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9월 8일 정오 무렵 북한군 주렵부대가 또 다시 영천시내에 진입했다. 정일권 총참모장에게 유재홍 2군단장이 직접 전화를 해왔다.
무척 침통해하는 목소리였다. 적군은 전차 12대를 앞세운 강력한 보전협동부대였다고 전했다.
정 총참모장은 비를 무릅쓰고 유 군단장을 만나기 위해 군단 사령부가 있는 하양으로 차를 몰았다.
그러나 유 군단장은 전방에 나가 있었다. 다시 차를 몰았다. 연대 지휘소는 영천을 굽어보는 언덕에 있었다.
"지금 내 머릿속에는 전차밖에 없습니다. 단 한 대라도 좋으니 우리 병사들에게 우리한테도 전차가 있다하고 보여주고만 싶습니다."
유 군단장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정 참모장에게 말했는데 그 말은 통분의 고함소리로 들렸다고 정일권 총참모장은 회고했다.
며칠 사이에 몰라보게 야윈 유 군단장의 옆 얼굴에 눈물 한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6.25남침 전쟁 중 야전에서 우리 군 지휘관 모두가 겪어야 했던 공통된 어려움과 그로 인한 아픔의 통곡을 소리없이 삼키고 있는 것이었다.
"실은 어제의 일인데..." 라며 다시 말문을 연 유 군단장은 참다못해 부대 좌측에 인접한 미 1기병사단장을 찾아갔다고 했다.
비 때문에 공군 지원을 받지 못하는 고충을 서로 나눈 뒤 "게이 장군! 귀 사단의 전차 1개 소개(5대)를 이틀간만 빌릴 수 없겠습니까?"하고는
조심스럽게 용건을 꺼냈다고 한다.
낯 뜨거운 일이었지만 장병의 사기진작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고 창피를 무릅써야 했다.
당시 미 8군은 전차 약 600여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사단마다 약 100여 대는 될 것으로 봐서
1개 소대의 5대쯤은 결코 무리한 부탁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게이 사단장은 "모처럼의 부탁이나 아시다시피 이쪽도 고전을 겪고 있는 중이라서....."하고 얼버무리는 말투로 거절했다면서
유 군단장은 여기까지 얘기하고 나서 씁쓸히 웃어 보였다.
"정말 내 처지가 말이 아니구나 하고 서글퍼지더군요. 명색이 군단장이면서 전차 5대를 구걸하다가 거절당했으니 말입니다..."하고는 말끝을
흐리며 한숨과 함께 시선을 멀리 던졌다.
이후 미 8군사령관 워커중장이 미 1기병사단 전차 1개 소대를 지원해주었지만 전차 구걸은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 아픈 전장 비화가
아닐 수 없다.
-정일권 회고록 pp. 228~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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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전차 한대도 없이 북한국과 맞서 싸워야했던 선배전우님들....
이 글을 보니 숙연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