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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금강굴 (재업)
게시물ID : panic_10277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다른이의꿈
추천 : 5
조회수 : 1461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22/04/18 05: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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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올렸다가 삭제했던 글인데 다듬어서 다시 올려봅니다.)

 

 

==

여자 친구의 철학자 병이 도졌다.


“정말 모르겠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 나는 왜 사는 건지...”


대학시절 술 먹고 이런 소리 하는 친구들은 종종 봐왔다. 

 

하지만 나의 사랑스러운 여자 친구는 진심으로 이런 질문을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이다. 

 

여자 친구는 종교가 없는 무신론자였지만 삶을 진중하게 살고 싶어 했다.


그녀의 말에 나는 입을 열었다.


“사실.. 삶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과 같단 말이야.”


그녀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 특유의 그 맑은 눈빛. 

 

순간 그녀와 진한 키스를 나누고 싶은 욕망이 나의 머리속에 차 올랐다. 

 

이곳이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대형 서점이 아니었으면, 나는 이미 그녀를 품에 안았을 것이다.


“그래서? 동전의 양면 같아서.. 뭐?”


“아- 그러니까.. 내 말은 질문을 좀 바꿔 보자는 말인데…”


“어떻게?”


“내가 지금 죽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게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만약에..”


그녀는 나의 말이 흥미롭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가지런히 정돈된 그녀의 눈썹이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오늘 눈썹 화장을 하지 않았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녀는 원래 눈썹 화장을 안 하는 것일까? 

 

아니면 오늘만 눈썹을 그리지 않은 것일까? 

 

그런데... 그녀와 3년을 사귀었는데, 나는 왜 아직도 그녀가 평소에 눈썹 화장을 하는지 모르는 것일까? 

 

지금 화제를 돌려 그녀에게 눈썹 화장에 대해 물어보면 화를 내겠지?


“만약에 뭐? 왜 자꾸 말을 하다 마는데?”


나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 잠깐 생각을 하느라고. 자, 내가 물어볼게. 지금 네 앞에 저승사자가 와 있어. 저승사자가 내일 이 시간에 너를 데리러 올 테니 준비를 하고 있으래. 그럼 넌 하루 동안 뭘 할 거야?”


여자 친구는 나의 의도를 알겠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나는 말했다.


“웃지 말고, 빨리 대답해. 생각하지 말고 머리에 막 떠오르는 것들을 얘기해야 해.”


그녀의 표정이 진지해진다.


“글쎄.. 먼저 엄마 아빠와 시간을 보내고.. 좋아하는 음식도 먹고.. 음.. 음악도 들을 거고.. 그동안 못 본 친구들이랑 전화도 하고.. 뭐, 이 정도?”


“만약 저승사자가 1년 후에 온다고 하면?”


“1년 후에? 음.. 그럼 회사 그만두고 여행 다니고 싶어. 울릉도는 꼭 다시 가보고 싶고. 독도에도 갈 거야.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도 봐야 하고. 뭐.. 그런 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렇게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것들이 삶의 이유가 아닐까? 거창한 목표는 아니어도 애매하지 않고 확실하잖아, 안 그래?”


여자 친구는 얼굴을 살짝 찡그려 내 말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내 말이 틀렸어?”


“글쎄.. 내가 말하는 삶의 이유는 그런 게 아닌데.. 흠--! 잘 모르겠다. 그런데 자기는 뭐가 하고 싶어? 저승사자가 내일 자기를 데리러 오면?”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나는 딱 하나야. 난 삶의 목표가 분명한 사람이거든.”


그녀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뭔데?”


“난 너랑 사랑을 할 거야. 24시간 내내. 저승사자가 오는 순간까지. 그리고 만약에 저승사자가 1년 뒤에 온다면, 나는 매일 너와 사랑을 할 거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날마다. 그게 내 삶의 목표거든.”


그녀는 피식 웃었다.


“아주 본능에 충실한 삶이네. 에휴--! 내가 이런 짐승이랑 삶의 이유가 어쩌고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니....”




그녀의 바람대로—그리고 또 나의 바람대로—우리는 여행을 많이 다녔다. 

 

연애시절 우리는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녔더랬다. 

 

한번은 그녀와 설악산에 다녀온 적이 있다. 

 

짧은 일정의 여행이어서 천왕봉까지 올라가는 것은 무리였고, 

 

바다도 보고 올 겸 우리는 외설악으로 행선지를 정했다.


여행 첫날은 속초에서 하루를 보냈고, 

 

다음날 이른 아침 우리는 버스를 타고 설악동 소공원에 도착했다. 

 

소공원에서 식사를 마치고 비선대로 향해 걸었다. 

 

그리고 비선대를 지나 우리는 여자 친구의 의견대로 금강굴로 향했다.


경사가 가파른 길을 오르던 중 짙어진 안개와 함께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산길을 따라 설치된 로프가 아니었다면 짙은 안개로 길을 잃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은 종종 있었지만 궂은 날씨 때문인지 금강굴을 향해 위로 올라가는 사람은 우리뿐이었다.


여자 친구가 말했다.


“비선대까지는 사람들이 좀 있었는데, 여기는 한 명도 없는 것 같아.”


“그러게... 금강굴이 별로 유명한 곳은 아닌가 봐. 우리 그냥 돌아갈까?”


나의 물음에 그녀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 금강굴 꼭 가보고 싶어.”


우리는 다시 산을 올랐다. 

 

바닥의 바위가 비에 젖어 길이 미끄러웠다. 

 

산을 오를수록 경사가 급해졌고, 여자 친구는 두 번을 연달아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다.


나는 그녀에게 그만 내려가자고 말했지만 여자 친구는 단호했다.


나는 그녀와 자리를 바꿔 그녀 뒤에서 산을 올랐다. 

 

그녀가 머뭇거리면 나는 뒤에서 그녀가 어느 곳에 발을 디뎌야 할지 말해주었다. 

 

그렇게 산을 오르던 중 여자 친구는 다시 미끄러졌고, 

 

미끄러지는 그녀를 잡으면서 나도 함께 넘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옷에 묻은 흙을 털어냈고, 

 

고개를 들어 안개 사이로 흐릿한 바위 봉우리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바라보던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에게 말했다.


“자기야, 우리 그만 돌아가자. 오늘은 너무 위험한 것 같다. 사람도 없고....”


그녀의 맑은 눈망울에 짙은 아쉬움이 느껴졌다. 

 

나는 말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가고 싶은 걸. 오기도 좀 생기고 말이야. 내가 너 들쳐매고서라도 갈 거니까. 앞장서.”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한참을 더 올라가자 바위로 된 산길은 끝났고, 

 

거대한 암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내가 앞서 올랐다. 

 

암벽에 설치된 계단을 오르며 발을 딛는 곳이 미끄러운지 하나하나 확인을 해야 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그녀가 오를 수 있게 도왔다.


금강굴에 도착하자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비가 그칠 때까지 금강굴에서 기다려야 했다.


동굴 안 작은 법당을 구경한 후 우리는 동굴의 입구가 보이는 벽에 기대 나란히 앉았다. 

 

여자 친구는 흘러가는 안개를 감상하듯 바라보았고, 

 

나는 그런 그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말없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허공을 가로질러 흐르는 짙은 안개 사이로 맞은편 바위 봉우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숨었다를 반복했다. 

 

금강굴을 지키는 승려는 암벽에서 흐르는 물을 작은 바가지에 담아 나에게 건넸다. 

 

물을 받아 마시는 사이 승려가 말했다.


“오랜만에 오신 것 같습니다.”


마시던 물을 마저 넘겼고, 금강굴은 처음이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여자 친구가 말했다.


“네.”


나는 고개를 돌려 여자 친구 쪽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흘러가는 안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비가 그치고 금강굴에서 내려오는 길.


나는 여자 친구에게 물었다.


“여기 금강굴에 온 적 있어?”


앞서가는 여자 친구는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처음인데.”


“그런데 아까 스님에게 왜 오랜만에 왔다고 한거야?”


여자 친구는 내려가던 발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활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나도 몰라. 나 정말 웃기지?”




여행을 다녀오고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여자 친구와 나는 각자의 직장에서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오고 2주가 지난 어느 날, 

 

퇴근 시간 즈음해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여자친구였다. 

 

그녀는 내가 일하는 회사 앞이라며 퇴근하고 잠깐 얼굴을 보자고 했다. 

 

나는 하던 일을 정리하고 늘 만나던 회사 앞 카페로 나갔다.

 

 

 

그녀의 굳어진 표정. 

 

나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짧게 말했다.


“우리 이제 그만 끝내자.”


나는 당황했다. 

 

말문이 막혀 ‘뭐...? 뭐?’라는 짧은 단어만 되풀이하며 내뱉었고, 

 

그녀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다시 말했다.


"나 이제 그만 정리하고 싶어."


말을 마친 그녀는 가만히 찻잔을 응시했다.


화가 났다. 

 

그녀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게 일어선 채 한참 동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커피 잔을 응시했고, 카페에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목구멍은 여전히 무언가에 틀어 막힌 듯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그녀를 뒤로하고 카페를 걸어 나왔다.

 

 

 

밤새 잠을 잘 수 없었다. 

 

내가 그녀에게 잘못한 것이 있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여자 친구가 나에게 장난을 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장난을 칠 그녀가 아님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 몰래 다른 남자를 만날 그런 그녀도 아니었다.


창밖이 밝아지며 새벽이 되었을 때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전화기를 찾았다. 

 

한참 동안 전화기를 만지작 거리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왜 헤어지자는 말을 했는지 따질 계획이었다. 

 

우리가 만나 온 3년의 시간이 그렇게 가볍냐고 화를 낼 생각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녀에게 무조건 빌 생각이었다.


없는 번호라는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통화 버튼을 누르며 요동치기 시작하던 심장이 뚝 하고 멈춰버린 것 같았다.

 

 

 

일단 회사로 출근을 했고, 점심시간에 맞춰 반차를 냈다. 

 

그녀의 회사를 찾아갔고, 그곳에서 여자 친구가 지난주 돌연 퇴사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나는 당황했다. 

 

어제 그녀가 헤어지자는 말을 꺼냈을 때보다 더 당황했다. 

 

아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직장 동료에게 인사도 없이 도망치듯 그녀의 회사를 나왔다.


그녀가 사는 아파트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가 늘 들어가던 아파트 건물 입구 앞에 나는 멈추어 섰다. 

 

깊은 후회가 밀려왔다. 

 

매번 그녀를 바래다주면서도 그녀의 집이 몇 호인지 알지 못함을 후회했고, 

 

두 달 전 그녀가 부모님이 여행을 가셨다며 집으로 불렀을 때 가지 않았음을 후회했고, 

 

그리고 어제 그녀가 헤어지자 할 때 그녀를 잡지 않았음을 후회했다. 

 

어제 카페에서 무릎을 꿇고 빌어서라도 그녀를 잡았어야 했는데... 

 

하루 종일 참아왔던 눈물이 터져버렸다.


그녀의 아파트 앞에서 늦은 밤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 

 

다음날부터 회사를 마치면, 나는 그녀의 아파트로 향했다. 

 

처음 일주일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녀의 아파트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그다음 일주일은 4번 그녀의 아파트를 찾았고, 

 

그다음 일주일은 2번, 

 

그리고 그다음 일주일은 1번 그녀의 아파트를 찾았다. 

 

그렇게 그녀는 내 삶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7개월 후.


나는 퇴근길 버스에 앉아 창밖에 쏟아지는 함박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루 종일 눈 내리는 것을 보고 있어도 지겹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버스는 정류장에 멈추어 섰고, 나는 버스에서 내려 오피스텔 건물을 향해 걸었다. 

 

거리에 쌓인 눈이 구둣발에 밟혀 경쾌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밤공기가 상쾌하다. 

 

상쾌한 느낌 정말 오랜만이다.


문득 오피스텔 건물 입구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멀리서도 그 사람의 모자와 어깨에 눈이 꽤 쌓여있음을 알 수 있었다. 

 

흩날리는 눈발이 나의 시야를 가렸고, 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건물을 들어서며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나를 바라보는 맑은 눈망울.


“미.. 민경아...”


그녀가 사라지고 처음 한 달 동안 나는 그녀가 내 앞에 짠--!하고 나타날 것만 같은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골목 모퉁이를 돌면 그녀가 서있을 것 같았고, 

 

자주 가던 식당 문을 열면 한쪽 자리에 앉아 환한 웃음으로 나를 맞아줄 것만 같았고, 

 

그리고 퇴근길 회사 건물 앞에서 그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그녀가 나타날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면 나는 그녀에게 해줄 말을 생각했다. 

 

그녀가 미안하다 말하면 나는 그냥 별말 없이 괜찮다고... 돌아와줘 고맙다고... 그녀를 꼬옥 안아주겠다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막상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나자 준비했던 말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의 두 손은 그녀의 옷에 쌓인 눈을 털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입은 생각지도 않았던 말들을 뱉어내고 있었다.


“눈이 이렇게 오는데! 건물 안에서 있어야지! 왜 밖에서 기다리는데? 왜? 비밀번호를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응? 나한테 불쌍하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가 봐줄지 알았어? 응? 넌 오늘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도대체 왜 밖에서 기다리는데! 감기라도 걸려서 열나고, 아프고, 그러면 내가 봐줄 것 같았어? 응? 너 오늘 각오해.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내가 정말로 가만 안 둘 거야. 너 오늘 각오해. 진짜 각오해.”


그녀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오피스텔 방으로 들어온 나는 그녀의 외투를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 

 

그녀에게 모자를 달라했을 때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녀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나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나 이제 너 안 놔줄 거야.... 안 놔줄 거야! 절대로 안 놔줄 거야. 안 놔줄 거야. 안 놔준다고....”


안 놔준다는 말을 반복하는 나의 두 눈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동안 응어리진 아픔과 답답한 마음이 따뜻한 봄날 눈 녹듯 녹아내려 눈물로 다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내 삶의 봄날 같은 그녀가 나에게 다시 돌아왔다.


그녀는 나와 금강굴을 다녀오고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말로는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모든 것이 명확해지는 그런 느낌.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했다.


그녀가 말했다.


“나도 시원하게 설명하기 어려운데... 마치 머리속에 맴도는 멜로디가 있는데, 그 노래가 생각나지 않아 답답할 때가 있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살면서 나는 늘 그렇게 답답한 느낌이었어. 조용히 혼자 있으면 그런 멜로디 같은 무언가가 느껴져.... 알 듯 말 듯.... 그게 나를 얼마나 답답하게 하는지 몰라.”


나는 말했다.


“네가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알아? 그건 말이야. 너를 괴롭히는 사람이 없어서 그래. 네가 우리 강 부장, 정 차장 같은 사람들이랑 같이 일하면 그분들이 그런 고민은 한방에 싹 날려주실 텐데.”


그녀는 옅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우리 그때 금강굴에 갔을 때 자리에 앉아서 동굴 밖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기억 속 깊이 묻혀있던 그 멜로디의 선율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어.”


그렇게 나와 여행을 다녀오고 이틀 후, 그녀는 혼자서 금강굴을 찾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곳을 지키는 승려와 그녀가 답답하게 느끼고 있는 그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했다. 

 

승려와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는 출가를 결심했다고. 

 

그녀는 그렇게 즉흥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이상했지만, 

 

출가 결심을 하자 마음이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녀의 부모님이 심하게 반대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마음에 가장 많이 걸렸다고.... 

 

나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일주일 내내 고민을 하고서야 나를 회사 앞 카페로 불러낸 것이었다. 

 

그렇게 나를 마지막으로 만나고 그녀는 그 길로 절로 들어갔다고 했다.


왜 다시 돌아왔냐는 나의 물음에 그녀는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나를 안아주었다.

 

 

 

그녀가 새로 구한 직장은 내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과 가까웠다. 

 

그래서 야근이 있는 날이면 그녀는 퇴근 후 나의 오피스텔에서 자고 가곤 했다.


어느 이른 새벽. 

 

그녀가 흐느껴 우는 소리에 잠이 깨고 말았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소리 죽여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를 만나고 한번도 그녀의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나는 놀라서 몸을 일으켜 앉아 그녀를 끌어안았다.


“괜찮아? 왜 그래? 응? 무슨 일 있어?”


그녀는 말없이 계속해서 흐느꼈고, 

 

나는 그녀가 울음을 멈출 때까지 그녀를 안은 채 그녀의 짧은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 날 저녁. 

 

퇴근하고 오피스텔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화사한 옷을 입고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씻고 오라며 말했다.


“멋있게 차려입고 나와.”


“왜? 오늘 무슨 날이야?”


“저녁 먹고 알려줄게.”


식사를 마치고 그녀는 나에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언뜻 보기에도 반지 케이스였다.


나는 그녀의 두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맑은 두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열어 봐.”


케이스를 열자 반지 하나와 작은 쪽지가 있었다. 

 

접힌 쪽지를 펼쳤다.


<나에게 결혼해 달라고 물어 봐 줄래?>


나는 다시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나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그녀의 맑은 눈망울을....


 

 

오랜 시간이 흘러 그녀는 나에게 고백하듯 이야기했다. 

 

그날 새벽... 그녀는 나의 잠꼬대를 들었다고.


그녀가 돌아오고 나는 그녀가 다시 사라지는 악몽에 시달리곤 했다. 

 

꿈속에서 나는 그녀가 다니던 회사와 그녀의 친구들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 했다. 

 

그럼 나는 그녀의 본가가 있는 아파트 건물로 갔다. 

 

그곳에서 울면서 수십 세대의 아파트 문을 하나씩 두드리며 그녀가 사는 집을 찾아 헤맸다.

 

 

 

그렇게 우리는 결혼을 했고, 우리의 행복한 시간은 빠르게 흘러 지나갔다.



 

 

 

10년 후.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나는 방황을 하고 있었다.


아내의 눈망울은 더 이상 나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지 않았고, 

 

침대에서 아내와 사랑을 나누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아내를 향한 마음이 식어가는 것 같아 괴로웠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아내가 변한 것일까?


아니면... 내가 변한 것일까?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나이를 먹으면서 겪는 자연스러운 변화인지, 

 

아니면 아내와 나 사이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이런 고민으로 1년을 넘게 방황했다.


하루는 회사에 휴가를 내고 아내에게 말했다. 

 

혼자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고.




홀로 산을 오르면 생각이 차분해지고 마음이 정리가 된다.


이제 방황하는 이유를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나의 마음과 머리는 서로 다른 곳을 향해 가고 있었고, 

 

나의 머리는 마음이 가려는 길을 되돌리려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머릿속 생각은 뒤집을 수 있어도 돌아선 마음은 되돌릴 수가 없는 법.


내 앞에 남겨진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나 스스로에게 물었고, 

 

그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게 나왔다.


휴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아내에게 고백했다. 

 

더 이상 아내를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는다고.


침묵이 흘렀다. 

 

한참이 지나 아내는 자기에게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물었다.


나는 감히 그녀의 눈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식탁에 놓인 찻잔을 응시한 채 입을 열었다.


“우리 결혼 생활... 여기에서 그만 정리하고 싶어.”




이혼 절차는 의외로 간단했다.


한 달간의 숙려기간이 지났고 법원으로부터 <이혼 의사 확인서>를 수령했다. 

 

<이혼 의사 확인서>를 받고 나니 가슴에 커다란 구멍 하나가 뻥하고 뚫린 느낌이었다.


<이혼 의사 확인서>를 구청에 제출하면 이혼이 확정된다. 

 

일주일을 기다렸다. 

 

무엇을 기다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일주일 정도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이혼 의사 확인서>를 제출하기 전에 아내에게 알려줘야 할 것 같았다.


잠시 고민을 하다 아내에게 전화를 했고......


전화기에서 없는 번호라는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처남에게 연락을 했고, 아내가 절에 들어갔다는 대답을 들었다.


 

 

 


일 년 후.


나는 홀로 금강굴을 찾았다.


금강굴은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나는 아내가 오래전 앉았던 자리에 앉아 굴 밖을 바라보았다.


그때 아내는 맞은편 봉우리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녀는 삶의 어떤 멜로디를 듣고 있던 것일까?


누군가 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보이소!”


나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미안한데, 우리 사진 좀 찍어줄랍니꺼?”


그는 나에게 전화기를 내밀었다. 

 

내가 그의 전화기를 받아들자 그는 동굴 밖을 배경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자신의 일행에게 돌아갔다. 

 

나는 사진을 찍으려다 말고 그에게 말했다.


“역광 때문에 뒤에 배경이 흐릿한데요.”


“괘안심더. 마 대충 찍어주이소.”


그의 대답에 그의 일행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이리 멋드러진 풍경이 사진 한 장에 다 들어가믄 안 되재.”


“여기 경치가 너무 좋아가 내는 해탈한 기분이라 안 하나. 안 그렇심니꺼, 스님?”


금강굴을 지키는 승려는 말없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사람들이 내려가고 북적이던 좁은 굴 안이 조금은 한산해졌다. 

 

나는 금강굴을 지키는 승려에게 물었다.


“스님은 여기서 생활하시는 건가요?”


승려는 웃으며 답했다.


“허허--. 아닙니다. 저는 저 아래 신흥사에서 지냅니다.”


나는 잠시 주저하다 승려에게 물었다.


“그런데... 스님은 왜 출가를 하셨습니까?”


승려는 대답 대신 '허허--' 하고 웃을 뿐이었다.


“초면에 너무 무례한 질문을 했네요. 죄송합니다."


나의 사과에 승려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저에게 정말 소중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출가를 했어요. 그래서 그게 궁금해서 스님에게 물어봤습니다.”


승려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글쎄요. 다들 저마다의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살고 싶어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지요.”


승려는 오랜 기억을 회상하는 듯 맞은편 봉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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