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아주 어렸을때 직접 겪었던 일로
거진 삼십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너무나 생생하게 그 날의 기분, 상황, 날씨, 냄새까지도 뚜렷이 기억이 납니다.
제가 여섯살때, 부모님께서 신축 아파트를 분양 받으셔서 입주를 기다리고 있던 중, 전에 살던 집이랑 계약기간이 약 반년 정도 차가 생겨서
그 기간 동안만 두살 터울 언니가 다니던 초등학교 근처에서 셋집을 얻어 살기로 하고 평범한 주택으로 이사를 갔었습니다.
동네는 아주 소박하고, 이웃들간에 다들 알고 지내고, 동네 아이들도 다들 근처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던지라 골목길을 누비며 즐겁게 놀았던
대부분 좋은 기억들만 있네요.
뒤에 야트막한 산이 있는, 방사형으로 골목이 퍼져 있고 그 골목을 따라 옹기종기 주택들이 모여있는,80년대의 전형적인 주택가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 당시 유치원생이었던 저는, 바로 옆집에 살고 있던 동갑내기 친구와 여느 평범했던 날처럼 같이 손을 잡고 동네 한바퀴를 하러 집을 나섰습니다.
둘이 계속 같이 걸어다니다가, 아이스크림이나 컵라면, 과자를 하나씩 사서 나눠먹는게 우리의 일과였지요.
늘 가던 코스대로 걸어가려는데, 맞은편에서 어떤 큰 아저씨가 우릴 쳐다보며 싱긋싱긋 웃으면서 걸어오는 겁니다.
그때의 나는 어른들을 공경하고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일종의 어린아이다운 강박관념? 같은게 있었던지라
일단 마주친 눈을 피하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하며 인사를 해야하나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을 했던게 기억이 나네요.
그 아저씨는 역시나 우리를 그냥 지나치치 않고 다가와 무릎을 굽히고 앉아 인사를 하더라구요.
그래서 네 안녕하세요~ 이랬는데 갑자기 뜬금없이 "나 기억 안나? 느네 아빠 친구잖아~ 집에도 놀러가고 그랬었는데~~~'
이러는 겁니다. 저는 무척 당황했고 친구는 기억 안나냐는 눈으로 나를 말똥 말똥 쳐다보고.
짧은 인생 이리저리 기억을 필사적으로 더듬어 봐도 절대 봤던 얼굴이 아닌겁니다. 어린 맘에도 자신의 기억력을 과신했던 저라서 이상하다고는
생각을 했지만... 어른이 거짓말 할 리 없다는 생각에 기억이 안나서 죄송한 마음에 무척 당황을 했었더랬습니다.
기억이 안난다고 잔뜩 미안한 목소리로 대답을 했더니 '그렇구나~ 지나던 길인데 아무튼 반갑다며 아저씨가 과자나 사 줄테니 슈퍼 가자'
고 냉큼 손을 잡고 동네 슈퍼 쪽으로 이끌더라구요. 친구는 집에 가라고 하구요. 정말 따라가기 싫었고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라는 어른들 이야기
수백번도 더 들었지만, 심리적으로 당황한 상태에 아빠 친구인것도 기억 못 해서 죄송한데 가기 싫다고 거절하면 예의에 어긋나는것 같아
이끄는데로 몇발자국 걸었던것 같아요. 분명히 마음 속으로는 따라가면 안되는데... 하면서도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던거죠.
그떄는 슈퍼 방향이라 의심을 안 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방향이 뒷산 으로 가는 방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저씨 대낮이었는데도
무릎 굽히고 얘기할때 자기가 아빠 친구라며 볼에 뽀뽀를 해 달라고 했었는데 ㅜㅜ 그 때 술냄새가 진짜 엄청 났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친구는 멍하니 뒤에 남아있고 저는 울며 겨자먹기로 손을 붙잡힌 채 걷고 있는데 뒤에서!
엄마가 저 밑 시장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내 뒷모습을 본겁니다. 모르는 아저씨랑 손 잡고 가는 저를 보고는 혼비백산 하셔서
제 이름을 마구 부르며 달려오셨어요. 제 손을 낚아채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죠.
'도대체 누구세요? 누구시길래 제 딸을 데리고 어디로 가는거냐!?'고.
저는 당연히 엄마도 아빠친구인데 기억을 못 하시는 줄 알고 이를 어쩌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사태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저씨가 하는 말이
'아 하하하... 그냥 너무 귀여워서 과자나 사 줄까 했는데..' 하면서 내빼는거에요.
그 당연한 상황을 어린 저는 이해를 못 했습니다. 그냥 막연한 느낌으로만 위험을 감지하고 있었지만 아주 나중에서야 그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었구나,
느꼈고 향후 몇년간도 그 일이 정확히 어떤 일이었는지 이해를 못 했던거 같아요.
그 날 저는 엄마에게 매우 혼났습니다. 그렇게나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라고 했는데, 따라가면 어떻하냐고.
이게 제가 이글을 쓰는 이유기도 한데요,
우리들이 아이들을 볼 때, 다 큰 것 같아도 중학교때까지는 정말 보호해줘야 되고 무엇보다 아이들의 상황 대처능력을 믿으면 안된다는 거에요...
이론은 이론일 뿐 어떻게든 작정한 어른들 앞에서 아이들은 아이 일 뿐이에요.
가끔 티비에서 안타까운 사건들을 볼 때마다 이 일이 생각나요. 납치되거나 일을 당한 아이들이 어떤 심리 상태로, 어떤 과정들로 그런 일들을 겪었을
지 너무 잘 알겠으니까.
살면서 이런 저런 일들 많이 겪었지만, 유년기의 이 기억은 정말 떠올릴때마다 분노를 일으키네요. 일종의 경미한 트라우마 같은거겠죠.
정말 엄마가 아니었음 어떻게 됐을지.. 상상하기도 싫어요. 세월이 아주 많이 흐르고 엄마에게 이 때 일 얘기하면서
엄마는 내 슈퍼 히어로야! 했더니 어머니 왈..
그런 일이 있었니??
음.
번외로 같은 해의 일인데, 같은 친구랑 ㅎㅎ 고맙게도 상 꼬맹이였던 우리를 잘 데리고 놀아주던 동네 꽃미남 6학년 오빠가 있었어요.
그오빠가 맨날 사마귀 잡아서 보여주고, 벌 잡아서 가죽벨트에 침 쏘는거 보여주고 ㅋㅋ 요즘 초등학생이랑은 다르게 참 자연을 잘 아는 오라버니였죠.
그 오빠랑 맨날 티비 모양 곤충 채집 가방? 같은거 둘러메고 이런저런 곤충 잡으로 가끔 뒷 산에 갔었는데
하루는 우리가 산에 가자마자 멀리서 어떤 여자가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는 거에요! 보이지는 않는데.. 그래서 제가 오빠! 누가 살려달래! 하고 찾으려
고 두리번 대니까 오빠가 어딘가 보고 있다가 사색이 되서는 빨리 나가자 하면서 우릴 데리고 급하게 뛰다시피 산을 빠져나가는 거에요.
무서워서 종종종 따라 뛰는데 또 ' 가시 마세요~~~ 가지 마세요~~~' 하면서 여자가 막 다시 부르는 소리가 들렸는데
오빠가 우릴 데리고 미친 듯 도망나와서는 집에 데려다 주고 가 버렸어요.
마치 꿈처럼 이 기억이 남아 있네요... 지금 생각하면 경찰에 신고 했어야 되는데... 마음이 그러네요. 오빠가 신고 했을수도 있겠단 생각도 들고..
딱히 우범지대 마을이 아니었는데 이런 일들이 기억에 있는거 보면..ㅜㅜㅜ
가끔씩 세상과 사람이 무서워지고 그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