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외할머니께서 생신이시라 시골에 잠시 내려갔다 오게 되었다.
일찍 가봐야 가서 달래나 털 것이기에 차라리 늦게 갔다 일찍 오자 싶어
내려가서도 한참 길거리를 헤메고 다녔다.
그러다가 길을 잃어 같은 장소를 다섯 번 정도 가기도 했다.
더위는 내 머리위로 내려 점점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그 날은 마침 화장품 가게가 세일을 하고 있었더란다.
세일 아닌 날이 없을 정도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러다가는 더위에 쪄죽는 게 내가 되겠다 싶어 잠시나마 피신을 해보기로 했다.
들어가자 마자 화장품 냄새가 훅 더운 바람처럼 불어왔다.
립스틱이 반값이었다. 혹시 꽃 냄새 과일 냄새라도 실려올까 싶어 고개를 박았지만
무거운 갖가지 화장품 냄새는 밀려나지도 않았다. 이름만 보고 '붸리오뤤지'를 골랐다.
진한 다홍빛깔의 립스틱이었다.
원래 화장을 잘 하는 편이 아니라서 입술은 늘 무던하게
본 입술 색에서 많이 변하지 않는 선이었던 내게 이 립스틱은 굉장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그 날은 더위에 미쳐있었던 바 결제를 하고 밖으로 나와
작은 시골 터미널의 복잡한 화장실 세면대에서 입술을 바르다가 퍼뜩
쥐는 안 잡아먹었을지언정 색소가 잔뜩 들은 아이스크림 세 마리쯤은 잡아먹은 듯한
입술을 보았다.
마침 잘 지워지지도 않는 끈적한 립스틱이었다.
난 애써 당당한 걸음으로 외할머니댁에 가는 버스를 탔지만
이십분 거리를 한시간 반쯤 돌아서 가는 버스에 타고 말았다.
머리카락이 육포라도 되는 양 잘근잘근 씹으며 자고 일어나니 정류장을 지나쳐 있어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내게 거기 고대로 있다가 다음 버스를 타고 다시 오라고 했다.
나는 그마저도 틀려서 한 두시간 쯤 있다가 집에 도착할 지도 모른다고 했다.
데리러 오겠다는 소리가 한숨에 섞여 승리 팡파레처럼 들려왔다.
단란주점과 어두침침한 이용원의 사이 별다방 간판 밑에서 기다리기를 십여분
엄마가 운전하는 애마의 옆자리에 낑겨 탈 수 있었다.
내 입술을 빤히 쳐다보던 엄마는 내게 새로 샀느냐며 물었다.
나는 예쁘냐고 되물었고
엄마는 그렇게 해서라도.. 라며 말끝을 흐리다가
너는 젊으니까 그런 색이 어울린다. 라고 말을 바꿔주셨다.
출처 |
2015. 06. 13(토)
충남 서산시 운산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