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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의 한 #2 나와 동생을 살려준 여인
게시물ID : panic_10306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철마행자
추천 : 42
조회수 : 4099회
댓글수 : 14개
등록시간 : 2023/04/11 14:4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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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써놨던 이야기가 있어 약간의 편집만을 한 채로 올려 봅니다.
이번 에피는 두가지 이야기입니다. (내용이 짧막하네요.^^;;)

1.     동생을 살려준 아줌마

제 어릴 때 기억의 조각을 하나 이야기 하겠습니다.

전편에 말씀 드린 그 일 이후 부모님께서는 서울 SR동에 터를 잡으셨습니다. 그 뒤 제가 세 살 무렵일 때, 제 여동생이 태어났습니다.

 

아버님은 장거리 트럭 운전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먼 지방에 가시면 집에 오시지 못하는 일이 종종 많았습니다. 물론 저는 당시의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한가지기억에 남는 일이 있습니다.

 

아버님께서 지방에 가시고 폭설로 집에 오지 못하신 날. 제 여동생이 태어났습니다. 외할머니께서 집에 와 계셨던 기억은 납니다. 그날 제 기억엔 없는 일이지만, 당시 제 여동생은 미숙아로 태어났습니다. 42년 전정말로 가난했었습니다. 요즘이야 인큐베이터에서 아이들을 케어 한다고 하지만, 그 때는 꿈만 같은 일이었습니다.

 외할머니 표현을 빌리자면, 그냥 물 빠진 고목 같은 어린 것 을 안고 어머니는 울면서 집으로 오셨다고 합니다.

 첫 아이를 잃어서 더욱 아이에 대한 미안함이 크셨다고 합니다. ‘다 내 탓인가 보다.’ 하시면서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그저 아이를 안고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7일간을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하던 어린 생명의 불꽃이 꺼져 가던 그날 밤.

제 기억은 당시 그날 밤만을 기억합니다. 말도 잘 못하던 제가 잠에서 깨어 그 좁은 단칸방을 두리번대니 동생 옆에 어느 아주머니가 앉아 동생을 쓰다듬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이 기억은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합니다. 몸에서 빛을 발산하며, 온화하고 다정한 미소를 짓던 그 아주머니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커서 들으니, 갑자기 동생의 몸이 호전되어 아침부터 심하게 울었던 날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날부터 동생은 건강을 되찾았고, 소아과 병원에서도 기적 같은 일이라고 할뿐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2005년 동생이 결혼을 앞 둔 어느날이 었습니다.  여느때처럼 어머니는 동생의 아기시절을 이야기 하고 계셨습니다. 매제도 동생도 심지어 무뚝뚝하신 아버지도 어머니의 그 이야기를 들으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을 때쯤. 저는 불현듯 제가 그때 본 그 아주머니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냥 갑자기 머릿속에 확 스친 기 기억들을 가족들 앞에서 꺼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갑자기 엉엉 우시면서전편에 제가 말씀 드린 그 이야기를 저희 두 남매에게 처음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나타나 제 동생을 살렸구나그래서, 다 죽어가던 그 어린 것이 살아났구나 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던 동생도 어머니와 부퉁켜 안고 엉엉 울었습니다. 아버지도 고개를 돌리시곤 눈시울을 훔치셨고요.

그 뒤 동생은 결혼해서 정말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은 그 날 이후로 어머니는 제 동생의 생일이 5일 지난 날에 그 여인을 위해 조촐한 제사를 모시고 있습니다. 저의 두 남매도 그날만큼은 만사 제쳐두고 그 제사에 꼭 참석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그 분께 감사하는 마음을 다 담아서 말입니다.

 

 

 

2.    나를 살려준 아줌마

이 일은 정말 제가 죽을 뻔 했던 일이었습니다.
SR동에서 살다가 부지런히 돈을 모아 부모님은 당시 AY시에 있는 아파트를 분양받아 입주하였습니다. AY시의 그 동네는 정말로 골목이 좁은 동네였습니다. 지금이야 천지가 개벽을 하고 상전이 벽해 되어 그 시절 그 동네를 추억하기가 힘들 정도로 변모했지만, 예전엔 차 한대 다니기도 좁은 골목길을 중심으로 수많은 연립주택이 들어섰던 동네였어요.

정말로 개구장이였던 저는 장난이 심했습니다.
한번은 어머니와 시장에 가다 주차된 트럭 밑에 숨었다가 어머니께 길거리에서 정말 비오는날 먼지 털 듯 맞은적도 있었고요.

아시는 분 댁에 놀러갔다가 높은 담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진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 저 때문에 어머니는 길을 갈 때마다 어린 동생을 업고 제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던 제가 7살 때 였습니다. 그날 집 앞 골목길을 따라 시장을 향해 걷던 중, 동네에 사시는 호랑이 할아버지가 제가 어머니와 걷던 길 반대쪽 복덕방에서 장기를 두고 계셨습니다. 호랑이 할아버지라는 별명처럼 성격이 괄괄한 분이시지만, 동네 꼬맹이들에게는 한없이 좋은 할아버지셨습니다.

길에서 만나 넙죽 인사를 하면,

요놈흐흐흐 사탕 하나 받아라.”

하시면서 그 달콤한 눈깔사탕을 주머니에서 꺼내 하나씩 쥐어 주시던 다정한 할아버지셨죠.

그 할아버지가 길 건너에서 장기를 두고 계시는 모습을 보자, 저도 모르게 사탕을 하나 얻어 먹으려고 어머니께서 잡은 손을 슬그머니 빼고는 반대쪽으로 냅다 달렸습니다. 그 순간.

끼이이이이익하는 소리가 들렸고.,

세상의 시간이 멈춘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아찔합니다. 다만, 그때는 어려서 좀 둔했던 것 같네요.

제가 오른쪽을 보자 포니 픽업 트럭(나중에 알게 되었지만요…)이 제 바로 옆에 서 있었습니다.

놀란 운전기사 아저씨가 차에서 나와 저를 보고 멍하니 있었고,

복덕방에 계시던 할아버지들이 제 쪽으로 다들 뛰어 나오셨습니다.

제 기억에 없지만, 당시 어머니는 제가 차에 치인 줄 알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 앉으셨다고 하네요.

특히 호랑이 할아버지는 그 운전기사의 멱살을 잡고는

야 이놈아!!! 애들 다니는 이 골목길에서 차를 그리 쌩쌩 몰고 다니면 어쩌냐?”

하며 엄청 화를 내셨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를 연거푸 말하며 당황해 하던 아저씨.

요즘이야 그런 풍경을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제가 어릴때만 해도 어른들께 함부로 대드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저는 결국 그날 어머니께 정말 엄청나게 혼나고 두들겨 맞았습니다.

자식을 키우는 지금에서야 당시 어머니께서 어떤 마음이실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그때 그 아저씨가 한 한마디 때문에 이 이야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호랑이 할아버지께 멱살을 잡히고 동네 어른들께 혼찌검이 나던 그 아저씨가

저를 계속 쳐다보면서

이상하다. 저는 애는 못 봤고요. 어떤 아줌마가 갑자기 차로 뛰어들어 차를 멈췄어요.이상하다할아버님, 혹시 여기 파란 치마 자고리 입으신 여성분 안 계셨어요?”

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7살때의 일이라 왜곡된 기억이 들어올 일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그 골목길 주변에 여성이라고는 주저앉아 통곡을 하던 어머니가 다였고.,

그런 기사님에게 호랑이 할아버지는 무슨 소리하냐면서 호통을 쳤습니다.

그렇게 한참 사과를 하고 그 기사님은 가던 길을 다시 가셨고, 어머니는 겨우 진정을 하시고는 저를 데리고 집으로 가셨죠.

재개발이 되어 지금 그 골목길은 사라졌지만, 가끔 본가에 갈 일이 있을 때 그 골목길과 복덕방이 있던 자리 옆의 도로를 갈 때면 그 이야기를 아내와 아이들에게 합니다.

그러면 큰 애가 꼭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아빠. 한번 더 이야기하면 백번째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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