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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고대 국가 틀 완성한 닌토쿠王, 백제 왕실과 밀접한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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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사울아비
추천 : 2
조회수 : 69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6/19 15: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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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고대 국가 틀 완성한 닌토쿠王, 백제 왕실과 밀접한 교류
  
2015-06-19 03:04 | 최종수정 2015-06-19 10:26   
    
[동아일보]
[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5>닌토쿠 왕가의 비밀
 
어제(18일) 소개한 일본 최대의 코리아타운 오사카에 있는 미유키모리 신사에는 왕인 박사의 노래비가 서 있다. 재일교포와 일본인들이 6개월간 모금운동을 해 한국 돈 4600만 원을 들여 만든 이 비석에는 왕인 박사가 일본 16대 왕인 닌토쿠(仁德)의 즉위를 축하하며 지은 것으로 알려진 ‘나니와쓰(難波津·지금의 오사카를 지칭하는 말) 나루터의 노래’라는 제목의 간단한 시가 한 줄 적혀 있다. ‘나니와쓰에 피는구나 이 꽃은/겨울잠 자고 지금은 봄이라고 피는구나.’
 
시비 옆 안내판에는 ‘닌토쿠 왕이 왕위에 오르니 오사카에도 봄이 오고 매화꽃이 다시 피는 것처럼 새로운 왕의 즉위를 축하한다는 의미’라고 한일 양 국어로 친절하게 적혀 있다. 미유키모리 신사는 일본 최초의 통일국가인 야마토 정권의 기틀을 세운 닌토쿠 왕을 모시는 신사이다. 이런 신사에 백제인 왕인 박사의 노래비가 서 있는 연유는 무엇일까. 또 닌토쿠 왕은 누구이고 두 사람은 어떤 인연을 맺었기에 백제인이 일왕의 즉위를 축하하는 시까지 짓게 된 것일까. 이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 닌토쿠 왕이 잠들어 있는 왕릉을 찾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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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최대 무덤을 만든 절대 권력자
 
 닌토쿠 왕릉은 그 면적에서 이집트 피라미드, 중국의 진시황릉을 넘어서는 세계 최대 무덤으로 일본이 자랑하는 문화유산이다.
지난달 21일 오전 11시 오사카 난바 역에서 전철을 타고 20분쯤 달려 사카이 시(市) 미쿠니가오카 역에서 내리자 바로 거대한 구릉과 맞닥뜨렸다. 길이 486m, 높이 35m의 거대한 왕릉이라고 해서 잔뜩 기대하고 왔는데 왕릉 안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처음과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산 하나를 보는 게 전부였다. 7분 정도 걸어 내려가 참배소 앞에서 카메라를 꺼내 들었지만 능 규모가 너무 커서 한 화면에 담기지 않았다.
왕릉의 실체는 옆 다이센 공원 안에 자리 잡은 사카이 시 박물관에서야 어렴풋하게 접근할 수 있었다. 박물관은 닌토쿠 왕릉을 포함해 이 일대 20여 개 왕릉과 고분들을 관리하는 관리사무소 격이었다.
 
마침 박물관에서는 닌토쿠 왕릉 내부와 외부를 재현한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레이저 항공촬영으로 능 안을 찍은 사진을 보니 일부 경계선이 안 보이는 등 심하게 훼손된 모습도 보였다.
 
전시실 한쪽 벽에는 윗옷을 벗고 커다란 돌 더미를 진 남자들이 오르내리며 능을 조성하는 현장을 재현한 대형 그림이 걸려 있었다. 노예를 부리던 고대 시대 작업방식이었다. 최근 일본 건설 회사들이 첨단 장비로 무덤 공사에 투입된 인력을 계산해 본 결과 하루 2000명의 장정이 15년 8개월간이나 동원되고 이들이 져 날랐던 돌과 흙만도 5t 트럭으로 56만2300대 분량인 것으로 나왔다. 지금 기준으로 보아도 어마어마한 대규모 공사였던 것이다. 무덤의 주인인 닌토쿠 왕은 고대 시대에 그 정도 인력을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하며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를 이끌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일본 고대사학자들은 일본 고대사에서 실질적 왕권이 시작된 시점을 닌토쿠 왕으로 보고 있다. 그가 집권하던 시절 오사카가 얼마나 큰 번영을 이뤘는지는 오사카역사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달 19일 시내 중심부에 있는 오사카역사박물관에 도착했더니 입구에서부터 거대한 고대 양식의 건물이 관람객을 맞았다. 데라이 마코토(寺井誠) 주임 학예원은 “고대 오사카 궁에서 창고로 쓰이던 건물을 복원한 것”이라며 “5세기 왕실의 교역 물품을 보관했던 것으로 총 16동 이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창고 하나 길이만도 10m에 너비가 9m였는데 이런 건물이 16동 이상이나 있었다고 하니 수천 년 전 고대 시대에 얼마나 교역이 활발하고 절대 권력의 힘이 셌으면 이 정도였나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은 오사카가 일본의 중심지로 야마토 시대를 이끈 시대를 ‘나니와 대세(難波 大勢)’라고 명명하며 이 시대를 열었던 인물이 바로 닌토쿠 왕이라고 밝혔다.
 
박물관 10층에 재현된 당시 궁전 내부 생활을 둘러보니 궁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그려졌다. 눈길을 끌었던 것은 화려한 색상의 옷을 걸친 인형들이 가로 42m, 세로 21m의 대극전(大極殿)에 서 있었는데 입은 의상들이 우리 눈에도 익숙한 백제나 신라 귀족들이 입었던 것과 비슷했다.
 
○ 백제인을 사랑했던 닌토쿠 왕
 
 닌토쿠 왕이 백제인들을 아끼고 사랑했다는 것은 여러 문헌에서 확인된다. 백제인 신하가 죽었을 때는 매우 슬퍼하며 따로 신사를 지어주었을 정도였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왕은 43년 9월에 백제인 ‘아비코’로부터 사냥용 매를 선물 받고 이 매를 백제인 신하 ‘사케노기미(酒君)’에게 건네주며 잘 기르라고 했는데 그만 신하가 죽고 만다. 왕은 이에 크게 슬퍼하며 따로 장례를 치러주고 그에게 ‘응견신(鷹見神·매를 돌보는 신)’이라는 시호까지 내린다.
 
정재정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는 “한일 역사학계에서 닌토쿠 왕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일본 고대 국가의 틀을 완성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한반도에서 건너간 백제 도래인들과 매우 밀접하고 특별한 관계를 맺어 고대 한일 교류의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라며 “도래인이 대거 살던 오사카를 수도로 삼을 정도로 왕실 차원에서 한반도와의 교류의 문을 활짝 열었던 상징적인 사람”이라고 했다.
 
백제 왕실과 닌토쿠 왕실의 관계는 닌토쿠 왕릉에서 발견된 각종 유물들이 백제 무령왕릉 고분에서 발견된 유물들과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이 나오면서 더욱 확신을 갖게 했다. 대표적인 것이 청동거울(동경·銅鏡)이었다. 1872년 닌토쿠 왕릉에서 출토된 것이 1971년 백제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것과 거의 비슷해 한일 역사학자들로부터 ‘쌍둥이’ ‘복제품’ 소리를 들었을 정도였다. 한국 삼국시대나 고대 일본 왕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청동거울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무덤 내 부장품으로 알려져 있다.
 
쌍둥이 유물은 또 있었으니 바로 두 무덤에서 각각 나온 환두대도(손잡이 끝에 둥그런 고리가 달린 큰 칼)였다. 고리 안에 세 발 달린 새가 한 마리씩 들어가 있는 것이 똑같았다. 이런 양식은 중국에서는 볼 수 없어 한반도에서 전래됐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닌토쿠 왕은 오사카의 건설 과정에서도 백제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미나미 미쓰히로(南光弘) 동오사카 문화재학회장은 “닌토쿠 왕은 홍수를 막기 위해 오사카의 물줄기를 바꾸는 제방공사를 했는데 이는 일본 최초의 대규모 토목공사였다”며 “당시 공사 때 백제인들이 기술자나 공사 감독관으로 일했다”고 말했다.
 
닌토쿠 왕 당시 오사카 거주 인구의 3분의 1이 백제인이었다는 설도 있다. 박영혜 오사카 한국문화원장은 “한일 역사학자들이 마음의 문을 조금 더 연다면 고대 문헌에만 갇혀 있던 왕가들과 한일의 긴밀한 관계가 ‘신화’에서 깨어나 ‘역사’의 무대 위로 다시 올라올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기사 보충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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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020&aid=0002809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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