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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ID : history_10314 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내셔널헬쓰 ★
추천 : 16/ 10
조회수 : 1642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3/06/23 19:07:39
(서울=연합뉴스) 황윤정 기자 = 1902년 대한제국과 러시아가 간도(間島) 지역에 대한 공동 통치를 규정하는 특별 협약안을 작성했다는 기록이 발견됐다. 러시아의 저명한 동방학자 H.B.뀨네르(1877-1955)의 저서 '한국개관'에 따르면 대한제국과 러시아는 1902년 간도 지역에 대한 공동 통치 특별 협약안을 작성했다. 뀨네르는 1908년 편찬된 '간도문제'(間島問題)라는 책을 인용해 "러시아 정부는 한국에 파견된 자국의 공사 베베르를 통해 이 문제(간도 문제)에서 한국 정부를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간도 지역에 대한 한국과 러시아의 공동 통치를 규정하는 특별 협약안이 1902년 이미 양국 정부 간에 작성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고 기술했다. '간도문제'는 중국의 혁명가 쑹자오런 (宋敎仁.1882-1913)의 저서로 추정된다. 러시아가 1902년 당시 대한제국과 간도 지역에 대한 공동 통치 협약안을 작성했다는 것은 국제법상으로 간도가 한국 땅임을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어 주목된다. 동북아역사재단 김영수 연구위원은 "러시아가 청나라와 일본을 배제하고 한국과 간도를 공동 통치하려 했다는 것은 한국의 간도 영유권을 인정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대한제국과 러시아가 간도 공동통치협약안을 작성했다는 1902년은 대한제국이 이범윤을 간도시찰사로 파견하는 등 간도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 노력하던 시기였다. 뀨네르는 간도 영유권 분쟁의 불씨가 된 백두산정계비 의 '토문(土門)'에 관한 조선과 청나라 간 해석 논쟁도 객관적인 시각에서 조명했다. 조선과 청은 1712년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 압록강 과 토문강 을 경계로 삼는다'(西爲鴨綠 東爲土門)고 합의했으나, 이후 토문강이 어디인가를 두고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중국 측은 토문강이 두만강의 다른 이름이라고 주장해왔으며 조선은 송화강 지류라고 맞서왔다. 김 연구위원은 "뀨네르는 (토문강이 두만강인지 송화강 지류인지)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한국 측에 굉장히 유리하게 이 문제를 기술했다"면서 "한국과 중국 양쪽의 논리를 살펴본 결과 한국 측의 논리가 더 타당하고 설득력 있다고 봤다"고 말했다. 뀨네르에 따르면 1881년 무렵 함경도 관리가 간도 지역 토지 이용에 관한 서류를 발급했으며, 1880년 중반 이후 중국이 간도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한국 이주민 수는 오히려 증가했다. 1909년 일본의 간도파출소가 한 주민조사에 따르면 간도지역 한국 이주민의 수는 8만2천999명으로, 중국인 거주자(2만7천371명)의 세 배가 넘었다. 뀨네르는 레닌그라드대(현 상트 페테르부르크대학) 교수 등을 지낸 저명한 학자로, 1910년 강제 병합 이후 조선의 경제적 변화상과 지리 정보를 집대성한 저서 '한국개관'을 1912년에 펴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최근 '한국개관'을 발간 100년 만에 한국어로 번역 출간했다. 김 연구위원은 '한국개관'의 주요 내용을 분석한 연구논문 '한국개관에 나타난 한국 영토영해 및 사료적 근거'를 학술지 '사림'에 발표할 예정이다. [email protected]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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