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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실미도 사건 실제버스동승기
게시물ID : history_1028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ss989
추천 : 11
조회수 : 619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6/22 02:28:01
 
 
 
실미도 사건’이 벌어졌던 1971년 8월 23일, 실미도 부대원들이 탈취한 버스에 타고 있던 승객의 생생한 경험담이 20일 공개됐다 ‘구사일생-실미도 난동자와의 동승기’라는 제목이 붙은 이 글을 쓴 사람은 인천시립박물관장을 지낸 인천 지역 화가 고(故) 우문국(禹文國, 1917~1998)씨.
우 화백은 사건 당시의 상황을 다룬 수기(원고지 40여매 분량)를 직접 써서 보관하고 있었다. 화백의 마지막 전시회가 열렸던 1998년, 아들 경원(45)씨가 아버지의 수필과 그림을 정리하다 이를 발견하고 워드로 정리해 보관하고 있었다. 이 문서가 이번에 공개된 것. 동승기는 경인일보가 ‘인천인물 100인’ 시리즈를 준비하며 우 화백의 유가족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밝혀지게 됐다.
▲ 1971년 8월 23일 실미도에서 부대원들이 집단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진은 수류탄으로 폭사한 부대원의 총이 버스 창문에 걸려있는 모습. /조선DB
우 화백이 직접 쓴 원고는 그 후 몇 번의 이사 끝에 사라져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고 유족인 딸 미령(48·인천시 남동구 간석동)씨는 전했다. 미령씨는 이날 기자와 만나 “사건 당일, 아버지는 자식 4명을 불러 앉혀 놓고 당시의 이야기를주셨다. 승객들도 타고 있었는데 먼저 총을 쐈던 진압군에 대해 굉장히 분노하셨다”며 “언젠간 밝혀야겠다고 생각해서 생전에 문서를 계속 갖고 계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작성 일자가 실미도 사건 직후인 71년 9월이라 적혀 있는 문서 서문에는 “이 글은 사건 당시 보도된 신문이나 국회의원 조사에서 송도교전 상황이 약간 차이가 나기에 적어두며, 발표해도 무방할 시기가 올 때까지 보류해 둘 것”이라고 씌어져 있다. 우 화백의 동승기는 영화 실미도를 통해 일반에 알려진 것과는 몇몇 대목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다음은 주요 내용.
◆버스 탈취 과정
우 화백은 사건 당일 12시40분경 송도 유원지 정문 앞에서 인천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다. 당시 버스 승객은 자신과 20대 남녀 한 쌍이 전부였다고 한다. 다음 정류장에서 면식이 있는 동서기 외 한 명과 고등학생 한 명, 두서너 명의 남자가 올라탔다.
버스가 수인선 송도역을 출발하자 그곳서 약 100미터 앞 옆길에 일단의 군인들이 길 양쪽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차가 그들이 있는 곳에 이르자 그들은 길을 일(一)자로 막고 대위 계급장을 단 장교가 장총을 들어 차를 세웠다.
20명 내외로 보이는 그들이 다 차에 오르자 장교는 여차장 옆에서 “다 탔나? 너희들은 오른쪽에 자리 잡고 일반 손님은 왼쪽으로 보내” 하고 명령조로 말하여 모두들 자리를 바꾸게 했고 곧이어 누군가가 “운전사, 빨리 몰지 않으면 죽인다” 하고 위협을 했다.
실미도 부대원들이 송도에서 버스를 탈취한 후 바꿔타지 않고 곧바로 서울로 향하는 영화와는 달리, 동승기는 버스가 인천시내 석바위를 넘다가 타이어 펑크 때문에 멈춰서자 군인들이 모두 내려 뒤에 오던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향했다고 썼다. 이때 우 화백은 군인들과 섞여서 버스에서 내려 오른쪽 언덕 위 인가에 숨어 들었다고 한다.
◆최초 사격자
최초 사격자는 영화에서처럼 실미도 부대원(설경구)이 아니라 진압군이었다고 한다. 동승기는 “부대원들이 탄 버스가 출발하는 순간 차창은 2㎝간격으로 구멍이 뚫리고 동시에 외부에서 연발의 총성이 들려왔다”고 기록했다. 그 순간, 자신이 타고 있던 버스에선 “엎드려!” “이 새끼들, 총질을 해?”라는 소리가 들리며 동시 교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최초 격전지
부대원들과 진압군간의 첫 총격전이 벌어진 곳도 영화처럼 바리케이드가 쳐진 평지가 아니라 아무런 저지선이 없는 내리막길이었다. 동승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이들이 차에 오를 땐 외부의 그 어느 곳에도 군인들이 있는 것을 못 보았는데…(중략). 버스 오른쪽은 차가 서 있는 도로변에서 완만한 경사의 밭과 야산이 수인선 철로까지 연장되고 철로를 넘어서서는 경사가 빠른 산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외부에서는 내려다보며 사격을 할 수 있고 표적이 움직이지 않는 버스와 차내에 있는 인원은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이 절대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목적지
영화에는 부대원들이 처음부터 청와대로 향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동승기에 의하면 정해진 목적지가 없었던 것 같다. 동승기는 “사격이 멎자 제멋대로들 지껄이기 시작했다. 장교인 듯한 사람이 승객들은 머리를 들지 말고 (좌석 바닥 쪽으로 머리를 숙인) 그 자세 그대로 있으라고 소리쳤다. 내 옆쪽에 있던 병사가 ‘프린스 호텔로 몰아라’고 외치자, 가운데 쪽에선 ‘사령부로 가자’고 맞섰다. 차가 학익동을 지날 때는 ‘한국은행으로 가자’ ‘서울로 차를 돌리라’고 외치자 이곳저곳서 ‘서울로 가자’하고 운전사를 위협했다”고 한다. 동승기는 또 그때 장교인 듯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 다들 결의가 돼 있나?” 하니 모두 “네” 하고 대답했고 장교는 “우리는 서울로 간다. 앞으로 행동을 같이 해야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실미도 부대원들의 태도
영화에선 부대원들 모두가 비장한 결의를 보였던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인간적인 고뇌도 다소 드러났었다고 한다. 우 화백 앞에 있던 한 부대원은 풀죽은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나도 집에는 부모가 있는데”라고 중얼거렸다. 또 창 밖을 내다보던 군인 하나가 옷을 잘 차려입은 남녀를 보고 “야, 저 새끼 옷 잘 입고 간다. 쏠까?” 라고 하자 누군가가 “야, 민간인은 다치지 말아”라고 말했다는 구절도 나온다.
 
◆대원들이 밝힌 자신의 정체
영화 속에서 설경구는 승객에게 “주석궁을 폭파하고 김일성의 목을 따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말했다. 기록에는 한 대원이 “우리는 공비가 아니다. 우리는 김일성이를 적으로 싸우는 특수부대인데 4년 동안을 시골에서 죽을 고생만 했다. 그런데 나라가 우리를 배반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부대원들은 승객들의 의심을 풀려는 의도인지 “여기저기서, 또 그 후에도 다른 병사들이 몇 번씩 이 말을 되풀이해서 말했다”고 동승기는 썼다.
 
 
'실미도 사건' 탈취버스 동승기 全文
 
‘실미도 난동자와의 동승기’ (1971년 9월) -글 우문국
 
 
◇구사일생
송도에는 예비군 훈련장이 있다. 옥련동회 앞, 그리고 송도 역 부근. 장마철에 접어들면서 아침에 현장에 집합했던 예비군들이 비가 종일 내릴 것 같은 전망이 서면 훈련을 중단하고 집이나 직장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이럴 때 내가 탄 버스에 그들이 무더기로 승차할 땐 비에 흠뻑 젖은 군복을 비벼대며 일반승객 사이로 파고든다. 때론 거친 언사도 오간다. 군복만 벗으면 우리와 같은 일반 시민인데 군복을 입으면 이렇게 태도가 달라지나 하고 불쾌한 생각이 드나, 비에 젖어 떠는 것을 볼 측은한 생각이 들고 나라를 위함이니 하고 꾹 참는다.
그러면서도 오늘 또 차를 잘못 탔구나 하고 후회한다.
1971년 8월 23일 그날은 시내에 일찍 나가야 할 일이 없어 점심을 먹고 산에서 내려갔다.
햇볕이 따갑고 유원지에는 아직 일러서 그런지 그리 많은 사람이 입장한 것 같지는 않다. 나는 밭 사이 길을 내려가다 이름 모를 꽃 두 송이를 꺾어 남방셔츠 주머니에 꽂았다. 진한 남빛이 깊은 호수를 연상시켜 더위를 덜어줄 것 같고 1센티미터 정도 크기여서 남의 눈에 얼른 띨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원지 정문 앞에 버스가 온 것과 내가 정류장에 닿은 것과 거의 동시였다. 내가 일착으로 탄 빈 버스였다. 내 뒤로 데이트 족으로 보이는 20대 남녀 한 쌍이 오르자 차는 출발했다. 그때가 12시40분경.
옥련동회 앞에서 면식이 있는 동서기 외(外) 한 명이 오르고 송도역에서 고등학생 한 명과 두서너 명의 남자가 올라탔다. 그곳 커브 길을 돌아 출발하자 그곳서 약 100미터 전방인 고아원 옆길에 일단의 군인들이 길 양쪽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차가 그들이 있는 곳에 이르자 그들은 길을 일(一)자로 막고 대위 계급장을 단 장교가 장총을 들어 차를 세웠다. 손만 들어도 차가 설 텐데 정차시키는 방법이 너무 거칠다고 나는 생각했다. 얼룩무늬군복에 검은 베레를 쓴 그들은 장총 아니면 연발단총으로 무장하고 있어 부근에서 훈련하다 귀대하는 공수부대원인가 생각했다.
나는 햇빛을 피해 오른쪽 좌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먼저 오른 병사가 나에게,
“저리로 가 않어.”
 
 
 
하고 반말로 왼쪽 좌석을 가리킨다. 나는 속으로, 이 자식은 부모도 없나 하고 시키는 대로 왼쪽으로 자리를 옮긴 다음 그들의 태도를 주시했다. 모두 나이는 30전후의 건장한 체구에 장교 한 명을 제외하곤 계급장은 없고 가슴에 낙하산을 새긴, 천으로 된 견장을 붙이고 있었으며 모두 검게 탄 얼굴엔 무언가 모르게 살벌한 분위기가 서려 있고 특히, 장교의 얼굴은 검으면서도 창백한 빛을 띠고 있어 무언가 이들에게 트러블이 있었거나 아니면 무장공비가 아닌가 하고 일단 의심해봤다.
20명 내외로 보이는 그들이 다 차에 오르자 장교는 여차장 옆에서,
“다 탔나? 너희들은 오른쪽에 자리 잡고 일반 손님은 왼쪽으로 보내.”
하고 명령조로 말하여 자리를 바꿈과 동시에 누군가가,
“운전사 빨리 몰지 않으면 죽인다.”
하고 위협을 했다.
차창은 2센티미터 간격으로 구멍이 뚫리고 동시에 외부에서 연발의 총성이 들려왔다.
순간,
“엎드려!”
“이 새끼들, 총질을 해?”
하고 응사와 동시 교전이 벌어졌다.
이러고 보니 그들의 정체가 공비라는 생각이 거의 굳어지고 외부에서 이쪽을 쏘는 것이 국군이라고 보면 공비와 생사를 같이 하게 된 나의 운명이 처참하게 느껴졌다.
2인용 좌석에 혼자 앉았던 나는 좌석 사이로 발을 두는 곳에 허리를 굽혀 시트 밑으로 기어들려고 하였으나 좌석 밑에 나무사다리가 뉘어 있어 발을 뻗을 수가 없었다.
나는 태 속에 있는 태아 모양으로 최대한도로 몸을 굽혀 등허리가 시트 위로 올라가지 않게 온갖 힘을 다했고 머리는 바닥에다 모로 박고 한쪽 눈으로 차내 상황을 살펴보기로 했다.
이들이 차에 오를 땐 외부의 그 어느 곳에도 군인들이 있는 것을 못 보았는데 총성이 들려오는 방향으로 몰고 오른쪽에 진을 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오른쪽은 차가 서있는 도로변에서 완만한 경사의 밭과 야산이 수인선 철로까지 연장되고 철로 넘어선 경사가 빠른 산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외부에서는 내려다보며 사격을 할 수있고 표적이 움직이지 않는 버스와 차내에 있는 인원은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이 절대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다.
교전은 점점 치열해져 차내에도 탄피가 튀고 실탄이 뒹굴고 외부에서 쏘는 총탄이 차창을 뚫을 때마다 유리가루가 비 오듯 쏟아진다. 앞쪽에서, “아얏!”
“아 - ”
하는 비명이 들린다. 누군가 맞은 것이다. 피아간의 쏘는 총성은 간격을 둔 것이 아니고 장마 때 소나기 퍼붓듯 쏴- 소리밖에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내가 엎드려 있는 곳은 뒤에서 셋째 번 좌석. 내가 머리를 박고 있는 좌석에는 병사가 비스듬히 누워 조준은 하지 않고 총만 높여 밖을 향하여 마구 쏘아대고 있다. 그런데도 그와 같은 자세로 쏘아대는 내 뒷좌석의 병사가 팔목에 부상을 입었다.
내 머리는 입석좌석 병사의 등 뒤에 있다.
그의 등은 내 머리의 방패구실을 하고 있다. 왜 그런지 맞아도 머리에 맞기는 싫었다. 이러한 총격전이 계속되는 한 차내에 있는 인원이 전멸할 것은 뻔한 일이고, 일각을 이제나저제나 하는 것뿐이었다.
지난날의 모든 일들이 주마등같이 스쳐 간다.
국민학교에 재학 중인 어린 막내자식이 생각난다. 내가 시체로 발견되었을 때의 내 몸을 생각했다. 나는 남방셔츠 주머니에 꽂았던 꽃을 꺼내 버렸다.
“건방지게 낫살이나 처먹고 이런 것을 꽂고 다니니 까 죽었지.'
하고 비웃을 것 같았다.
죽는다는 것은 결정적이지만 차가 움직여 주면 혹시 살 수 있는 기회가 오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을 때 앞쪽에서 누군가, “이 새끼, 차를 몰아. 죽인다, 어서!”
하고 위협하는 소리가 들렸다. 차가 덜컹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운전사도 머리를 숙이고 있었을 테니 마음대로 되지 않을 거다. 차는 몇 번이고 덜컹 움직였다가 서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몰지 않으면 죽인다는 위협 소리가 이곳저곳서 일어났다.
차가 서서히 움직여 언덕길을 올라가며 차차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사수들의 조준방향이 오른쪽에서 뒤쪽으로 옮겨간다. 조개고개 언덕을 넘어선 버스는 미친 듯이 속력을 가했다. 외부의 총성이 멀어지고 차내 사수들은 뒤켠에만 몰려 사격을 했다.
수인선 건널목을 지난 후 총성은 줄어들었다.
동양화학쯤에 이르렀을 때 앞쪽에서 누군가 뒤켠에다 추격 안하냐고 묻고, 뒤켠에서 없다고 대답하자 사격을 멈추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사격이 멎자 제멋대로들 지껄이기 시작했다. 장교인 듯, 승객들은 머리를 들지 말고 그 자세 그대로 있으라고 소리쳤다. 내 옆쪽에 있던 병사가 프린스 호텔로 몰아라, 외치자, 가운데 쪽에선 사령부로 가자고 맞섰다.
“우리는 공비가 아니다. 우리는 김일성이를 적으로 싸우는 특수부대인데 4년 동안을 시골에서 죽을 고생만 했다. 그런데 나라가 우리를 배반한 것이다.”
일반승객들의 의심을 풀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이 말은 여기저기서, 또 그 후에도 다른 병사들이 몇 번씩 되풀이해서 말했다. 차가 학익동 지서 앞쯤 지날 때 한국은행으로 가자, 서울로 차를 돌리라고 외치자 이곳저곳서 서울로 가자하고 운전사를 위협했다.
그때 장교인 듯,
“다들 결의가 돼 있나?” 하니 모두,
“네.” 하고 대답하자,
“우리는 서울로 간다. 앞으로 행동을 같이 해야 된다.”
그 다음 운전사에게 휘발유가 서울까지 갈 수 있겠느냐 물으니 겁에 질린 운전사는 가는 데까지 가자고 대답했다. 이때 여차장이, 운전사 아저씨 팔에서 피가 많이 흐르니 수건으로 처매주라고 하자, ×년 잔소리 말아, 하고 군인 하나가 쏘아댔다.
군인들은 운전사와 차장에게 서울로 차를 몰지 않으면 죽인다고 몇 번이나 위협을 하고 앞쪽에 탔던 고교생에게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서울로 가는 길이냐고 묻자 학생은 그렇다고 하였다.
내 옆 좌석에 있던 병사가 비스듬히 누운 채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달라기에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었다. 그는 한 모금 빨고 나서 나를 유심히 보더니,
“아저씨 돈 가진 것 있으면 다 내놔.”
한다. 돈이라곤 바지 시계주머니에 버스 값으로 둔 백여 원과 물건값을 주려고 따로 뒷주머니에 넣어 둔 오백 원밖에 없었는데 다 털어줄 수는 없고 오백 원을 주었더니,
“야, 이거 넣어 둬.”
하고 내 뒷자리에 있는 병사에게 넘긴다. 그도 나와 같은 자세로 머리는 나와 맞대고 있었던 것이다.
“야, 수류탄 안전핀을 끼워.”
하고 그를 보고 누군가가 말했다.
“창 밖으로 던져.”
“던지면 안돼.”
그런 말이 오고가자 옆 자리에 있던 병사가 떨어진 안전핀을 주워 그에게 주었다.
총기에 상식이 없는 나는 안전핀을 뽑으면 수류탄이 터지는 줄만 알았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터지는 것을 기다리는데 그자가 불쑥 수류탄을 내 코앞에 내밀었다. 그는,
“아저씨 이거 무엇인지 알죠? 자칫 잘못되면 아저씨와 같이 자폭합니다.”
차는 미친 듯이 논스톱으로 질주하고 있다. 머리를 들고 있는 사람은 운전사와 차장, 그리고 몇 명의 군인 외에는 모두 교전 당시의 자세 그대로였다.
나는 머리를 들어 차가 달리는 지점을 알고 싶었으나 언제 어디서 차가 정지되며 총알이 날아올지 알 수 없어 머리를 들 수가 없었다.
누운 채 위를 보니 2층이 보인다. 시간으로 보아 용현동이나 숭의동에 들어선 것 같다.
창밖을 내다보던 군인 하나가,
“야, 저 새끼 옷 잘 입고 간다. 쏠까?”
하니 누군가가,
“야, 민간인은 다치지 말아.”
하고 말린다. 앞쪽에서 물, 물, 하고 물 달라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도 응답이 없다.
총상을 입은 군인이 숨져가는 것 같았다.
총격전이 끝나고 서울 길로 차가 달리기 시작하면서 그들을 공비라고 생각했던 나의 판단이 잘못임을 알게 되었다.
첫째, 그들의 행동에 조직과 계획성이 없고 명령이나 지휘계통이 서있지 않은 것.
둘째, 뚜렷한 목표(목적물 또는 목적지)가 서있지 않은 것.
셋째, 방언이 거의 다 표준어인 점으로 보아 공비는 아니고 어느 곳에서 훈련을 받다가 패가 갈려 충돌을 하고 돌발적인 폭동을 일으킨 것 같았다.
그러나 서울 가는 길을 몰라 자주 학생에게 물어보는 점은 의심스러웠으나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에서 또는 공비라면 목적지까지는 자기들의 소재를 알리지 않아야 할 터인데 그렇지 않은 점을 보아 국군임은 틀림없었다.
또 국군이라도 사전에 치밀히 계획된 일이라면 목표가 서있고 차내에서 일반승객을 인질로 할 수도 있었는데 전혀 그런 것엔 생각조차 미치지 못하고 언행이 문자 그대로 난동을 부리고 있어 같이 죽을 때는 죽더라도 조금이라도 그들의 비위를 거스르는 말이나 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이미 엎질러 놓은 자기들의 행위에 죽을 각오가 서있는 것 같았다.
내 옆 앞쪽에 있던 자가 나지막한 소리로 풀 없이,
“나도 집에는 부모가 있는데.”
하고 중얼거리는 소극적인 자도 있었다. 마지못해 이 대열에 끼었다는 것을 말하여 주는 듯싶었다.
물을 달라던 군인은 그 후 말이 없었다. 이미 숨진 것 같았다. 또 그에 대해 주변의 군인들도 아무 말이 없었다. 누구나 다 당할 것인데 먼저 갔을 따름이라는 태도 정도로 보였다.
차는 도화동 인천가도를 달리는 것 같았다. 그동안 몇 군데의 고스톱이 있을 거고 그곳을 제지당하지 않고 논스톱으로 달린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벌집같이 구멍이 뚫리고 부서진 차창을 외부사람들이 보면 한눈에 사고차라는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죽든 살든 빨리 결판이 나야지, 이 상태로 서울까지 끌려가는 고통은 말로 형언할 수조차 없었다.
나는 송도 교전 지역을 벗어날 때부터 살기는 힘들겠다고 생각했지만 행여나 하는 마음에서 과속으로 달리는 이 차가 도중 전복이나 충돌을 하면 부상은 입더라도 생명만은 건질 수 있지 않을까 하곤 왼손으론 의자 다리를 단단히 쥔 채였다.
내 생각에는 인천시내에 들어가기 전에 차가 제지당할 것으로 알고 있었고 그 때가 사활을 판가름하는 순간이라는 생각을 했다.
또 공비가 아니라는 판단이 선 후 장교에게, 인가가 적은 곳에서 일반승객은 풀어주고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고 간청하고 싶었으나,
‘넌 뭐야?’
빵 하고 한 방 맞을 것 같아 될 대로 돼라, 체념하고 있었다.
차는 인천시내를 벗어나 주안 길을 달렸다.
송도에서 교전 직후 시내에 긴급연락만 했어도 시내에 들어가기 전에 제지되었을 것 같은데 외부에서는 무엇들을 하고 있는지 안타깝기만 했다. 물론 경찰관 몇 명이 이들을 막는댔자 의성(擬聲)만 났지 효과는 없을 것이고 바리게이트나 트럭 같은 것으로 길을 차단하여 차를 정지시킨 다음 군인과 일반승객을 분리시킨 후에 이들과 교전을 하거나 체포해 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차가 석바위 고개를 넘자 빵꾸가 난 뒤쪽 타이어가 튀어났는지 바퀴가 돌 때마다 덜컥덜컥 차체를 치며 속력이 약간 감퇴되었다. 여차장이,
“아휴, 빵꾸가 났네!” 하자 군인 하나가,
“야, 뒷차를 잡아라.”
하고 뒤켠의 군인에게 소리치자,
“버스 한 대가 뒤에 온다.”
“그럼 잡아.”
이때 나는 살게 됐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혹시 이들이 내리면서 우리들에게 총을 후려갈기지나 않을까하는 우려도 있어 성급한 행동을 삼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차가 멎자 우루루 군인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순간 나는 망설였다. 이들이 다 내린 후에 내릴까 아니면 같이 내릴까. 만일 경찰이 이 곳에 매복해 있다 교전이 벌어지면 또 위경에 빠지지 않나.
일각이라도 빨리 이 지긋지긋한 버스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나는 그들의 새틈에 끼어 차에서 튀어 내리자마자 오른쪽 언덕 위의 인가로 뛰어 들었다. 내릴 때 힐끗 보니 먼저 내린 군인이 뒤에 멈춘 버스의 운전사 위쪽 허공에 2발을 위협사격하고 군인들이 올라타기 시작했다.
 
 
 
 
내가 뛰어 든 집 뒤뜰 마루에서는 그 집 식구들이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밖에서 총성이 나고 낯모를 내가 뛰어 들고 바깥이 왁자지껄하니 주인 남자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밖으로 뛰어나가려는 것을 위험하니 나가지 말라고 말렸으나 그는 기어이 나가고 말았다. 그때 동승했던 동서기가 창백해진 얼굴로 위쪽 예비군사무실로 뛰어 올라갔다. 그를 보고 그때의 내 얼굴빛도 백지 같았으리라 생각했다. 
 
 
 
 
잠시 후 차 떠나는 소리가 들리고 바깥이 좀 조용해지자 나는 밖으로 나갔다.
차가 정지한 곳은 바로 주원고개 마루턱이었고 차창이 산산조각이 난 차체에서 죽은 군인의 시체를 끌어내리고 땅바닥에는 중상을 입은 군인 두 명이 쓰러져 있었으며 뒤쫓아 온 사이드카의 교통순경 한 명과 그 때까지의 경위를 말하는 듯 운전사가 수건에 피가 배인 오른팔을 한손으로 부축하며 설명하고 있었다.
나도 가서 보충설명을 할까하다 현장에 그 이상 머무르고 싶지 않아 내려오는 차를 집어타고 시내로 들어왔다. 다방에 들어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차를 한 잔 들고 살피니 오른손 손 등에 유리 파편으로 입은 상처에서 피 흐른 것이 말라붙고 하차 할 때 스친 듯 바지 뒤쪽 주머니 언저리에 피가 묻어 물수건으로 닦아내고 라디오를 들으니 그들이 탄차는 영등포를 향하고 있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며칠은 가슴이 울렁거리고 군인을 보면 공포감이 앞섰다. 교전이 있던 송도역 앞 현장을 지날 때면, 불과 4~5분간의 교전시간이었지만 그때는 왜 그렇게 긴 시간이었는지 소름과 함께 기억이 되살아났다.
나중에 그들의 정체와 난동이유가 밝혀졌지만 나는 그들이 아까운 나이와 생명을 너무 값없이 내던진다고 생각했으며, 그들은 그때 울에서 뛰어나온 맹수 모양 분별이 없었다. 만일 그들이 나와 같이 탔던 남녀를 데이트 족으로 알았다면 그 남녀는 피해를 입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고 차가 빵꾸만 안 났어도 우리는 뒤차 모양 우리들이 참변을 당했을 것이다.
또한 송도에서 그들이 운전사를 위협하기 위해 먼저 총을 쏘지 않았으면 교전 없이 서울 중심지까지 그네들 마음대로 갔을 것이고, 그곳서 난동을 부렸다면 인명피해는 더 컸을 것이다.
사람의 손에 무기를 들면 이렇게 까지 이성을 잃게 되는지, 무고한 일반승객을 풀어주지 않고 같이 끌고 가 피해를 입힌 것, 송도교전 시 일반승객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집중사격을 한 처사 등은 납득이 안 가며 앞으로는 국민을 보호하고 인명을 아끼는 군인 양성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껴진다.(끝)
입력 : 2006.02.20 18:53 28'
 
출처 :민족반역자처단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 ★혁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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