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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시대와 존재를 녹인 향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를 읽고-
이것은 사람의 냄새, 체취에 관한 이야기다. 체취, 라고 적고 나니 어쩐지 기분이 야릇해진다. 살색, 살결 같은 단어들도 있지만 ‘체취’가 주는 느낌은 더욱 은은하고 매력적이다. 말에 모양이 있다면 실루엣 정도랄까. 이처럼 후각이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인간은 관찰과 언어, 즉 시각과 청각을 주로 사용하여 소통하는데, 후각은 이것들과는 다르게(향수를 제외하고는)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고, 그렇기에 사람과 사람, 혹은 사물이 근접한 거리에 있을 때에만 자극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쉽게 피로해지는 그 특성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익숙해지면서도 그 근원지를 쉽게 찾을 수 없는 은밀함이 있으며, 인간에게 발달되지 못한 나약한 감각이기에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치명성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이것은 이성이 아닌 본능, 즉 동물의 영역인 것이다. 인간이 잘 모른다 뿐이지, 후각에 관해서도 언어와 같은, 나름의 복잡한 구조와 체계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장편소설 <향수>는 이러한 체계를 잘 이해했던 한 인간, 그루누이에 관한 이야기이다. 천부적인 후각을 가지고 태어난 그는 아기가 말을 배우듯이 사물의 냄새를 하나씩 체득해 갔고, 냄새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려 했으며, 아름다움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더 좋은 것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소유하고픈 욕망과 함께, 가장 아름다운 냄새를 만들겠다는 일념을 갖는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러한 향기를 담은 향수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한 장인의 성공담쯤으로 보이지만,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어째 심상치 않다. 그렇다, 향수를 만들기 위해 그는 무려 스물다섯 번의 살인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가 향수를 만들기까지의 과정은 예술가들의 창작 과정과 닮아 있다. 세상을 향한 끝없는 관찰 끝에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되고, 그 속에서 찾은 ‘아름다움’이라는 원석을 자신의 방식대로 갈고 닦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예술가들. 이렇게 해서 완성된 작품이 그들의 삶과 존재를 증명하는 것처럼, 그루누이의 향수 역시 그의 존재를 보여주는 수단이 된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무런 체취도 없이 태어나 자신의 희미한 정체성 때문에 동굴 속에서 은둔한 채 고뇌하였던 그루누이. 냄새를 통해 세상을 이해했던 그에게 아무런 냄새가 없는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거울에 비추어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냄새를 만들어낼 생각으로 향수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에게 향수는, 소유욕과 성취욕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의 존재를 찾기 위한 발악이었다.
소설의 배경은 18세기 중반, 프랑스 파리다. 당시의 파리는 폭풍 직전의 고요처럼,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위험을 내재한 곳이었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 속에서도 그러한 어두침침한 도시의 모습이 감각적인 화면 속에 잘 그려져 있다.하지만 만약 이 영화가 4D영화로 냄새마저도 완벽하게 재현한 상태로 상영되었더라면, 관객들이 영화 초반에 모두 뛰쳐나가버렸을 것이다. 그만큼 당시의 파리는 악취로 가득한 곳이었다. 배변들은 처리과정 없이 길거리에 널브러져 있었다. (하이힐의 유래가 길거리에 똥을 밟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정도니 말 다 했다)반면에 귀족들은 그러한 악취를 가리는 향기의 공간 속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매혹적이고 오래 남는 향기를 원했고 그 결과 향수 제조 기술이 매우 발달할 수 있었다. 파리는,악취 속의 서민들과 향기 속의 귀족들이 공존하는 도시였다. 그루누이가 이런 도시에서 태어난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18세기의 유럽은 르네상스가 끝물에 다다르고 계몽주의가 태동하던 시기였다. 신이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세로부터 현대로 오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은, 그 중심이 점차 국가와 개인으로 옮겨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르네상스는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이 제일 높았던 시기였다. 예술은 신이 아닌 인간을 표현했으며, 과학은 교리가 아닌 진리를 추구했고, 사람들은 율법이 아닌 감정을 노래했다. 하지만 아직도 중세와 같은 성직자들의 권력이 남아있었던 시대로서, 그루누이와 같이 (신에 비해 보잘것없는)자기 자신의 몸뚱이로 살아가고, (교리보다 불완전한)감각에 의존하고, (율법보다 불건전한)감정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는 용납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굳이 맞춰 해석하자면, 그루누이는 르네상스의 마지막에 화려하게 타오르다 꺼진, 하나의 불꽃이었던 셈이다.
소설의 후반부, 결국 그루누이는 연쇄살인범으로 검거되고, 공개처형을 선고받게 된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몰린 처형장에서, 그는 자신이 만든 향수를 몸에 뿌렸고, 곧이어 듣도 보도 못한 진풍경이 펼쳐진다. 수천의 관중들이 일제히 그루누이를 천사라고 찬양하기 시작하더니, 할아버지와 소녀가, 수녀와 대장장이가, 귀족부인과 하인이 서로 옷을 벗어젖히고 알몸을 탐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곳에는 주교와 시장, 판사와 경관들이 있었고 심지어 피해자의 아버지도 있었다. 권력과 권위, 법률과 질서, 도덕과 윤리 등 인간이 문명 위에 쌓아놓은 이성과 합리의 산물들이, 그루누이의 향수 아래에서 처참히 무너지고 있었다. 이성이 욕망에 의해 전복당하는 현장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18세기 후반의 프랑스 대혁명을 연상시킨다. 길거리에 널브러진 똥덩어리 같았던 민초들의 삶, 그리고 향기 속에서 사치와 번영을 누렸던 귀족들의 삶- 이러한 상반된 두 영역이 그루누이의 향기를 통해 뒤엉키면서 서로 은밀한 내면을 보여주고 또 충돌한다. 분노와 굶주림이라는, 원초적인 욕망 위에 쌓아올린 단두대- 그럴듯한 품위와 권위, 겉뿐인 치장들로 무장하고 있지만, 결국 너도 나와 같은 더러운 인간인 것이다.
비로소 꿈이 실현되었지만, 그루누이는 기쁘기는커녕 비참함을 느낀다. 매혹적인 향기 속에 숨겨진 자신의 비루하고 흉측한 모습을 발견하고서, 사람들이 찬미하고 사랑하는 대상이 자신이 아닌, 자신에게 부어진 향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게 할 수 있었지만, 결국 그들이 사랑할 것은 그가 아닌 그의 ‘가면’이었다. 그가 만들려고 했던 자신의 ‘거울’은, 도리어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보여준, ‘깨진 조각’이었던 것이다.
인간이 자부하는 이성이란, 예인들이 노래하는 사랑이란 얼마나 나약하고 부질없는 것인가. 결국 이것도 허울 좋은 껍데기이며 한낱 호르몬 장난에 불과한 것을. 마지막 부분을 읽으며, 고개를 흔들어 부정해보았지만 자꾸만 이러한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문득 전에 보았던 그림 한 점이 떠올랐다. 프란시스 베이컨이라는 화가가 그린 이 초상화에는 매끈한 피부와 덥수룩한 수염 대신, 정육점의 고기처럼 붉은 살과 앙상한 뼈로 뒤덮인 한 남자가 깊은 고뇌에 빠져 있다. 인간도 알고 보면, 고기 덩어리와 뼈로 이루어진 하나의 물질일 뿐인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어쩐지 나 자신이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결국 인간도 이성이라는 가면에 갇힌 욕망 덩어리일 뿐인 것이다. 근래 들어, 늘어나고 있는 흉흉한 범죄들이, 이 외면하고 싶은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것만 같아 자꾸만 답답해졌다.
소설 향수를 읽으며, 쥐스퀸트의 감각적인 문체를 통해 글로나마 그루누이가 만든 환상적인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그 향기를 맡으며, 파란만장한 18세기 중반의 파리를 느낄 수 있었고, 이성과 합리라는 표면에 갇혀있던- 욕망으로 일그러진 인간의 진짜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당분간 이 향기는 머릿속에서 쉽게 떠나지 않을 것 같다. 향기에 취해 파리 시내를 돌아다니다 그루누이의 작업실을 엿보게 될 날이, 머지않아 다시 오게 될지도 모르겠다.
책을 덮으며, 왠지 나의 체취가 궁금해져 두 손을 코에 모으고는 깊게 숨을 들이마셔 보았다. 샤워 후에 바른 향긋한 스킨 냄새가 났다. 그루누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것도 가면인 셈이다. 푹 자고 일어난 뒤에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그 냄새가 진짜 나의 냄새라면, 나도 그리 좋은 냄새의 인간은 아닌가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검은 시장바닥 위로 엎어진 향수병으로부터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이 똑 하고 떨어진다. 그 장면을 보며 왜 그렇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일까. 그날 밤은 나의 향기로 수많은 여자들을 사로잡는 꿈을 꾸었다. 내 안의 어딘 가에도 그루누이가 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