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 넘으신 조모의 호상을 5일장으로 치루고 하루가 지났습니다. 조문오신 일가 친.외척분들과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던중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던 조모의 오빠이신 분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전에는 할머니의 작은 오빠가 계셨고 6.25 전쟁중에 납북되셔서 남파되어 자수를 고민 하시다가 체포되셔서 돌아가셨고 여러분들이 연좌제에 고통 받으셨다는 이야기 정도 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문상오신 당숙께서 "모윤숙 저격 사건"에 대해 말씀하셔서 자세한 내막을 알게 되었습니다. 1949년 연희대학교등 민주학련 학생 6명이 대표적 친일원흉 모윤숙을 처단하려다가 오발로 언더우드부인이 사망한 사건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일본왕을 칭송하고 목숨바쳐 일본제국에 충성 할것을 종용하고 대동아전쟁을 미화하면서 개인과 자손의 영달을 꿈꾸던 자들을 처단하려는 뜻있는 대학생들이 일으킨 거사였습니다. 오발로 인해 모윤숙을 처단 하지 못하고 언더우드부인이 사망하고 전원 체포되고 좌익으로 몰려 사형이 언도된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교도소에 수감중 전쟁이 발발했고, 북으로 끌려가셔서 생사를 모르다가 남파되어 오셨고 여동생인 조모의 집에서 재워 주셨다더군요. 아무런 활동도 않고 며칠간 조카인 백부와 함께 낚시를 다니시면서 자수를 고민하시던 중, 아이러니칼 하게도 종로경찰서 근처에서 모윤숙 저격사건을 맡았던 친일 형사에게 체포되시고 결국 박정희 군부시절 제대로된 절차없이 사형 당하셨다고 합니다.
역사의 아이러니에 한참 동안 먹먹했습니다. 프랑스는 나찌하의 비시정부에서 나찌에 협력한 사람들을 사형에 처했었지요. 당사국인 독일조차 나찌전범을 찾아내는 노력을 지금도 하고있고...
당시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던 친일신문들은 역시 좌익이니 한미간의 사이를 이간 하기위해 사주를 받은 공산당.. 애초부터 언더우드 부인을 저격할 목적이었다고...어쩌구 저쩌구로 보도했더군요. 긴말하면 뭐하겠습니까...
친일청산은 대한민국 정통 보수를 자초하는 극우파들의 득세로 이미 물건너갔다고 봅니다. 정통보수 성향의 사람들,.물론 있겠죠, 문제는 일제때부터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이승만정권때 부터 반공.친미의 탈을 쓰고 기득권을 유지했고 극우적 성향의 보수파로 보이길 원했죠, 그게 살길이고 자손 대대로 영화를 누리고 사는 유일한 방법임을 그 간악한 자들은 너무도 잘알고 있었기에 해방직후부터 변검수준의 탈바꿈을 한것이었지요.
한마디만 더할까요.. 극우...참 나쁘죠..(공식적으로) 한 나라의 수치이고, 그러나 그나라 입장 에선 "필요악"이죠. 적어도 독일의 네오나찌들은 왜곡된 방법으로 라도 자기국가와 민족을 사랑합니다. 다수의 독일인들이 네오나찌(극우)를 수치스럽게 생각하지만 유사시에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걸고 싸울 무리들이라는건 인정합니다.
우리의 보수탈을 쓴 친일파나 그후손들은 어떨까요? 자신과 후손의 안위와 영달을 위해선 그때 그때 맞는 탈을 바꿔 쓸것 같지 않습니까? 미국의 한 주(州)로 편입되면 어떻고 심지어 그토록 찢어 죽이자고 태워죽이자고 외치던 북한공산집단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면 맨먼저 인공기 흔들고 장군님만세를 외칠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건 지나친 비약일까요?
이나라에 진정한 의미의 보수와 진보가 있습니까? 이분법적으로 갈라놓고 획책하고 희희낙낙할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진정한 보수들은 스스로 친일에서 친미사대로 갈아탄 친일수구세력과 스스로 차별화 해야 할것입니다. 진보세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빨갱이소리 억울하다고만 하지말고..이야기가 샜네요..얘기 길어질까봐 여기까지만...
위 사건이 역사의 격동기에 겪은 한집안의 비극사일 뿐 일까요?
어디 모윤숙 뿐입니까? 친일행위를 하면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해방이후엔 친미 보수로 옷을 갈아입고 부귀와 명예를 누리는 기생충같은 족속들이 말입니다. 친일파 척결에 목숨걸고 의거한 젊은 청년들의 애국혼을 이데올로기와 친일파의 분탕질로 더이상 모욕하지말라. 이화여대와 정부는 수여한 박사학위와 훈장을 자격 박탈 할것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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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친일 인명 사전 모윤숙 편에서 발췌 하였음을 알립니다,
1941년 12월 "매일신보"가 주최한 시국부인대 강연회에 참가, 이 강연에서 총후부인의 가정 결전 체제를 갖출 것을 역설하며 경성부의 여러 강연장을 순회 했다,
같은달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간사로서 부민관 강당에서 열린 전시(戰時)가정부인 총동원을 목표로 한 조선임전보국단 결전 부인 대회에서 "여성도 전사(戰士)다" 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이 연설에서 온갖 향락성과 개인주의 관념에 찬 영.미식 생활을 비판 하는 한편 "우리는 높이 펄럭이는 일장기 밑으로 모입시다",
쌀도. 나무도. 옷도 다 아끼십시요, 나라를 위해서 아끼십시요 그러나 나라를 위해서 우리의 목숨만은 아끼지 맙시다,
아들의 생명 다 바치고 나서 우리 여성마져 나오라거든 생명을 폭탄으로 비꿔 전쟁마당에 쓸모 있게 던집시다,
'대동아' 1942년 5월호)라며 전시의 도덕적인 여성상을 제시하면서 총후봉공(銃後奉公)의 소임을 다 할것을 주장했다,
모윤숙은 각종 집회.자담회에 참석 하였으며, 다음과 같이 역설하기도 했다,
"일하는 부인의 마음가짐.처녀문제. 가정교육 문제등에 대해 의견을 말하고 반도부인의 결전 의식을 재촉" (경성일보 1943년 8월18일)
했다, 같은해 11월 조선총독부 학무국 연성과 내의 조선교화 단체 연합회가 육군 특별지원병 제도를 선전.선동하기 위해 전위
여성격려대를 조직하여 조선 각지에 파견하자. 모윤숙은 함흥. 원산. 북청지역 강사를 맡아 강연회와 자담회를 통해 "일본 여성의 갈길을 주장했다",
1938년 4월부터 육군특별지원병제가 실시되고 3년이 지난 시점에서 쓴 시(詩)에서 "눈은 하늘을 쏘고 그 가슴은 탄환을 물리쳐/ 대동양의 큰 이상 두팔 안에 꽉 품고 달리어 큰 숨 뿜는 정의의 용사/ 그대들은 이땅의 광명입니다/ 대화혼(大和魂) 억쎈 앞날 영겁으로 빛 내일/그대들이 나라의 앞잽이 길손/ 피와 살 아낌없이 내어 바칠/ 반도의 남아 회망의 화관(花冠)입니다,/ 라며 지원병을 찬양했다,
또 1943년5월 해군 지원병제도 실시가 결정되자 5월 27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시(詩)에 "아가야 너는 ㅡ 해군기념을을 맞이하여"에서
아가야! 조개잡기 즐겨 모래성을 쌓고/ 땅에서 서기보다 물에놀기좋/ 아하는 너 미더운 바다가/ 이제 오란다/ 이제 너를 부른다/ 해군모
쓰고 군복 입고 나오란다/ 대동아를 메고 가란 힘찬 사명이/ 넓은 바다 한 가운데서 너를/ 부른다/ 사나운 파도넘어 / 네 원수를 물리쳐라/
너는 아세아의 아들/ 대양의 용사 란다"며 해군 지원병 참여를 독려 했다,
1943년10월 육군 특별 지원병 채용 시행 규칙이 공포되고 같은해 11월20일로 학병모집이 마감되게 되자 11월12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시(詩) "내 어머니 한 말씀에"서 "오냐! 지원을 해라 엄마보다 나라가/ 중하지 않느냐 가정보다 나라가 크지 않으냐/ 생명보다 중한 나라 그 나라가/ 지금 너를 나오란다 너를 오란다/ 조국을 위해 반도 동포를 위해 나가라/ 폭탄인들 마다하랴 어서가거라/ 엄마도 너와 함께 네 혼을 따라 싸우리라"는 어머니의 말과 "어머니여! 거룩한 내 어머니여! 찬 들에 구르거나 진흙에 파묻히거나/ 내나라의 행복을 위함이니/ 설워마소서/ 내가가면 아세아의 등불이되어/ 번개가 되어 광명이 되오리다"라는 아들의 말을 교차시키면서 애국 모자의 모습을 형상화 하기도 했다,
1941년12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뒤 일제가 1942년2월 말레이반도의 싱가포르를 점령하자 곧바로 2월21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시(詩) "호산나 소남도"에서 "2월15일밤! 대아시아의 거화(巨火)/ 대화혼의 칼이 번뜩이자/ 사슬은 끊기고/ 네몸은 한번에
풀려나왔다/ 처녀야! 소남도의 처녀야!/ 인제 사철 중얼거리는 물결 소리와/ 야자나무에 불리는 바람들이/ 네 가슴에 눈물을
가져오지 않으리라/........./ 소남도! 태양의 심장/ 길이 길이 잘 살아라"라며 일제의 침략전쟁을 '구미 맞서 일본이 주도해 싸우는
아시아 민족 해방전쟁'으로 미화 했다,
1943년12월 "신시대"에 발표한 시(詩) "어린날개ㅡ히로오카 소년 항공병에게"에서 " 고운 피 고운 뼈에/ 한번 새겨진 나라의 언약
/아름다운 이김에 빛나리니/ 적의 숨을 끊을때 까지/ 사막이나 열대나/ 솟아솟아 날아 가라/ 사나운 국경에도/ 험준한 산협에도
/ 네가 날아가는 곳엔/ 꽃은 웃으리 잎은 춤추리라"라며 가미가제로 출격하여 희생한 조선인 소년 비행병 출신 하사관인 히로오카
겡야(廣岡賢宰.李賢載)이현재를 찬양햤다,
1942년 1월 "신시대"에 정월맞이 기념시로 발표한 " 동방의 여인들"에서 대일본제국의 여인의 참 모습을 기렸다, "비단치마 모르고/ 연지분도 ㅡ 다 버린채/ 동아의 새 언덕을 쌓으리라/ 온갖꾸밈에서/ 행복을 사려던 지난 날에서/ 풀렸습니다/ 벗어 났습니다/
/ 들어 보셔요/ 저 날카로운 바람새에서/ 미래를 창조하는/ 우렁찬 고함과/ 쓰러지면서도 다시 일어나는/ 산 ㅡ 발자욱 소리를/ 우리는
새 날의 딸/ 동방의 여인입니다"
모윤숙! 이 같은 글을 낮짝이 간지러워서 어떻게 썼을까?
자기 일생에 마즈막까지 일본이 우리 금수강산을 짖밟고 짖이겨서 일본의 만행이 영원히 저질러 졌을때 "모윤숙은 일본 천황으로 부터 고관
대작의 칭호를 받고.날이 시퍼렇케 선 황금 장식의 닙본도를 하사받아서 절그렁절그렁 차고 다니면서" "하이 조센징 이리노 와 바라" 느그들은
영원히 나 모윤숙의 시종이 돼야 한다"고 거드름을 피우는 꼴불견의 세상을 꿈꿨을까?
만약을 생각할때 해방이 안되고 일본놈이 우리 강토를 영원히 노략질을 일삼았다면 "모윤숙은 그 간드러지고 요염한 붓끝으로 일본의 고관대작들한테는 인간이 느낄수 있는 최고의 아첨으로. 간드러지고 요염한 추파로. 그리고 또 요망스런 몸 놀림으로. 고관대작들의 밀고의 첩자로 변신하여 일본 정계를 피바다로 만들수 있는 수완과 수작이 뛰어난 여인으로 유추해석을 해보았다",(위에서 본 詩 몇구절을 보면 그렇게 하고도 남을만 하고. 철철 넘쳐나는 간지러움의 詩를 인용하면) "우리는 높이 펄럭이는 일장기 밑으로 모입시다"라 든가
"아들의 생명을 다 바치고 나서 우리 여성마져 나오라거든/ 생명을 폭탄으로 바꿔 전쟁마당에 쓸모있게 던집시다,"라 든가 "눈은 하늘을 쏘고
그 가슴은 탄환을 물리쳐/ 대동양의 큰 이상 두팔안에 꽉 품고 달리어 큰 숨 뿜는 정의의 용사 그대들은 이 땅의 광명입니다,"라 든가 넓은 바다
한 가운데서 너를/ 부른다/ 사나운 파도넘어/ 네 원수를 물리쳐라/ 너는 아세아의 아들/ 대양의 용사란다," 라 든가 "어머니여! 거룩한 내 어머니여" 라 든가 한구절 한구절을 볼때는 자기나라 백성은 모른체 던져놓고 낮바닥은 일본년이 다 돼서 간지러운 것도 모르고 일본놈 턱 밑에서
쫑알쫑알 옹알거리면서 더러운 행위로 붓을 휘둘러댄 위 글에 말한대로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라고 나는 유추해서 생각해본다,
모윤숙은 해방이 되자마자 "내가 언제 친일을 했냐면서" 권력의 품으로 이리뛰고 저리뛰면서 여자로서 누릴수 있는 호화로운 영광을 다 누렸다,
모윤숙은 1961년 5월달에 이화여자대학교 문화공로상을 수상하고 1963년 7월 예술원상 문학부분 상을 .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1977년 5월에 이화여자대학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1979년 황룡사 9층석탑으로 3.1문화상을. 1990년 6월 7일 사망. 다음날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을 추서받았다,
아고라 에서 퍼 왔습니다..http://bbs3.agora.media.daum.net/gaia/do/story/read?bbsId=S103&articleId=131961 원문 주소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