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보는 신묘년 기사를 비문 전체의 문맥상의 전후관계를 고려함으로써 해석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방법론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광개토왕릉비문에 관한 이러한 시도가 정인보에 의해 처음 행해진 것이죠. 그러면 정인보설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정인보는 비문의 첫부분, 즉 왕의 세계에 해당되는 부분과 맨 끝부분인 수모인 기사를 제외하고 광개토왕의 정복관계기록을 다음과 같이 6단으로 나누었습니다.
1. ‘영락5년~전엽이환’ 1면 7행~8행 : 대 비려작전
2. ‘백잔신라~여사환도’ 1면 8행~2면 4행 : 대 백제작전
3. ‘8년무술~조공논사’ 2면 5행~2면 6행 : 대 백제작전
4. ‘9년기해~참연무수’ 2면 6행~3면 4행 : 대 왜작전
5. ‘17년정미~○○○성’ 3면 4행~3면 6행 : 不知所討者爲何也
6. ‘20년경술~촌1400’ 3면 6행~3면 8행 : 대 동부여작전
위의 구분에 의하면 문제의 신묘년 기사는 2단에 해당됩니다.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세분합니다.
①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백제, 신라는 오랜 속민으로서 고구려에 조공해 왔다)
② 而倭以辛卯年來(왜가 신묘년에 고구려에 내침하였다)
③ 渡海破((이에 고구려가 왜를)바다를 건너가 깨뜨렸다)
④ 百殘○○○羅((‘○○○’의 3결자를 ‘聯侵新’으로 생각하여)백제가 왜와 연합하여 신라에 침입하였다(고 해석))
⑤ 以爲臣民
⑥ 以六年丙申 王 躬率水軍 討利殘國(…이하 백제정벌기록)(백제가 고구려의 신민이라는 이유로 영락6년 병신에 백제를 정벌하였다. ⑤는 백제 정벌의 이유가 됨)
이상의 해석을 연결지어 보면
백제와 신라는 원래 고구려의 속민으로 고구려에 조공하였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고구려에 침입하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왜를 격파하였다. 이때 백제가 왜와 연합하여 신라에 침입하니, 백제는 원래 고구려의 신민이라 영락6년 병신에 광개토왕이 친히 백제를 정벌하였다.
는 해석이 성립됩니다.
이러한 해석은 종래 일본인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죠. 일본인들은 신묘년에 왜가 백제와 신라를 쳐서 그의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인데, 전체 맥락과는 상관없는 뜬금없는 이야기이지만, 위 해석대로 하면 고구려가 왜를 응징해야 할 입장이라는 점을 올바르게 인식한 것이 됩니다.
저 또한 이러한 주장에 상당한 신뢰를 표하는 바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공간이니 만큼 이러한 견해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에 긁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