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기간이 되니 마음도 싱숭생숭하고 해서, 일전에 게임할 때 만났던 누나에 대한 추억 몇 자 남겨봅니다. (반말 양해 부탁드릴게요)
중학생 2, 3학년 때였을까. 2006년 즈음의 일이었다.
고등학교 입학 공부하면서 밤이나 주말에 짬 날때마다 간간히 들어가곤 했던 게임이 있었다. 딱히 강해지겠다는 목적이라기보다는, 뛰어난 BGM을 감상하고, 예쁜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구경하고, NPC들의 이야기를 듣고 시나리오를 보며 상상하는 것이 즐거운 게임이었다. 그 게임은 관광지였고 난 관광자인 셈이었다.
그러던 중 시나리오상 강제로 파티해야 하는 부분에서 우연히 도와주셨던 분이 "좋은 사람 같은데, 같이 하실래요?"라며 길드에 초대했다. 원래 모임 같은 데 가입해서 사람들과 떠들하게 노는 타입이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거부하지 못했다. 나 역시 그쪽이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아서였을까, 아니면 그 세계에서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 누나의 손에 이끌려 길드에 가입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들어가본 길드는 생각보다 굉장히 즐거웠다. 사람들은 다정했다. 공부에 지쳐 게임 속으로 여행 온 날 반겨주었고, 귀여운 동생 뻘로 대해주었다. 덩달아 나도 즐거워져서, 평소답지 않게 '관광지'의 풍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아름다운 배경음악의 이야기를 자주 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지금 생각해보면 음악 이야기를 할 때마다 대화창에 서리가 낀 기분이 들었다. 묘하게 대화가 단절되는 기분, 화제를 돌리려는 길드 형이 날 데리고 사냥터 구경을 시켜주었지만 그땐 별달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의문은 여느때처럼 배경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내게 한 형이 말해주면서 풀리게 되었다. 음악 이야기 하지 말라고,라는 말에 왜요, 라는 기계적인 대답.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내게 큰 충격을 가져왔다.
"길드장 누나는 소리를 듣지 못해"
깜짝 놀랐다. 신나게 키보드 위를 누비던 손가락은 멈춰버렸고, 내가 무슨 짓을 했는가 죄책감을 느꼈다. 너무 당연한 권리가 결여된 사람이 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직접 마주한 적은 처음이었다. 놀란 내 마음을 알았던 것일까? 길드장 누나가 직접 말을 건넸다.
"네 잘못이 아니야. 가끔씩 내가 움직이지 않고 멈추던 것은, 밖에서 초인종을 울려도 듣지 못하는 내가 문을 열어주지 못해 생긴 일이야."
"네가 세상의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즐거워하는 것이 난 굉장히 부럽고,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 지금까지 지켜본 네가 어리지만 다정한 마음을 가진 아이란 걸 잘 알아. 넌 분명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거야."
미안하다고 말했던 말 빼고는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그녀에게 음악의 아름다움을 말하곤 했던 나를 보고 누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키보드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내 무심함을 자책했지만, 누나에게 위안이 되는 말을 건네기에는 난 너무 어린 아이였다.
어쩌다가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게 되었는지는, 다른 게임이 그렇듯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 그 때의 인연과,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했던 내 용기없음과, 눈치없이 배려하지 못했던 나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나를 이해해주었던 길드장 누나를 생각한다. 그녀에게 있어 그 게임은 아무런 부족함 없이 타인과 접촉할 수 있었던 세계였을 것인데, 그 속에서도 자신의 아픔을 직시해야 하는 내 말들이 비수가 되지 않았을까.
가끔 게임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보거나, 게임 안에서 폭언을 일삼는 이들을 보면 길드장 누나 생각이 난다. 게임이 누구에게는 소중한 세계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세계 속에 있는 사람들도 '사람'이라는 것. 그때의 사건 때문일까, 나는 절대 인터넷에서 욕하지 않는다. 설사 비방하려는 의도가 아닌 말조차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면, 비방하려는 의도를 지닌 말은 말할 것도 없겠지.
이따금씩 겨우 고등학생 나이에 불과했던, 길드장 누나가 문 밖에서 부르는 부모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채 쓸쓸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