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간다는 것은 대단히 설레는 일이지만, 직장인들에게 설레는 마음만 갖고 떠나는 여행을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 긴 여행은 더욱 그렇다. 지금까지 하던 일들을 잠시나마 인수인계해야하고, 돌아와서 해야 할 일도 미리 걱정해야 한다. 미처 마치지 못한 일은 마음 속 한 구석에 담고 가야한다. 난 최소한 미처 마치지 못한 일에 대한 걱정과 함께 여행가는 일은 피하고 싶었지만 결국 실패했다.
여행 준비는 간단했다. 비행기 표는 점심시간에 서핑을 하다 예약했다. 이미 3월에 휴가는 확정한 후였지만, 구체적 일정까지는 합의하지 않았는데, 비행기 표를 구하고 ‘통보’함으로 해서(휴가 약 45일 전) 휴가 날짜가 확정되었다.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는 곳은 행선지가 정해져 있다는 것 의미였다. 이탈리아였다.
보통 이탈리아 하면 베를루스코니, 무솔리니와 같은 유명한(!?) 정치인과 피자, 파스타와 같은 음식과, 축구리그인 세리에A 정도가 떠오른다. 특히 베를루스코니는 요새 TV등장이 뜸해져서 아쉽기까지 하다. 구속소식이라도 들릴 만한데 말이다. 하지만 나에게 이탈리아는 ‘로마’ 그 자체였다. 비록 전혀 무관한 지역과 시대를 공부하지만 로마제국은 나를 역사학의 길로 안내한 원흉이었고, 아련한 첫사랑이었다.
12일 내내 로마에만 머무르는 계획도 세워봤지만, ‘가기 힘든 이탈리아를 가는데, 로마에만 있기는 아깝다’는 평범한 생각이 날 유혹했다. 이런 생각이 여행을 쉽게 망치기도 한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난 유혹에 쉽게 넘어갔다. 결국 몇 개 도시를 더 가기로 했는데, 그래도 로마를 벗어나기 위해선 무엇인가 합리화가 필요했다. 일단 너무 재밌게 봤던 영화 ‘시네마천국(cinema Paradiso)’와 ‘대부(The Godfather)’의 무대였던 시칠리아를 가보고 싶었지만, 동선의 문제로 제외했다. 너무 멀었다. 대신 선택한 남부는 폼페이와, 소렌토, 아말피, 카프리, 피자의 고장 나폴리였다. 베네치아도 꼭 가보고 싶었다. ‘물의 도시’로 알려진 베네치아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생존을 위해 물위에 도시를 만들어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풍광을 만들어 내는 도시였기 때문이다. 나폴리에서 베네치아를 가는 동선 중간에 있는 도시는 피렌체였다. 피렌체는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를 낳은 도시로, 명실공히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도시였다. 로마(3박)-나폴리(3박)-피렌체(3박)-베네치아(3박) 정도면 로마를 버리고 다른 도시를 보는 명분은 마련 된 듯했다.
숙소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한인 게스트하우스, 호스텔, 그리고 5성급 호텔까지 다양한 숙소를 쉽게 잡았다. 도시 사이를 이동할 기차는 불면증의 도움을 받았다. 잠이 오지 않는 어느 밤 인터넷을 하며 기차표를 예약했다. 잘 찾아보면 수수료를 내지 않고 예약하는 방법이 있었는데, 그냥 귀찮아 수수료 내고 편하게 예약하는 길을 택했다. 여행 책자도 한 권 샀다. 이것저것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느니 그 편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준비를 다 마쳤지만, 가장 큰 어려움이 남았다. 반려동물과 같이 사는 나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같이 사는 고양이 ‘마리’였다. 평소에도 늘 집에 혼자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데, 아무리 좋은 기회라고해도 12박 14일을 혼자 둘 수는 없었다. 영역 동물인 고양이는 환경이 바뀌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니 다른 곳에 맡기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결국 수소문 끝에 대학원 후배 한 명이 내 방에서 지내며 마리를 봐주기로 했다. 이렇게 보니 내 여행의 가장 큰 은인은 마리를 봐준 후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짐을 다 싼 캐리어 위에 자기도 데려가라는 듯 앉아 마음을 무겁게 했다.
짐은 간소했다. 하지만 곧 체크카드를 분실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해외 사용에 문제가 없게 몇 번이고 이것저것 알아본 신용카드가 아닌 것에 그나마 안도했지만, 얼마 전 분실하고, 새로 만든 신용카드를 또 잃어 버렸다는 것이 뭔가 불길했다. 워낙에 소매치기로 유명한 이탈리아가 아니던가! 뭐 하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어찌 되겠지 싶었고, 이것이 액땜이다 싶기도 했다.
캐리어에 앉았던 마리가 사각소리와 연필 움직이는 것이 신기한지 내려와 글 쓰는 것을 물끄러미 처다 본다. 다시 미안한 마음도 들고, 혼자 낮선 곳을 간다는 두려움도 슬며시 밀려온다. 20,000원 주고 산 여행안내서가 갑자기 고마워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선물을 줘야할 사람들의 리스트를 짜 보았는데, 은근히 많다. 연필을 예쁘게 깎는 방법도 연구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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