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역학은 1930년대에 태동했어요.. 아는지 모르는지 그 의미를 알기도 전에 이미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 속에서 신음하며 물리학은 커녕 사회적 정신적 굶주림의 사회를 벗어나지도 못한 채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역사는 한 장 두 장, 우리의 곁을 지나 갔지만 우리나라 사람들 대다수는 해방이 되어서도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를 실천적으로 구별하지 못하는 늪으로 빠져들고 말았고 그때의 우매한 죄에 대한 벌은 현재의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아이티 강국을 앞세우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대단하게 우리 사회를 파고든 근 수십년 세월동안에 그 이론은 본래의 물리학적 이치 보다는 주입식인 교과서의 한 쪽면을 차지하는 학문적 권력의 상징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절대적인 빛의 속도를 함부로 따지려 하지 마라. 내가 빛이요 그림자니라....
그러다가 겨우 상대성이론의 껍데기를 맛 보고 나니 그간의 온갖 자연과 세계를 설명해 주고 정의해 주었던 고전물리학(일부분)을 뒤집는 양자론이 눈앞에 나타나서 우리의 지성을 한 껏 흔들어줍니다. 도대체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죽은 것인지 산 것인지 아직까지도 답을 안해주면서 말이에요.
그것 말고도 민주화 사회니 국제경제니 신자유주의니 현대사회를 규정하는 엄청난 말들이 우리의 삶을 요란하게 장식하고 있는데 정작 나와 내 몸은 어느 좌표에서 어느 곡선을 타고 있는 것인지 알려주지를 않아요.
세상은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미묘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우쳐 줬는데 세상은 그러면서 왜 아직 슈뢰딩거의 고양이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슈를 내밀지 않는 것일까요. 바빠서 그런 건가?
일본의 하야부사 우주선은 날아가는 혜성에 접근해서 희토류를 채취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곤 2호 우주선을 쏘아올립니다. 우리가 정부의 있지도 않은 콘트롤타워와 원시적 권력욕에 맞써 국민의 기본권을 되돌려 받으려고 싸우고 있을 때 말입니다.
우리사회가 발전해 나아가고 있는 걸까요? 손님에게나 대접하던 귀한 계란을 이제는 돈도 안받고 서비스로 제공받는 살찐 사회에 살고 있긴 합니다. 어딜가도 모두 자신의 세계에 몰두해 시간가는 줄 모르는 풍요로운 단말기의 세상이기도 해요. 새로운 정규직 일자리는 10만개인데 해마다 대학교 졸업생은 70만명씩 풍요롭게 생산되고 있습니다.
이제 결론을 낼 순서가 된 것 같습니다.
양자역학의 비결정론은 우리의 세상을 새롭게 보여주고 있어요. 친일파 척결이 70년전, 일제가 물러나고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기 전에 했었다면 훨씬 좋았겠지요. 그랬으면 우린 지금 더 정의로운 사회에서 기본권을 얻기 위해 싸우기 보단 조금 더 우아한 가치를 위해 싸우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 때 이루어지지 못한 결단과 행동이 현재까지 유보가 된 채로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아직 결정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확률적으로 정의로운 독립국가를 기대하였지만, 아직 실천되지 못한 결정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부터 애써서 결정해야될 사회가 남아있다는 뜻입니다.
양자컴퓨터가 나오면 세상은 더욱 정교해지고 편하게 될 것입니다. 드넓은 우주에 우리가 쏟아올린 우주선이 새로운 행성을 개척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일본은 뭐하고 있을라나. 아마도 미운 동반자의 역할을 그대로 유지할 겁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살아있을지 죽어있을지 이제 뚜껑을 열 준비를 합시다. 언제까지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