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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칠지도가 있다? 없다 ?
게시물ID : history_1040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풍림화산2
추천 : 8/14
조회수 : 1448회
댓글수 : 14개
등록시간 : 2013/06/29 20:27:44
조금은 이 게시판의 사람들도 신라에 대해서 우리( 한국 일본 포함)
가 알고 있는 고정 관념과 신라의 형성은 조금 다르다고 하는 것을 눈치챘으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유물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하지만
형식을 조금 바꾸어서 신라에 형성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보고자 합니다

풍림화산이 게시판에서 자주 이야기 했던 황당한(?) 北史 기록에 대해서
먼저 풍림화산의 의견을 이야기 합니다..

其王本百濟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國. 初附庸于百濟, 百濟征高麗, 不堪戎役, 後相率歸之, 遂致强盛. 因襲百濟, 附庸於迦羅國焉.
 
신라왕은 원래 백제 사람이다 바다를 통해서 신라로 들어가 그 나라와 왕을 물려 받았다. 처음에는 백제의 속국이었다. 백제가 고구려를 정벌할 당시 그 부역을 감당하지 못하고 나중에는 相率歸之해서 강성함을 이루었다. 이런 이유로 백제를 공격하고 가야에 종속하게 되었다.
 

北史 列傳第八十二 新羅 기록
 


신라왕이 원래 백제 사람이라고 하는 이야기에 대해서
다음의 2가지 가능성을 보고 있는데

1. 三韓 중에서 秦韓王은 馬韓王이 하였다 라는 기록을 秦韓을 신라 馬韓을 백제
이렇게 치환해서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

2. 우리의 고정 관념과는 다른 신라 형성 과정이 존재한다

풍림화산은 은 2번의 가능성이 80% 1번이 20% 정도라고 보는데 그것에 대해서
다음의 梁職貢圖 기록을 보도록 합니다.

治所城曰固麻 謂 邑 ;魯 於中國郡縣 有二十二;魯 分子弟宗族 爲之 旁小國有 ; 叛波 卓 多羅 前羅 斯羅 止迷 麻連 上巳文 下枕羅等附之

다스리는 곳을 固麻라고 하고 邑을 이르기를 ;魯라고 하는데 중국으로 치면 郡縣이라고 한다. 22개 ;魯가 있어서 아들과 형제 종족에게 나누어 준다.
그리고 그 22 ;魯를 소개하면서 旁小國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지명을 설명합니다. 풍림화산 AD 369년 이라고 추정한 神功 49年 기록과 원문 자체가 같은 지명이 눈에 뜨입니다. 일단은 斯羅에 주목해서 봅니다.
 
DSC00474.jpg


斯羅는 新羅의 다른 이름도 되는데


斯羅는 新羅의 다른 이름도 되는데
삼국사기 신라 本記 智證 麻立干 기록을 보도록 합니다

四年, 冬十月, 群臣上言: \"始祖創業已來, 國名未定, 或稱 斯羅 或稱 斯盧 或言 新羅 臣等以爲新者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之義, 則其爲國號

始祖가 창업을 한 이래로 나라 이름이 정해지지 않아 혹은 斯羅 혹은 斯盧 또는 新羅
라고 하였습니다. 新은 덕업이 매일 새롭게 된다는 뜻이고 羅는 모든 것을 덮는다는 뜻이니 이를 나라 이름으로 함이 이를 국호로 해야 합니다

新羅의 以前 이름에 斯羅가 있는데 이것은 중국 기록에 백제의 제후국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처음에 제시한 가설 A B 에서 B.. 신라 초기 형성 과정은 삼국사기가 우리에게 심어놓은 고정관념과 다르게 백제의 제후국으로서 斯羅가 중요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서기에 대한 궁금증.. 앞의 七支刀 연립 방정식 속편에서 神功 49년 즉
AD 249 + 120 이것이 AD 369 유물에 세겨진 七支刀 연대에 부합하고 돌 위에 앉아서
맹세하는 ( 石上) 맹세하는 백제 速古 大王을 기록하고 있는데

어째서 여기에 倭는 등장하지 않을까요?

물론 실제 역사를 접한 일본서기 창작자들이 인위적으로 연대를 2甲子 인상시키고
신라 여인을 motive로 창작한 神功 이라는 가공 인물을 창작해서 그 연대에
삽입시켜야 했다는 것은 倭라고 하는 것을 일본서기 창작자들이 기록하고 어려웠다는
의미입니다( 혹은 倭라고 하는 것은 없었다는 의미도 됩니다 )

그렇다면 일본서기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한번 더 고민하게 됩니다.
한가지를 응용해 봅니다

삼국사기

奈勿 尼師今

十三年春, 百濟 遣使, 進良馬二匹

일본서기 應神記

十五年秋八月壬戌朔丁卯 百濟王遣阿直伎 貢良馬二匹 

백제는 신라에 馬 주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倭에는 馬 주었다는 기록은 없는데
동일한 良馬二匹이 나온다는 것은?

여기에 대해서

그 당시에 倭를 일본서기 창작자들이 기록할 수 없었다. 즉 倭라고 하는 것의
실체는 없었다.. 단지 일본서기 창작자들의 조상인 열도의 신라인이 존재했을 뿐이다.
따라서 良馬 2匹의 은유를 공유했다는 것은 같은 이야기가 열도 version 반도 version으로 나누어서 기록된 것일 뿐이다..
이런 것을 생각할 수 있다면

이제 한반도 七支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된 것입니다.

P.S 글이 반대 테러로 삭제되면 http://blog.naver.com/ibm1082 에서 본문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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