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농민운동이란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조선 고종 31년(1894년)에 동학교도 전봉준이 중신이 되어 일으킨
반봉건 , 반외세 운동입니다~
지금부터,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해보겠습니다!
1860년 최제우에 의해 동학이 창시된 후 평등사상을 바탕으로 봉건사회를 반대하고 서학과 왜를 배척하는 반외세사상을 주장하면서
조선사회에 그 교세가 확산됩니다.
이에, 조선의 탄압은 계속 되었죠.
그러나~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에 의해 동학이 농민 대중에게 더욱 확산하고 조직화 되면서 동학의 창시자였던 최제우에 대한 억울함을 해소하고 동학교도들에 대한 탄압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교조신원운동이 전개 됩니다.
그리고~ 교조신원운동이 계속되는 정부의 묵살과 더불어서 전라도 군수 조병갑의
불법착취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한 불만이 도화선이 되는데...
동학교도들은 1884년 1월 전봉준을 중심으로 전라도/충청도
일대 농민들이 모여 고부 관아를 습격한
고부민란을 일으켰습니다.
관아를 점령한 전봉준은~ 정부에 대해서...
조병갑의 횡포를 시정할 것과 외국 상인의 침투를 금지하라는 등
요구사항을 제시해
그 결과... 정부로부터 폐정을 시정하겠다는 약
개요
1894년은 우리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입니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누적된 정치, 경제, 사회 모순이 폭발하여 일어난 동학 농민 운동(갑오 농민 전쟁),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청.일 전쟁,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의 체제 개혁 강요로 촉발된 갑오개혁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복잡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입니다.
-배경
1880년대 중반 이후 청.일 상인들이 내륙 시장까지 진출하였습니다.
특히 일본 상인들은 상하이나 광저우에서 영국산 면제품을 수입하여 조선 상인들에게 팔고 미곡(쌀)을 대량으로 매입하였는데, 이것을 미면 교환 무역이라고 부릅니다. 이로 인해 곡식 값이 폭등하고, 면포 수입이 증가하여 농촌의 토착 수공업이 붕괴되었습니다. 일부 지방에서는 방곡령이 내려질 정도로 피해가 심각했습니다. 그 결과 농민들 사이에서는 일본의 경제 침탈에 대한 반감이 갈수록 커져 갔습니다.
이 무렵 정치 기강이 문란해져 지방관의 매관매직이 다시 성행하였습니다. 관직을 산 수령들이 가혹하게 농민들을 수탈하면서 다시 삼정이 문란해졌습니다. 동학 농민 운동의 발단이 되는 고부 민란이 탐관오리 조병갑 때문에 일어난 점도 이런 맥락에서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각지에서 전면적인 민란이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런 자연 발생적인 민란이 전면적인 농민 항쟁으로 발전하게 되는 과정에서 동학의 평등 사상과 교단 조직(포접제)이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동학의 1대 교주인 최제우가 '혹세무민' 의 죄로 처형당한 뒤 2대 교주 최시형은 교단 조직을 정비하고, 교리 (동경대전), (용담유사)를 정리하였습니다. 1890년 무렵 탐관오리의 수탈과 외세의 경제적 침투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던 삼남의 농민들 사이에 동학은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습니다.
동학 교도들은 1892년 삼례에 모여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달라는 교조 신원 운동을 벌였고, 이듬해 보은에서 집회를 열어 동학 교도에 대한 탄압 중지를 요구하였습니다. 보은 집회를 기점으로 동학은 교조 신원뿐 아니라 '탐관오리 처벌, 외세 축출' 등을 내세우는 정치 사회 운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전개 과정
동학 농민 운동의 발단은 고부 민란입니다. 고부 민란은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 때문에 우발적으로 일어난 민란입니다. 조병갑이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만들어 수세를 강제로 징수하자 농민들은 이에 항의했지만 받아들여 지지않자, 1월 18일 민란을 일으켜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군수를 내쫓고 만석보를 파괴하였습니다.
정부가 사태 수습을 위해서 조병갑을 파면하고, 박원명을 신임 군수로 임명하자 농민들은 자진하여 해산하였습니다. 그런데 민란을 조사하러 온 안핵사 이용태가 민란의 참가자와 주모자를 색출하여 가혹하게 처벌하자 농민들의 불만이 폭발하였습니다.
3월에 전봉준이 전라도의 동학 접주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려 봉기를 호소하자, 고부 백산에서 보국안민, 제폭구민을 기치로 호남 창의소를 조직하고 농민 봉기의 깃발을 높이 들게 됩니다. 이것이 이른바 3월 봉기(1차 봉기)입니다.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 동학인들이 백산 봉기를 주도하였는데, 이들은 남접(전라도 동학 조직) 계통입니다. 그러나 참여자들은 대부분 일반 농민들이었습니다. 이 농민 봉기는 삽시간에 전라도 전역으로 확산되어 전라도 수십 개 군현이 농민군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농민군은 4월 7일 황토현에서 전라도 감영의 군대를 물리치고, 4월 23일 장성 황룡촌에서 양호초토사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을 격파하였습니다. 그리고 4월 27일에는 전주성에 입성하였습니다. 사태가 확대되자 민씨 정권은 청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청나라 군대가 5월 5일 아산만에 상륙하자, 일본군도 톈진 조약을 구실로 인천에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켰습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직면한 농민군은 외세의 개입으로 사태가 악화될 것을 우려하여, 5월 8일 관군과 전주화약을 맺고 스스로 해산하였습니다. 이 때 농민들은 정부에 '폐정 개혁 12개조'를 제시하였습니다. 이 개혁안에는 '탐관오리와 악덕 지주 처벌, 봉건적인 신분 차별 폐지' 등이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농민군은 전라도 53개 지역에 집강소라고 하는 농민 자치 조직을 설치하여,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면서 자신들이 내세운 폐정 개혁안을 실천하였습니다.
한편, 민씨 정권은 농민군과의 국정 개혁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6월 11일 교정청이라는 개혁 기구를 설치하였습니다. 만약 교정청 주도로 자주적 개혁이 추진된다면 일본은 군대를 주둔시킬 명분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6월 21일 새벽에 일본군 3,000명을 동원해 경복궁을 포위하고, 국왕과 왕비, 왕세자를 인질로 잡고 정부군을 무장 해제 시켰습니다. 이걸을 '경복궁 쿠데타' 또는 '경복궁 점령 사건' 이라고 합니다.
청나라가 강력하게 항의하자 일본은 아산만에서 북양 함대를 기습 공격하였습니다(6월 23일 풍도 해전). 이후 일본군은 평양 전투(8월)와 해양도해전(8월)에서 연달아 청군을 격파하였습니다. 결국 청.일 전쟁은 8개월 뒤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뒤에서 다시 공부하겠지만, 청.일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조선을 보호국화하기 위해 조선 정부에 내정 개혁을 요구하였습니다. 이것이 '갑오개혁' 의 시작입니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내정 간섭이 자행되고, 일본군이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남하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농민군은 9월에 삼례에서 2차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2차 봉기(9월 봉기)는 3월 봉기(반봉건)와는 달리 반침략 항일 구국 봉기의 성격을 띠었습니다. 삽시간에 수만 명의 농민군이 결집하였고, 그동안 봉기에 참여하지 않았던 북접(충청도 지역의 교단)도 참여하였습니다. 농민군은 논산에서 남북접이 함세하여 북상하였는데,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 부대와 대치하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1주일간 50여 회의 공방전 끝에 우세한 무기를 가진 일본군에게 크게 패하였습니다. 우금치 전투의 패배로 사실상 농민 항쟁은 막을 내렸습니다. 이후 농민군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당했고, 일본군과 관군 및 민보군은 농민군 잔당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습니다.
-성격
동학 농민 운동은 농민들이 동학이라는 신흥 종교 조직을 이용하여 조선 사회를 변혁하고 외세 침략에 맞서려고 했던 반봉건, 반외세적 민중 운동이었습니다. 비록 농민들의 봉기는 일본군과 관군에게 진압되었지만, 그들의 개혁 요구는 이후 갑오개혁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일부 농민군 출신들은 이후 항일 의병 투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함으로써, 반침략 항일 투쟁의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②. 갑오.을미개혁
-개요
1894년 갑오(甲午)년, 1895년은 을미(乙美)년입니다. 그래서 1896년 2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할 때까지 1년 6개월 동안 추진된 정부 주도의 근대적 개혁을 갑오.을미개혁이라고 부릅니다. 갑오.을미개혁은 크게 봤을 때 기존의 낡은 봉건 질서를 무너뜨린 근대적 개혁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일본의 간섭을 받았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1차 갑오개혁(1894. 6~1894. 11)
조선 정부는 국정 개혁을 자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교정청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경복궁 쿠데타를 일으켜 김홍집을 총리대신으로 하는 개화파 정권을 수립하는 한편, 청.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졌습니다. 개화파 정권은 대원군을 섭정에 추대하였으나 실질적인 권한은 김홍집 등 개화파가 주도하는 초정부적인 회의 기구인 군국기무처에 집중시켰습니다. 군국기무처는 총리대신 김홍집을 총재관으로 하여 박정양, 김윤식, 안경수, 유길준 등 17명이 위원으로 참여하였습니다.
그해 11월까지 5개월 동안 약 210건의 개혁안을 제정하고 실시하였습니다. 이를 제1차 갑오개혁이라고 부릅니다.
먼저 정치 분야를 보겠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왕실 사무와 정부 사무를 분리한다는 것입니다. 궁내부를 설치하여 왕실의 정치 개입을 배제하고 권력을 의정부에 집중시켰습니다. 이것은 왕권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입니다. 또 과거제를 폐지하고, 6조를 8아문으로 개편하였습니다. 또 내무아문 산하에 경무청이라는 강력한 경찰 기관을 설치하였습니다. 청과의 사대 관계를 단절하기 위해 개국 연호를 사용하도록 하였습니다. 경제 분야에서는 조세의 금납화, 탁지아문으로의 재정의 일원화, 은본위 화폐 제도 채택 등이 주요한 내용입니다. 또 방곡령의 반포를 금지시키고, 일본 화폐의 유통을 허용하였습니다.
사회 분야에서는 신분 제도와 노비 제도를 철폐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문, 연좌제, 조혼, 청상 과부의 개가 금지 등의 봉건적인 악습이 폐지되었습니다.
제1차 갑오개혁은 비록 일본의 강요로 시작되었지만, 일본은 당시 청.일 전쟁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 적극 간섭할 여건이 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실제 개혁은 갑신정변의 정강이나 동학 농민군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자주적으로 폭넓게 추진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정치적 간섭과 경제적 침투를 강화시키는 데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 준 측면도 있습니다.
-제2차 갑오개혁(1894. 11~1895. 6)
청.일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해 대원군을 물러나게 하고 동학 농민군을 철저하게 진압하였습니다. 이노우에 특명전권공사는 갑신정변 때 일본으로 도망간 박영효, 서광범을 불러와 대신으로 앉히고, 연립 내각을 구성하였습니다. 사실상 박영효가 주도하는 개혁이 제2차 갑오개혁입니다. 이때 고종은 종묘에 나가 독립서고문을 바치고, 홍범 14조를 반포하였습니다.
제2차 개혁에서는 내각제를 도입하고, 8아문을 7부로 개편하엿습니다. 또 전국 8도의 행정 구역을 23부로 개편하였습니다. 지방 곳곳에 근대적인 재판소를 설치하여 행정권과 사법권을 분리하고, 지방관의 권한을 축소하였습니다. 일본은 이 과정에서 일본인 고문관을 각 부처에 배치하여 조선의 내정 개혁을 실질적으로 간섭하였습니다.
-을미사변
한편,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2억 냥의 배상금과 요동 반도, 타이완, 펑후 제도의 항양을 약속받았습니다. 이중 일본의 요동 반도 장악은 남만주로의 세력 확대를 꾀하고 있던 러시아에게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러시아는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직후 프랑스, 독일과 함께 일본 정부에게 요동 반도의 반환을 요구하였습니다. 결국 일본은 러시아가 주도한 압력에 굴복하여 요동 반도를 청에게 반환하게 됩니다. 이 사건을 '삼국 간섭' 이라고 부릅니다.
삼국 간섭으로 일본의 힘이 유럽 열강에 비해 약하다고 본 조선 왕실은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의 간섭을 벗어나고자 시도하였습니다. 이에 박영효를 내란 음모 사건으로 축출한 뒤 친러파 인사들을 대거 내각에 기용하였습니다(3차 김홍집 내각). 친일 세력의 실각에 불안을 느낀 일본은 또다시 폭력으로 정국을 뒤집어 놓기 위하여 먼저 민왕후를 제거하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를 위해 일본은 과격한 육군 중장 출신인 미우라를 조선 공사로 임명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정부가 8월 20일에 훈련대를 해산시키겠다고 일본측에 통보하자, 미우라 공사는 그날 밤 일본인 무뢰배들을 동원하여 궁궐을 습격하고 민왕후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것이 '을미사변' 입니다
.
-을미개혁(1895. 9~1896. 2)
을미사변으로 친러 내각은 붕괴되고 친일파 관료 중심의 4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어 급진적이고 친일적 성격의 개혁을 추진하는데, 이것을 '을미개혁' 이라고 합니다. 주요 내용을 보면, 기존의 개국 연호 대신에 '건양' 이라고 하는 연호를 사용하였고, 태양력을 채택하였습니다. 서울에 친위대, 지방에 진위대를 설치하고, 단발령과 종두법을 시행하였습니다. 그중 특히 단발령에 대해 백성들의 반발이 아주 심했습니다. 이 조치는 최초의 의병 투쟁(을미의병)을 낳았습니다.
그 뒤 일본군이 의병 진압을 위해 지방으로 파견된 틈을 타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는데(아관 파천, 1896.2), 이를 계기로 김홍집 내각은 붕괴되고 일부 각료들은 살해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을미개혁은 중단되었습니다.
갑오.을미개혁은 조선 왕조 500년 이래 정치, 경제, 사회 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근대적 개혁이었습니다. 그러나 개혁 추진 과정에서 일본의 간섭을 받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한계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