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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의 와일드카드/무패 신화 -유금필 장군- <BGM>
게시물ID : history_1033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ementist
추천 : 12
조회수 : 2784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06/24 23: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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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금필은 평주 사람으로 평산유씨(平山庾氏)의 시조이기도 합니다. 아들로는 유긍(庾兢), 유관유(庾官儒), 유경(庾慶), 유방(庾方)등이 있으며, 딸은 태조의 제9비인 동양원부인(東陽院夫人)입니다. 이름난 후손으로는 의종때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낸 유필(庾弼), 그의 아들인 유응규(庾應圭),유자량(庾資諒), 숙종때 상서우복야를 지낸 유석(庾晳)등 모두 명신으로 손꼽혔습니다.
유필은 무송유씨(茂松庾氏)의 시조이기도 합니다.
 
광종때에는 개국공신이 많았던 평주가 핍박을 받을때 유금필의 아들들도 피해를 보기도 하지만, 고려 중기까지 고려의 명가로써 이름을 날렸습니다.
 
태조는 유금필의 후손들이 비록 죄를 짓더라도, 죄과를 논하지 말고 중용하라는 유시를 남겨 유금필의 후손을 보호하려 하였습니다.
유금필의 손자 유공의(庾恭義)는 죄를 지었지만, 오히려 숙주방어사를 제수받았습니다. 결국은 문하성의 반대로 결국 삭탈관직당하긴 했습니다.
또 후손 유중경(庾仲卿) 또한 간음하여 난 자식이라 하여 관직제수를 신하들이 반대하였으나, 유금필의 후손이란 이유로 관직을 제수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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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금필은 평주 출신으로 처음에는 평주 박씨가문에 소속되었던듯 싶습니다. 고려사 열전에 태조를 따라 마군장군에 이르렀다는 귀절을 보아, 평주 박지윤이 궁예에 귀부한후, 군부에 투신하여 궁예의 신임을 받아 마군장군에 오른듯 싶습니다.
918년 역성혁명 직후 홍유와 함께 군사를 움직였는데, 이름이 홍유 다음에 나온것과, 역성혁명 당시 1등공신에 책록된 4대 마군장군에 비해 2등공신으로 책록된것으로 미루어 고려 초기에는 4대 마군장군(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에 비해 명성은 떨어졌을것으로 보입니다.
 
본격적으로 유금필의 활약상이 벌어지는 시기는 920년 골암진을 바탕으로 북쪽지역을 평정한 때부터 입니다. 적어도 920년부터 928년 까지는 북쪽에 기거하며, 북방 여진족을 휘하로 삼아 강력한 기병을 육성한듯 싶습니다.
그러던 것이 927년 공산 동수 전투에서 고려가 주력 기병 5000과 보명 1만, 게다가 호족들의 군사까지 합쳐 최대 2만의 주력군을 잃고, 김락,신숭겸,호의,전락,전이갑,전의갑,(김홍술)등 고려의 명장 8명을 잃은 충격에 고려 전체가 흔들린 직후 928년부터 유금필의 남쪽정벌이 시작된듯 합니다. 한마디로 구원투수로 나선 것이지요. 그것도 강력한 북방 기병을 이끌고 말입니다.
 
928년부터 930년까지 고려가 가장 힘겨운 시기에 거둔 승리의 대부분은 유금필이 이끈 전투였습니다.
 
그러다 931년 참소를 입어 곡도로 귀양가게 됩니다. 참소를 한 인물들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당대의 최강의 호족 세력인 패강진의 입김이 작용했으리라는 추측을 할수 있습니다. 유금필 정도 되는 명장을 함부로 참소할수 있는 세력은 당시의 패강진 세력밖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패서 호족들은 북방의 기병을 보유한 유금필을 상당부분 경계했을 것이며, 이에 태조를 압박해 결국 유금필을 귀양형에 처하도록 햇을것이란 추측이 유력한듯 싶습니다.
 
그러던 것이 932년 나주를 재점령한 백제가 수군장군 상애를 보내 고려의 심장부를 강타하게 됩니다. 고려는 급히 수군을 보내 이를 막고자 하였으나, 도저히 백제군의 상대가 되질 못해 대패를 당하게 됩니다. 이때 유금필이 귀양지에서 인근 호족들에게 명하여 군사를 소집하고, 방비태세를 갖추고 태조에게 서신을 보내 태조의 마음을 위로해주니, 태조는 크게 뉘우치며 유금필을 다시 중용하게 됩니다.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남쪽정벌군 총대장)으로 재임명된 유금필은 바로 신라와 인접한 의성부(경북 의성)에 주둔하게 됩니다.
933년 신검이 이끄는 군대가 다시 신라를 침공하여 서라벌이 함락직전에 처하게 됩니다. 이때 태조는 급히 신라를 구원하라는 명을 내리게 됩니다. 이때 유금필이 이끌던 병력은 당시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3000~5000정도 였을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때는 북쪽기병의 수는 얼마 되지 않았던듯 싶습니다. 유금필이 급박한 상황에서 출전한 병력은 장사 80명이었습니다. 80명의 기병만을 대동하고 급히 신라로 달려갔던 것입니다. 물론 그뒤로 부장(관무,관헌등으로 추측)들을 시켜 뒤따라 오도록 하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80명의 기병으로 신검의 군대와 사탄에서 만나게 됩니다.
 
이때의 활약상이 유금필을 더욱더 빛나게 하지요. 자세한 글은 아래 고려사의 기록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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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고려사절요+고려사열전의 모든 기록들
 
1. 918년 7월
청주에 마군장군(馬軍將軍) 홍유(洪儒), 유금필(庾黔弼)등을 보내어 군사 1천5백 명을 거느리고 진주(鎭州 충북 진천)에 주둔하여 대비하게 하였다.
 
 
2. 920년 3월
북계(北界)의 골암진(鶻巖鎭)이 자주 북방 오랑캐에게 침략을 당하므로 여러 장수를 모아 말하기를, "지금 남방의 흉도(兇徒 백제)가 멸망되지 않았고 북방 오랑캐가 걱정스러우니 짐(朕)이 자나 깨나 근심이 된다. 유금필(庾黔弼)을 보내어 방어하게 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하였다. 모두 "좋습니다." 하므로 드디어 유금필에게 명하니, 그날로 개정(開定) 군대 3천 명을 인솔하고 출발하여 골암진의 동산(東山)에 큰 성을 축성하고 그곳에 거처하며 지키게 하였다.
 
 
3. 923년 4월
대광(大匡) 유금필(庾黔弼)이 북번(北蕃)의 추장 3백여 명을 소집하여 성대한 주연을 베풀어 주식을 많이 먹이고 그들이 추한 때를 포착하여 위협하니 추장들이 모두 복종하였다. 곧이어 사람들을 여러 부락에 파견하여 전달하기를 "이미 너희들의 추장이 복종했으니 너희들도 와서 복종하라."고 하였더니 여러 부락에서 서로 이끌고 와서 귀부(歸附)한 자가 1천 5백명이었으며, 포로되었던 고려 사람 3천여명을 돌려 보내었다. 이때로부터 북방이 평안하게 되었으므로 태조는 그에게 특별한 표창을 주었다.
 
 
4. 925년 10월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유금필(庾금弼)을 보내어 백제의 연산진(燕山鎭 충북 문의)을 쳐서 장군 길환(吉奐)을 죽이고  또 임존군(任存郡 충남 예산)을 쳐서 3천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5. 925년 10월
태조가 조물군(曹物郡)에 행차하여 견훤을 만나 싸웠으나 견훤의 군사가 매우 날래어서 승부를 결단치 못하였다. 태조는 지구전을 펼쳐 견훤의 군사를 피로하게 하려고 하는데, 유금필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회전(會戰)하여 병세(兵勢)가 크게 떨치니 견훤이 두려워하여 화친하기를 청하여 외생(外甥) 진호(眞虎)를 볼모로 보내니 태조도 또한 당제(堂弟) 왕신(王信)을 볼모로 보내었다. 태조는 견훤의 나이가 10년이나 위이므로 그를 상부(尙父)라 일컬었다. 태조가 견훤을 군영(軍營)에 오게 하여 일을 의논하려고 하니 유금필이 간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알기 어렵사오니 어찌 가벼이 적(敵)과 서로 가까이 하겠습니까"하므로 태조가 그만 두었다. 신라왕이 이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견훤은 반복(反復)하여 거짓이 많으므로 화친할 수 없습니다”하니, 태조는 그 말을 옳게 여겼다.
 

6. 928년 7월
태조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삼년성(三年城 충남 보은)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청주(靑州)로 후퇴하였는데 백제 장수 김훤(金萱), 애식(哀式), 한장(漢丈)등이 3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쫒아와 청주(靑州)를 침공하였다. 이때 유금필(庾금弼)은 명을 받들고 탕정군(湯井郡)에 성을 쌓고 있었는데, 하루는 유금필이 탕정군 남산(南山)에 올라가 앉아서 졸고 있었는데 꿈에 한 대인(大人)이 말하기를, “내일 서원(西原)에서 변란이 있을 것이니 빨리 가라”고 하였다. 유금필은 놀라 깬 후 그 길로 청주로 가서 적군과 싸워 격파하고 독기진(禿岐鎭)까지 추격하였는데 죽이고 부상당한 포로가 3백여 명이었다. 중원부(中原府)에 달려가서 태조를 보고 전투 정형을 자세히 보고하였더니 태조가 말하기를 “동수 싸움에서 신숭겸과 김락 두 명장이 전사하였으므로 국가를 위하여 깊이 근심하였더니 지금 그대의 말을 듣고 짐의 마음이 적이 안심되었다.” 라고 하였다.
 
 
 
7. 929년 12월
견훤이 고창군(古昌郡 경북 안동)을 포위하였으므로 태조가 가서 이를 구원하려고 예안진(禮安鎭)에 이르러 여러 장수와 의논하기를,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면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하니, 대상(大相) 공훤(公萱)과 홍유(洪儒)가 아뢰기를, “만약 우리가 이기지 못하면 죽령(竹嶺) 길로 돌아 올수 없게 될 것이니 빠져 나갈 길을 사전에 수리하여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하였다. 유금필(庾금弼)은 아뢰기를, “신(臣)이 듣자옵건대, "무기는 흉악한 도구요, 전투는 위험한 일이라 하니, 죽자는 결심을 가지고 살려는 계책을 생각하지 않은 연후에 비로소 승리할수 있다"고 하는데, 지금 적군 앞에 나아가 싸워보지도 않고 먼저 패배할 것을 염려함은 무슨 까닭입니까. 만약 급히 구원하지 않으면 고창군의 3천여 명을 고스란히 적에게 주는 것이니 어찌 원통하지 않습니까. 신은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기를 원합니다.” 하니, 태조가 그 말에 따랐다. 유금필이 이에 저수봉(猪首峰)으로부터 분격(돌격)하여 적을 크게 대파하였다. 태조가 고창군에 들어가서 유금필에게 이르기를, “오늘의 승전은 경(卿)의 힘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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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931년 3월
유금필(庾금弼)이 참소를 입어 곡도(鵠島)로 귀양갔다.
 
 
9. 932년 10월
백제의 해군장(海軍將) 상애(尙哀) 등이 대우도(大牛島)를 공격하여 약탈하였으므로 태조가 대광(大匡) 만세(萬歲) 등을 보내어 이를 구원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니 태조가 이를 근심하였다. 유금필(庾금弼)이 곡도(鵠島)에서 서신을 올리기를, “신이 비록 죄를 짓고 귀양 중에 있사오나 백제가 우리의 해변 고을을 침공했다는 말을 듣고 신이 이미 곡도와 포을도(包乙島)의 장정들을 선발하여 군대를 편성하고 또 전함도 수리하여 이를 막으려고 하오니 성상께서는 근심하지 마시기를 원합니다”하였다. 태조가 서신을 보고 울면서 이르기를, “참소를 믿고 어진 사람을 쫓은 것은 짐의 불찰이다.” 하고, 사자를 보내어 그를 소환하고 위로하기를, “경(卿)은 실상 죄가 없는데도 귀양간 것을 일찍이 원망하지 않고 오직 나라를 도울 것만 생각하고 있으니 짐이 매우 부끄럽고 뉘우치는 바이다. 장차 자손들에게까지 상(賞)을 미치게하여 경의 충성과 절의에 보답하겠다” 하였다.
 
 
10. 933년 5월
유금필(庾금弼)이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에 임명되어 의주부(義州府)를 지키는데 태조가 사자를 보내어 이르기를, “짐은 신라가 백제에게 침략 당함을 염려하여 일찌기 대광 능장(能丈),영주(英周),열궁(烈弓),공희(公希)들을 파견하여 진수하게 하였는데, 백제 군대가 벌써 혜산성, 아불진(阿弗鎭) 등지에 이르러 사람과 재물을 약탈한다고 하니, 만약 신라의 국도(國都)에까지 침범될까 우려된다. 경이 마땅히 가서 구원하라."고 하였다. 이에 유금필은 장사(壯士) 80명을 가려 뽑아 달려갔다. 사탄에 이르렀을 때 사졸(士卒)에게 말하기를, “만약 이 곳에서 적을 만난다면 나는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지 아니할 것이다. 다만 너희들이 함께 칼날에 죽을 것이 염려되니 그대들은 각자가 살 도리를 잘 강구하라” 하니, 사졸들이 말하기를, “우리 무리들이 모두 죽었으면 죽었지 어찌 장군만 홀로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게 하겠습니까” 하고, 서로 힘을 다하여 적을 치기로 맹세하였다. 사탄을 건너자 백제의 통군(統軍) 신검(神劒) 등과 맞딱뜨렸다. 유금필등이 싸우려 하였으나, 백제 군대는 유금필군의 대오가 정예로운 것을 보고 싸우지도 않고 스스로 흩어져 도망쳤다. 유금필이 신라에 이르니, 늙은이나 어린이나 할 것 없이 성 밖에 나와서 맞이하여 절하고 울면서 말하기를, “오늘날에 대광(大匡)을 뵈올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대광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모두 백제군에게 죽음을 당했을 것입니다” 하였다. 유금필이 그 곳에서 머물은 지 7일만에 돌아오는 길에 신검(神劒)을 자도(子道)에서 만나 싸워서 크게 이겨, 적장 금달(今達), 환궁(奐弓) 등 7명을 생포하였으며 적을 죽이고 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승전보고가 이르니, 태조가 몹시 놀라고 기뻐하면서, “나의 장군(我將軍)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같이 이길 수 있으랴” 하였다. 유금필이 들어와서 뵈오니 태조가 궁전에서 내려와 그를 맞이하여 손을 잡고 이르기를, “경(卿)의 공로는 옛날에도 또한 드물었던 것이다. 짐(朕)의 마음에 새기고 있으니 이를 잊는다고 이르지 말라” 하였다. 유금필이 사례하여 아뢰기를, “국난을 당하여 자기 일신을 생각지 않으며 위급에 직면하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신하된 자의 직분이거늘 성상(聖上)께서 어떻게 이같이 하십니까” 하니, 태조가 더욱 그를 소중하게 여겼다.
 
 
11. 934년 9월
태조가 친히 운주(運州 충남 홍성)를 정벌하려고 유금필을 우장군으로 임명하여 진군하니,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갑사(甲士) 5천 명을 선발하여 거느리고 와서 말하기를 “양군이 서로 싸우면 양편이 다 온전하지 못할 형세이니 병졸이 살상(殺傷)을 많이 당할까 염려되니 마땅히 화친을 맺어 각기 국경(國境)을 보전하는것이 마땅하겠소”라고 하였으므로 태조가 여러 장수를 모아 의논하니 유금필(庾금弼)이 아뢰기를 “오늘의 형세는 싸우지 않을 수 없사오니 원컨대 성상께서는 신들이 적군을 격파하는 것만 보시고 근심하지 마소서” 하였다. 저 편에서 미처 진을 치기 전에 강한 기병(騎兵) 수천 명을 거느리고 돌격하여 적병 3천여 명의 목을 베고 , 술사(術士) 종훈(宗訓)과 의사(醫師) 훈겸(訓謙)과 용맹한 장수 상달(尙達), 최필(崔弼)을 사로잡으니 , 웅진(熊津) 이북의 30여 성(城)이 소문을 듣고 스스로 항복하였다.
 
 
12. 935년 4월
태조가 여러 장수에게 이르기를 , “나주(羅州)의 40여 군(郡)이 우리의 울타리가 되어 오랫동안 풍화(風化)에 복종하였다. 일찍이 대상(大相) 견서(堅書), 권직(權直), 인일(仁壹) 등을 파견하여 안무하였는데, 근자에는 백제에게 침략되어 6년 동안이나 바닷길이 통하지 않았으니 누가 능히 나를 위하여 이 곳을 진무(鎭撫)하겠는가” 하니, 홍유(洪儒),박술희(朴述熙)등이 말하기를“제가 비록 용맹하지는 못하나 장수의 한 사람으로 보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대체로 장수로 되려면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귀중하다”라고 하였다. 공훤(公萱), 대광 제궁(悌弓)등이 아뢰기를 “유금필이 적임자입니다”라고 하니 태조가 이르기를"짐도 역시 이를 생각해 보았으나 그러나 요사이 신라로 가는 길이 막혔던 것을 유금필이 이를 통하게 하였으니 그의 노고(勞苦)를 생각하니 다시 명하기가 어렵다” 고 하였다. 유금필이 아뢰기를 , “신이 비록 아니 이미 노쇠(老衰)했사오나 이것은 국가의 큰 일이오니 감히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태조가 기뻐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이르기를 , “경이 만약 명을 받든다면 어찌 이보다 더 기쁨이 있으랴” 하고, 유금필을 도통대장군(都統大將軍)으로 임명하고 예성강(禮成江)까지 전송하고 어선(御船)을 주어 보내었다. 태조는 3일간 그대로 체류하면서 유금필이 바다에 나갈 때까지 기다려서 환궁하였다. 유금필이 나주(羅州)에 가서 경략(經略)하고 돌아오니, 태조가 또 예성강까지 행차하여 맞아 위로하였다.
 
 
13. 935년 6월
견훤이 막내 아들 능예(能乂)와 여자 나인(內人) 애복(哀福)과 애첩 고비(姑比)등과 함께 나주(羅州)로 도망 나와서 고려에 들어와 붙어살기를 청하므로 장군 유금필과 대광(大匡) 만세(萬歲)와 원보(元甫) 향예(香乂)와 오담(吳淡),능선(能宣),충질(忠質) 등을 보내어 바닷길로 그들을 맞이하였다.
 
 
14. 936년 9월
일리천 전투에서 대상(大相) 유금필은 원윤(元尹) 관무(官茂),관헌(官憲)등을 부장으로 삼아 흑수(黑水),달고(達姑),철륵(鐵肋) 등 제번(諸蕃)의 강한 기병(騎兵) 9천 5백명을 거느리고 중군장(中軍將)으로 출전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15. 941년 4월
대광(大匡) 유금필이 졸 하였다. 유금필은 평주(平州) 사람이다. 장수의 지략(智略)이 있어 태조를 섬겼으며 병사들에게서 신망을 얻었다. 출정할때마다 명을 받으면 즉시 출발하였으며, 집에 들려서 자고 간 적이 없었다. 매양 개선(凱旋)할 적마다 태조가 반드시 마중나가 위로하여 주었으며, 시종토록 다른 장수들은 받지 못하는 은총(恩寵)으로 대우하였다. 시호를 충절(忠節)이라 하였으며 성종 13년에 태사 벼슬을 추증하고 태조 묘정(廟廷)에 배향(配享)하였다. 아들은 유긍(庾兢), 유관유(庾官儒), 유경(庾慶)이고, 딸은 태조의 제9비인 동양원부인(東陽院夫人)이다.

 
 
출처 : 동북아역사지킴이  |  글쓴이 : 카페지기 
http://blog.daum.net/uyj6477
 
 
★위키백과에서 발췌한 유금필 장군의 의의와 평가
 
고려사를 보면 유금필은 패한 경우의 기록이 없다. 유금필은 육전만이 아니라 해전에서도 큰 공을 세웠을 정도로 모든 전선에서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유금필은 대부분 무모하다 싶은 전투를 홀로 치루었으며, 군사들을 사지에 몰아넣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탄전투와 같이 그를 따르는
군사들은 자신의 목숨을 아깝지 않아했으며, 유금필을 깊이 신뢰한 것으로 보인다. 즉 승리를 확신하였기에 그런 무모한 행동이 나왔다고 보인다. 유금필의 이와 같은 용맹은 훗날 또다른 맹장이 이어받는다. 바로 척준경이다. 하는 전투마다 피하는걸 마다하지 않으며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적을 업신여기지도 않으며 주군을 위해 또는 나라를 위해 몸받쳐 싸운게 공통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고려 역사서를 통한 유금필의 전적 간략히 보기
 
920년 오랑캐의 침입을 3000명으로 물리치고 연회를 열어 술에취하게 한후 추장 300인을 복종시킴
 
925년 후백제의 연산진을 공격하여 길환을 죽임

925년 임존성을 공격하여 3000명 살획

925년 불리한 상황에 처한 왕건의 조물군 전투에서 지원군을 보내어 위기에서 구함
 
928년 후백제가 왕건(태조)를 공격하자 군사를 내어 쳐부수고 독기진까지 추격하여 300명 살획

929년 견훤이 고창군을 포위하자 저수봉으로부터 돌격하여 적을 크게 대파

932년 후백제 상애등이 대우도를 공격하자 귀양지에서 장정들을 모아 물리침

933년 장사 80명의 결사대로 후백제의 신검등을 크게 물리치고 금달,환궁등 7명의 장수를 사로잡음

934년 운주에서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수천명으로 선봉에 서서 3000명을 살획하고 종훈,훈겸,상달,최필을 사로잡음
 
935년 나주가 후백제의 공격을 받자 이를 물리침 
 
936년 후백제와 일리천 전투에서 왕건과 투항한 견훤과 함께 대승을 거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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