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travel&no=12610&s_no=10305527&kind=member&page=1&member_kind=total&mn=632479 (로마에서 오전 Part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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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라티노 언덕과 포로로마노의 입구는 같다. 표 한 장을 사면 모두 관람할 수 있다. 일단 로마패스로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문제가 생겼다. 로마의 대부분의 유적지는 들어갈 때 가방 검사를 하는데, 콜로세움에 들어갈 때는 아무 문제없었던 가방에서 계속 소리가 난 것이다. 나를 검사하던 여성 검침원은 짜증을 꾹 참는 표정을 하며 가방 검사를 마쳤다.그런데 이번엔 몸에서 계속 소리가 났다. 휴대폰을 꺼내고 동전을 꺼냈는데도 소리가 났다. ‘아.. 이제 벨트 밖에 남지 않았는데..’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 검침원도 ‘저 동양 남자가 벨트 푸는 것을 봐야한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것 같다. 거기다 허둥지둥 가방의 짐을 보여주는 모습도 절대 ‘테러리스트’나 ‘IS’ 같아 보이지도 않았던 것 같다. 내가 벨트로 손을 가져가는 순간 급하게 손으로 나를 제지하더니 웃으며 그냥 들어가라고 했다.
그렇게 무사히 검문을 마치고 들어가면 작은(콘스탄티누스 개선문에 비해) 개선문이 하나 보인다. 바로 티투스 개선문이다. 티투스(39년 12월 30일 - 81년 9월 13일)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그저 왕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왕위에 올랐다고 하기에는 억울할 정도의 풍부한 행정 및 전투 경험을 갖고 있었다. 로마가 네로 이후 많은 혼란을 겪었고 그것을 수습한 것이 티투스의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인 것은 앞서도 언급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본격적으로 황제가 되기 위해 로마로 진격하던 시점에 유대 전쟁의 총 사령관이었다. 황제가 되기 위해 전쟁을 뒤로 미뤄두고 갈 수는 없었다. 다른 나라와의 전쟁을 포기한 황제가 되긴 싫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여론도 그것을 좋게 봐주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베스파시아누스는 전쟁을 아들 티투스에게 맡긴다. 이때 티투스의 나이는 겨우 30살이었다. 티투스는 이 전쟁을 잘(?) 마무리 했다. 이 전쟁으로 1,100,000명 이상이 죽고 97,000명 가량의 유대인이 포로가 되었으며, 유대는 ‘마사다 요새 항전’이라는 신화를 남겼다. 티투스 개선문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81년에 만든 것이었다. 티투스는 네로나 마르쿠스 아우델리우스 같이 유명한 황제는 아니지만, 그의 제위기간에 일어난 큰 일로 앞으로도 이 글에 등장하게 된다.
<티투스 개선문,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에 비하면 소박하기 짝이 없다>
티투스 개선문을 지나 팔라티노 언덕으로 향했다. 고대 로마 제국이 시작된 곳이었다. 낮은 언덕을 오르는데, 왼쪽으로 작은 문이 있었고 그리로 나가니 다시 넓은 정원 같은 곳이 펼쳐졌다. 거기에는 벤치도 있었다. 난 그곳에 잠시 앉았다. 쉬고 싶기도 했고 햇살도 너무 좋았다. 앉아 생각해보니 이것저것 정신없이 보느라 혼자 여행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혼자 여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새삼 즐거웠다. 혼자 여행은 물론 외로운 일이다. 무엇을 해도 혼자이니 말이다. 특히 아름다운 것을 보고 그것을 나눌 사람이 없을 때에는 외로움이 더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이 혼자 하는 여행의 즐거움이다. 아름다움을 오롯이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혼자 하는 여행에는 계획과 타인의 취향이 개입하지 않는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내가 가고 싶을 때, 내가 가고 싶은 방법으로 갈 수 있다. 그리고 내가 가기 싫은 곳은 가지 않을 수 있고,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보지 않을 수 있다.
다시 길을 가고 싶어졌다. 일어나 언덕을 오르는데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뒤 돌아보니 내 지갑이 떨어져서 그것을 가져다주기 위해 부른 것이었다. ‘누가 로마를 소매치기의 도시라 했는가!’란 생각과 함께 나의 허술함에 다시 한 번 헛웃음이 나왔다. “Thank you very much” “Your welcome” 상투적이지만 (최소한 나에게는) 진심어린 대화가 오갔다. 그리고 다시 언덕을 오르는데 이름 모를(아마도 나만 모르는 것 같은) 집터들이 나왔다. 이 집터들은 왕궁이 있던 팔라티노 언덕 주변에 있던 귀족들의 집들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리고 더 오르면 평평하게 넓게 펼쳐진 정상을 볼 수 있는데, 그곳에는 아우구스투스가 만들었다는 왕궁터가 남아 있다. 아우스투스는 평생 검소(?)하게 살았던 것으로 유명한데, 비록 건물은 검소하게 지었을 지언 정 로마 최고의 권력자답게 가장 좋은 곳에 왕궁을 건설했다. 팔라티노 언덕을 둘러보고 있자니 이곳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하고 오지 않아 어딜 봐야할지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포로로마노가 보이는 곳까지 갔다. 그곳에서 포로로마노와 그곳을 관광하는 수많은 관광객들을 멍하게 보고 있으니 문득 로마의 옛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높게 솟은 각종 신전과 포룸, 그리고 그곳을 지나다니던 사람들.. 하지만 지금은 그냥 폐허로 변해버린 옛 로마의 중심지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또 문득 든 생각은 ‘그 엄청난 건축을 가능하게 했던 부와 노동은 어디에서 왔는가?’란 질문이었다. 이것은 여행 내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질문이기도 했다. 노예가 노동을 담당하던 고대 로마에서 끊임없는 노예의 수급은 필수적인 요소였다. 노예는 전쟁포로나 신분 세습을 통해 확보된다. 그런데 로마 사회는 노예가 해방노예를 거쳐 완전한 자유민이 될 수 있는 통로가 열려있었다. 그리고 해방된 노예 노동의 빈자리는 다른 노예 노동에 의해 채워져야 했다. 전쟁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했던 것이다. 심지어 로마의 그 많은 부의 일부는 주변부 국가의 침략을 통해 약탈된 것이었다(물론 큰 제국의 안정된 교역을 통한 부의 창출도 당연히 존재했다). 콜로세움의 검투사, 포로로마노를 보며 떠올린 ‘제국 로마’의 사회·경제 시스템은 옛 로마제국의 영광을 보다 복잡하게 감상할 수 있는 쓸 때 없는 단서를 제공했다.
<팔라티노 언덕에 있던 유적, 아우쿠스투스의 '검소한' 궁궐터 가운데 일부인 듯..(사실 잘 모르겠음)>
포로로마노로 내려왔다. 포로로마노는 명실공히 제국 로마의 중심지였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제정(帝政)으로 돌아서기 이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원로원이 있던 곳도, 공공장소를 뜻하는 최초의 포룸(Forum: 이탈리아어로 Foro) 건축인 율리우스 포룸이 세워진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그 밖에 여러 신전들이 즐비하였던 것도 바로 이곳 포로로마노였다. 그러나 내려와서 본 포로로마노는 위에서 볼 때보다 옛 모습을 상상으로 재현하기 힘들었다. 다만 폐허가 된 건물들 사이를 걷고 있으니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라는 시구가 떠올랐는데, 쇠락한 로마의 옛 중심지에서 마지막 고려인의 시구가 떠오르는 것이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 사람이구나’란 생각이 든 것이 좀 특별할 뿐이었다. 그곳에 있는 율리우스 회랑, 원로원 건물, 로물루스 신전 등등을 둘러봤다. 혼자 여행을 다니면 그냥 아는 것을 혼자 되새기며 보기만 하면 되니 말을 하지 않아도 돼서 편했다. 평소 말 많은 나지만, 직업 때문에 여기저기 다니며 설명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런 점에서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아직까지 꽤나 마음에 드는 일이었다.
<로마의 중심지 포로로마노의 모습>
아침에 일어나 산타마리아 마조래 성당, 콜로세움, 팔라티노 언덕, 포로로마노까지 봤더니 오후 한시가 됐다. 당연히 배가 고팠다.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밥을 사먹어야 하는 시간이 온 것이다. 일단 포로로마노 밖으로 나갔다. 콜로세움에서 시작해서 포로로마노를 가로질러 나가면 바로 미켈란젤로가 설계했다는 캄피돌리오 광장이 나온다. 하지만 배가 고파 일단 그곳은 지나가기로 했다. 마침 보고 싶었던 캄피돌리오 박물관도 월요일이라 문을 닫았다. 빠르게 언덕을 내려가는데 아직은 지도에 대한 감이 없어 조금 헤매고 있었다. 마침 로마 병정 복장을 한 사람이 친절히 나를 부르더니 길을 알려준다고 했다. 그리고 길을 알려줬는데 갑자기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 난 돈이 없어 싫다고 했더니 돈이 없어도 괜찮다고 계속 찍으라고 했다. 평소 같으면 그냥 무시하고 갔겠지만 길을 친절히 알려준 것이 고마워서 한 장 사진을 찍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돈을 내놓으란다.
나 : (영어로) 얼만데?
사기꾼 : 20유로
나 : (한국어로 웃으며) 이런 미친놈이..
사기꾼 : 돈 줘
나 : (한국어로)씨발.. (영어로) 2유로 있어. (한국어로) 먹고 떨어져 사기꾼아.
사기꾼 : (뭔가 눈치를 챈 듯) 알았어. 잘 가~
이 사건은 결정적으로 이탈리아 상인들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는 계기가 됐다. 돈을 빼앗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찾으려고 한 식당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다 포기하고 눈에 보이는 식당에 앉아 피자를 시켰다. 피자가 곧 나왔는데,무슨 청어 같은 것이 들어있었다. 주문할 때를 생각해 보니 웨이터가 뭔가 당황했던 것 같기도 했다. 난 분명 메뉴에 있는 재료에서 어떤 ‘생선’에 관한 것도 보지 못했던 것 같은데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더 당황스러운 것은 맛이었는데,짜도 그렇게 짤 수가 없었다. 마침 물을 가지고다니던 것이 있었는데, 결국 그 물을 여기서 다 마시고야 말았다. 그리고도 1/3을 남겼다. 사기꾼에 최악의 음식 선택까지. 심신이 모두 지쳤다.
<이탈리아 사기꾼 녀석(이라고 하기엔 뭐 지금와서 생각하면 열심히 먹고 살는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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