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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에서 과연 조선과 일본의 전력차는 어느정도였을까?
게시물ID : history_1040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진지합니다
추천 : 5/10
조회수 : 3729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3/06/29 14: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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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수군
 
 판옥선 13척,초탐선 31척
 
 
 일본수군

 조선의 기록

 난중일기 - 133척(실제 세력은 200여척정도)
 이충무공전서 - 330척
 이순신 행장록 - 333척
 선조실록(이순신의 장계) - 130척(실제 세력은 200여척정도)
 징비록 - 200척
 
 일본의 기록

 고산공실록 - 참전여부만 확인가능
 프로이스 일본사 - 300척(?)(확실하지 않음)
 

 여기서 믿지 못할 기록은 빼야합니다
 
 웹에서 가장 많이 유포되있는 것은 행장록에 기록된 333척입니다
 행록은 후손이 쓴 기록이다보니 과장이 심하고
 이충무공 전서의 330척 또한 정조때 쓰여진 카더라로 충무공의 초고본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명량대첩비 또한 이순신의 전공을 기리기위해서 500여척이라는 숫자를 내세웠으나
 이는  실제 상징적인 숫자로 보는것이 맞습니다,
 
 결국 가장 확실한 자료는 이순신이 직접 보고쓴 난중일기와 조정에 올린 장계인데,
 
 일부에선 이순신이 선조의 견제를 피하기위해 명량해전의 전과를 일부로 훼손했다고 주장하나
 난중일기와 이순신의 장계의 내용이 일치할뿐더러, 선조는 대대적으로 이러한 전과를 선전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일부 사학계에서는 명량해전 당시에 일본수군이 많은 부분의 안택선(대형선박)이 동원했다고 하지만
 

 실제 일본의 치쿠시가문의 문서에 따르면
 
ㅡ 구키 요시다카가 히데요시에게 안택선 건조의 도면을 제출했지만, 구키 요시다카에게만 맡기지 않고 관백 도요토미 히데츠구 쪽에서 봉행을 붙여 엄격하게 감독하면서 조선을 서두를 것.
 
ㅡ 이세 신궁의 숲 이외에 일본 전국 어디에서도 선재(船材)에 적합한 재목이 있으면 채벌(採伐...벌목)할 것
 
ㅡ 구키 요시다카에게는 안택선 10척을 만들게 하고, 池田輝政, 中村一氏, 山內一豊 등의 다이묘에게는 각각 1~2척을 다음해 3월까지 만들게 하고, 배에는 봉행의 이름을 각인하여 名護室으로 화송할 것.
 
ㅡ 伏見城(후시미 성)과 大坂城(오사카 성)의 건축 공사, 교토 方廣寺의 대불조영(大佛造營)을 중지하고 대불조영을 위해 모아두었던 재목과 釘鐵(쇠못) 등을 배를 만드는 데 쓸 것.
 
ㅡ 도요토미가의 영지(도요토미 직할령)의 쌀을 선장(船匠), 대장장이, 大鋸의 품삯과 식량으로 줄 것.
 
ㅡ 배의 밧줄로 쓰이는 마에 대해서는 信濃(長野현), 甲斐(山梨현)에서 매매하는 것을 금지하고, 그 지역의 도요토미가의 영지에서 산출되는 금 또는 쌀을 써서 모두 사들일 것.
 
ㅡ 조선용의 철이 대량으로 필요하므로 鍛治職人은 낫이나 호미 이외의 것은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
 
ㅡ 二世(三重현), 尾張(愛知현), 三河(애지현), 遼江(靜岡현), 駿河(정강현), 和泉(大阪부), 攝津(대반부), 播磨(兵庫현), 近江(滋賀현)의 포구로부터 선원을 조사하고 건조한 선박의 선원으로 삼을 것.
 
ㅡ 대철포(大鐵砲)를 조달하는 일.
 
 

게이쵸의 역(정유재란) 준비에 앞서 건조된 안택선 같은 대형선박 고작 12~16척정도나 건조되었고
이 모두가 명량해전에 쓰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 뿐더러

도도 다카도라의 일대기가 기록된 고산공실록에 따르면
해협의 폭이 좁아 소선을 이용한 공격을 시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실질적으로 명량해전에서의 일본군은 규모가 작은 배(세키부네,고바야)를 앞세워 공격했다고 볼수있고
 
톤급에서 이미 절대적 우위를 차지한 판옥선이 이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고 볼수 있습니다
 
한국에선 명량해전에 나타난 일본수군을 2만~10만까지 예측하지만
당시 좌군(전라도,서해방면)에 소속된 일본군(육군+수군)은 고작 6만명이였으며
우군을 포함해도 11만명이 넘지 않습니다
 
좌군에 소속되있던 당시 일본 수군의 병력은

도도 다카도라 2800명
가토 요시아키 2400명
와키자카 야스하루 1200명
구루지마 미치후사 600명
간 미치나가 200명
 
총원 7200명이며
 
이에 약간의 기타수군+육군을 포함한다해도
1만이 넘지 않는 규모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반론으로, 하치스카와 나카가와,시마즈도 참전을 했다는 주장이 일부 있습니다만
실제 이들은 육군일뿐더러 해전 당시에는 전라도 내륙에 주둔하고 있었고
 
시마즈는 명량해전과는 교점이 전혀 없습니다
 
 
이에 조합해서보면

명량해전에 나타난것은 약 1만명 미만(일본수군 전체가 움직이지 않았다면 합당한 수치는 7000명 미만이겠군요)
의 일본수군에 약 200여척 미만, 실제 참전은 133척 가량 (기함제외 주력은 세키부네,고바야)에 맞서

조선 수군은 약 13척과 협선(초탐선)31척을 이용한 전투를 벌이므로
객관적 44척 vs 133척 가량으로 아직까지도 1대3~4쯤의 전력차가 벌어지지만
 
13척 vs 330~500척이라는 말도안되는 수치보단 조금 합리적인 전력차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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