. 左將 軍使右渠子長[師古曰 右渠之子名長.] 降相路人子最,[師古曰 相路人前已降漢而死於道, 故謂之降 相. 最者, 其子名.]} 告諭其民, 誅成已. 故遂定朝鮮爲眞番臨屯樂浪玄 四郡. 封參爲 淸侯,[師古 曰 音獲.] 陶爲秋詳侯,[晉灼曰 功臣表 秋詳屬渤海. 師古曰 詳音千餘反.] 爲平州侯, 長爲幾 侯. 最以父死頗有功, 爲沮陽侯. 左將軍徵至, 坐爭功相嫉乖計, 棄市. 樓船將軍亦坐兵至列口當待左 將軍,[蘇林曰 列口, 縣名也. 度海先得之.] 擅先縱, 失亡多, 當誅, 贖爲庶人. 

원봉 3년 여름에 니계상 '삼'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와서 항복했다. 그러나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는데 '우거'의 대신 '성기'가 반하여 거듭 관리들을 공격했다. 이리하여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장'과[사고는 우거의 아들 이름이 '장'이다.] 항복한 정승 '로인'의 아들 '최'를[사고는 정승 '로인'은 전에 이미 한나라에 항복하고 길에서 죽었다. 옛날에 정승이 항복했다. '최'는 그 이름이다. ] 시켜 그 백성들을 회유하고 '성기'를 베니 이로써 조선이 평정되어 '진번', '임둔', '낙랑', '현도'의 사군을 두었다. 

'삼'을 봉하여 '획청후'를[사고에 ' (홰)음은 '獲(획)'이다.] 삼고, '한도'는 '추저후'를[진작이 말하길 공신표에 '추저'는 '발해'에 속한다. 사고는 '詳(저)'음은'千餘(천여)'로 바뀌었다.] 삼고, '협'으로 '평주후'를 삼고, '장'으로 '기후'를 삼았다. '최'는 그 아버지가 죽었고, 자못 공로가 있다 하여 '저양후'를 삼았다. 좌장군을 불러 들여, 앉아서 자기들의 공로를 다투다가 서로 미워하노라 계교를 어그러뜨렸다 해서 '기시'의 형에 처했고, 누선장군도 역시 군사가 먼저 '열구'에[소림은 열구는 현의 이름이다. 바다 건너 먼저 닿는 곳이다.] 이르렀으면 마땅히 좌장군을 기다려야 옳은데 멋대로 먼저 쫓다 가 많은 군사를 잃어버리니 마땅히 베일 것이나 용서해서 서인을 만들었다.


중국에서 바다 건너에 조선이 있다고 합니다.

네 가장 먼저 닿는 곳 말입니다, 보통 강이나 호수에는 쓰이지 않는 표현이지요.



이상에서 볼수 있듯이 사료를 통한 지명의 비정이란 비단 글자 한두개로 때울수 있는게 아닙니다, 어쩌다 유사한 문화권의 동일한 지명을 발견했다 할지라도 그것만 봐서는 안된다는 것은 사서를 떠나 관심을 가지신 분이라면 쉽게 생각할수 있는 부분일겁니다.

그게 맞았다 할지라도 나머지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내 역할은 다 했으니 너희가 생각해봐라? 아닙니다, 이건 말 그대로 잘못된 연구고 고찰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지요,

현조님의 추측대로 본다면 진나라는 중원이 아닌 실크로드와 고비사막을 일통한 국가가 될터인데, 고고학적 접근은 차지하더라도 왜 한마디의 단 한줄의 기록도 없을까요?

사료만을 탐구하시는 입장에서 비단 지명 만을 찾아다니신다지만 이상하지 않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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