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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글
게시물ID : history_1027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풍림화산2
추천 : 10/4
조회수 : 794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3/06/21 11:56:10
이명박 정권 초기에 다음 아고라에서 담담당당이란 분이 썻던 글입니다
 
친일의 문제가 본격화 되기 시작하는 시점에 나온 글인데요
 
그 당시에 이미 본질을 꿰뚫어본 날카로운 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아래가 원문 링크주소입니다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articleId=402113&bbsId=D115&searchKey=daumname&sortKey=depth&searchValue=%EB%8B%B4%EB%8B%B4%EB%8B%B9%EB%8B%B9&pageIndex=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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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
(사랑이란 결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거예요.)
- 영화 <러브 스토리> 중에서
 
* 나는 이렇게 바꾸어 말하고 싶다.
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misunderstood.
(사랑이란 결코 '오해다'라고 말하지 않는 거예요.)
 
<시대전쟁 제25화> 인물연구; 경제학자 <이영훈>
 
이제 한 사람을 소개할까 합니다. 나는 지난 시간 동안 여러 사람의 행적을 '드러난 자료에 의해서' 읽어보려고 애썼습니다. 과연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우리는 일본에게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게 하는 지에 대해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을 아래 소개합니다. 이영훈. 안병직의 제자. 낙성대파라는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을 알린 사람이고, 또한 지금은 <뉴라이트 역사 교과서>라는 것을 옳은 시각이라고 하면서 조만간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도 교육하려는 일급 연사로 등장한 인물입니다.
 
자료 자체가 정리된 것이 벌써 두 달여 전이기 때문에 더 이상 업데이트는 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언론이나 방송, 그리고 자료들에서 공개된 내용만으로 구성되었으므로, 이것이 '오해다'거나 혹은 '아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발표 공간에 하셔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대표적인 한 사람을 꼽았습니다만, 필요하면 다른 여러 사람의 케이스도 실어볼까 합니다. 아직 연재가 꽤나 남았으니 한 두 명 정도 더 정리된 걸 보여드려도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이지요.
 
앞서 글에서 일본의 대표적 논픽션 작가 '호사카 마사야스'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이영훈 교수는 이 사람의 글은 전혀 한줄도 참작하지 않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현재한 '천황을 위해 죽어라'는 그들 권력기구 내의 분위기를 전달하지는 아예 않으니까요. 경제학자라서 그런가? 그도 아닙니다. 그는 이미 역사 영역으로 들어온 상태이거든요. 그러니 현실을 보지 못할 수는 없지요.
 
아래 그대로 연재합니다. 문제는 건조한 진실찾기를 위하여 '....다'로 나가게 되는 점 양해바랍니다.
글자 포인터 조정이 안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 또한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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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여 기른다’는 말이 있다. 사냥개는 적당한 만큼의 먹이를 주어 길들인다. 배부르게 주는 것보다는 투지를 불러일으키려 배고프게 유지시키는 경우도 많다. 그것이 금전이거나 지위 일수도 있고 때론 명예가 되기도 한다. 기르는 도구다.
 
일본에게 ‘안병직’은 아무리 봐도 베스트 카드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 다른 베스트 히든 카드가 존재했다. 바로 이영훈이다. 그가 있어 안병직은 사실상 친일에 접근할 수 있는 이론적인 바탕을 챙길 수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안병직은 이영훈을 먹여 기른 장본인이기도 하다.
 
 
1951년생. 1978년 학사 이후 1985년 서울대에서 박사를 취득하기 직전 한신대로 간다. 1984.9~1985.2 한신대 경제학과 전임 대우 교수, 1985.3~1989.2 한신대 경제학과 무역학과 조교수를 하고 안병직의 추천에 의해 1989년 서울대 교수로 입성한다. 바로 안병직이 ‘근대조선의 연구’라는 과제를 일본 도요다 재단의 자금 후원에 의해 수행하고 있던 시점이다. 그의 서울대 홈페이지에는 특별한 자기 소개 내용이 없다. 1989.6 하성학술상(하성학술재단), 1990.2 청람상(한국경제학회)의 수상기록만 덜렁 있을 뿐이다. 그러나 뉴스에서 그의 이름은 2004년 이후 징그럽다 싶을 정도로 자주 나타난다.
 
한승조가 친일 세력들의 규합을 위해 강력하게 기존 정치학계와 충돌하면서 논란을 일으키며 일회성 단기로 출현하고 뒤이어 뉴라이트가 본격적으로 고갤 들기 시작한 시점인 2005년을 지나면서 이영훈은 자신의 그간 일련의 활동이 무엇을 지향하는가를 은근히 정리해서 보여주기까지 했다.
“(조선조, 대한제국 말기) 맹목적인 반일 감정과 문화적 우월감이 결국 실용주의적 외교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런 망국사를 통해 반성하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일본과의 협력을 강화’해야 하는데 그렇게 될 것 같지 않다. (중략) 민족주의가 식민지 시대에는 긍정적 역할을 했지만 적어도 민주화된 이후의 민족주의는 부정적 측면만 크다고 생각한다. (중략) 교과서도 한국경제가 갖는 공한 다이내믹성이나 시장변화를 가르쳐야 한다. 우리가 살 길은 고급화된 국제화 시대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고 일본과는 ‘시장통합’을 이뤄야 한다.”(뉴라이트 닷컴과의 인터뷰. 2005.12.30)
 
‘노골적인 친일’이다. 여기서 ‘시장통합’은 국제화라는 단어로 포장되었지만 바로 ‘한일(경제)동맹론’의 변용(變容)이라 볼 수 있다.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민족주의를 포기하자는 안병직 류의 사고가 그대로 이어진다. 보다 구체적이기까지 하다. 단순한 시장(market)을 합치자는 게 아니라 ‘일본과의 협력강화’라는 단서까지 들어가 있다. 한마디로 ‘합병’ 주장이나 다름이 없다.
그가 말하는 실증적인 접근법은 ‘수량경제’라는 일종의 통계학적 관점과 현장조사, 서지조사 등을 복합한 성격이 강하다. 그래서 대체로 숫자와 관련된 논쟁을 잘 벌인다. 물론 그가 인용하는 숫자는 대부분 ‘일본 자료’를 기본으로 한다. 의존도가 몹시 높지만 편중된 편에 속한다. 그런 그가 자신의 전공분야를 확장한다. 경제에서 역사, 정치로까지 들어간다. 가장 알려진(악명을 높인) 것이 바로 ‘종군 위안부=공창’이라는 이야기였지만 그것은 뒤에 설명한다.
 
그의 역사관은 무엇인가?
“과학으로서 문명사와 비교사는 국사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지성의 공백이 신화성의 민족담론으로 채워지고 있음이 대한민국이 당면하고 있는 위기의 근원이다. 그러기에 국사는 해체 되어야 하며 ‘한국사’도 다시 태어나야 한다.” (2004.9.9, 시대정신 웹사이트)
그는 몹시 도발적인 ‘국사로부터 해방을 위하여’ 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선진국가 진입을 위해서는 역사를 보는 눈을 바꿔야만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잣대는 ‘경제’다. 그의 전공이고 다른 분야도 그 내부의 특질을 살펴보기 보다는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여기는 ‘경제’ 그것으로 모두 일괄 해체를 한다. 국사도 예외가 없다. 정작 ‘국사’에 있어 그가 잘하는 ‘실증법’(fieldwork)을 적용한 경험은 그의 논문 어디에서도 그리 눈에 띄질 않는다. 막연하다. 쉽게 접근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책으로 나온 것도 2004년 이후에는 경제서적이 아니라 경제와 정치, 역사가 혼합되어 있다. ‘수량경제로 다시 본 조선후기’(2004.9.5, 서울대 출판부),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 안병직 이영훈 대담(2007.11.23, 기파랑)이 있고 나머지는 대부분 논란을 일으키기 보다는 평범한 학술적 논문들이다. 물론 경제적 관점도 그 안에 늘 포함된다.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 캐치업 이론 등이다. 오히려 방송 언론에 출현하면서부터 논란은 불거진다.
 
2004.9.2 MBC의 ‘과거사 진상규명’과 관련한 백분토론에서 그는 크게 ‘실수’를 하게 된다. 종군위안부 문제를 공창의 쇼윈도우에 있는 성매매와 비교하였다. 그에게 ‘역사’가 결코 머리 속에 늘 들어있지 않은 주제였다는 걸 보여준 사건이었지만 그는 이후에도 이 경험을 토대로 오히려 역사이야기를 더 떠들었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대안교과서 한국 근 현대사’ 즉, 이른바 뉴라이트 교과서의 책임편집자였던 것이다.
 
아래 당시 백분토론의 내용을 전제해보자.
 
이영훈 "역사의 진정한 청산이 무엇인지 외국의 사례들어 설명하겠다. 사회로부터 자발적인 참여라든가 자발적인 고백에 기초하지 않으면 진정한 역사청산은 없다.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에 따르면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에 적극 협력한 자'라고 해서 동원에 참여하거나 이들을 관리한 업소주인들을 찾아내서 하겠다는 것인데 이 범죄에 대해 자발적인 자기고백이 없는 상태이다. 법률에 의해 국가가 특정인을 경계 지우고 죄인으로 몰아 나머지를 역사의 원죄로부터 면죄시키는 효과가 발생한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
손석희 "자기 고백적 성찰은 실현 가능하다고 보나."
이영훈 "예를 들어 내가 일본 도서관에서 일본 위안부에 대해 큰 일본학자들이 조사한 많은 자료집을 보았다. 거기는 말하자면 재야사학이라는 사학자들이 참여되어 있는데 2000점 이상의 자기 고백들이 있다. 일본군에 종사할 때 그 업소를 드나들었다고 하는 자기고백과 여러 회고록들이 있다. 일본 전체가 반성하는 차원에서 전쟁 범죄를 소화하고 극복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 사회는 1939년 일제 징용령이 발동해서 약 11만명의 군이 일본군에 참전했다. 그 중에 다수의 사람이 한 달에 한 번 대체로 (위안소에) 갔다왔다. 많이 이용했는데 누가 이 고백을 한 적이 있나. 그런데 몇 사람 추려서 범죄자라고 한다면 그게 어떤 의미의 진정한 역사청산이겠는가. 학자 입장에서 볼 때 역사의 진정한 청산을 이런 식으로 법률적으로 구획짓기, 경계짓기, 사회 추방하기로 되어서는 결코 안된다.
그리고 최근에 어떤 연구자가 한국전쟁 때 위안소가 있었다는 걸 증명했는데 한국군대가 일본군대를 배워와서 한국전쟁 때 그런 일을 했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런데 이에 대해 한국사회는 조용하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고 그 뒤에 대한민국 정부의 합법적인 지원 하에서 미군들의 위안부가 수십만 명이 있었다. 그럼 점에 대해 하등의 자기성찰적인 반성이 없이 오늘날 제기되는, 정략적으로 제기된 과거사 청산을 법률적인 문제로 경계짓기를 통해 해결한다는 자체가 연구자의 입장에서 올바른 청산이 아니다.
정치인을 택하기 전에 역사 연구자들이 사회 성찰적인 고백을 이끌어 내는 방향으로 가지 않고 정치권을 끌어들여서 정치적으로 청산한다는 것만이 진정한 청산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한다. 과연 그 방법 밖에 없나."
안병욱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친일파 청산이나 역사적인 평가가 학자들 수준에서 가능했다면 왜 60년 동안 논란이 되었는가. 현재의 결과는 어떤가. 아직도 논란만 있지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고 있다. 학문적 정리의 문제를 벗어나고 있다.
60년대 박정희 시대 문제가 당시 한일회담 자료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 그러니까 역사가들이 평가할 것이 있지만 조사권한이 있고 국가 제도적인 지원의 측면이 있어야 하므로 기구화 하고 제도화하자는 것이다. 사법부처럼 수사권이 있고 재판관이 있는 그런 법률이 아니다. 역사적인 사실을 확인하자는 것인데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기 때문에 과거청산을 하자는 것이다."
이영훈 "금단의 어려움이 있어 정치권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지금 친일진상규명법에 의해 구분된 사람들, 가령 총독부와 부속기관에 근무한 사람들을 따지면 1942년 현재 중앙과 지방기관에 17만명이 종사했다. 1910년은 그 숫자가 얼마가 될지 모른다. 파악할 수 없는 자료인가. 아니다. 매년 관련 책들이 발간되고 있다. 서울대 도서관에도 있고 국립도서관에도 있다. 흔한 자료다.
1945년 이전 자료로서 열람이 안되는 것은 단 한 건도 없다. 이걸 자료화하면 어떤 경로를 통해 채용되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연구가 안되어 있다. 연구자들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 친일군상이 재생산되었는지 밝힌 뒤 국민에게 홍보하면 거기서 성찰적인 고백과 이해가 발생한다. 자료들을 분석도 하기 전에 권력을 통해 증언을 얻어내자면..."
송영길 "지적할 게 있다. 일제 시대 정신대의 문제와 지금 미군부대의 문제를 등치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일본우익이 지금도 주장하는 것은 정신대가 총독부와 국가 권력에 의해 강제로 동원된 것이 아니라 상업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일종의 공창의 형태로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이미 증거자료에 의해 정신대는 조선총독부 권력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서 일종의 성적 노예 상태에 놓인 것으로 근본적으로 (미군의 경우와) 차원이 다르다."
이영훈 "누가 주장했나. 어느 학자가 주장한 것인가.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동원했다는 게 명백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송영길 "그런 자료가 지금까지 나왔는데 그걸 모르나."
이영훈 "정신대 보고서를 안 읽어보시고 하는 말인데."
송영길 "그런 총독부의 강제동원이 아니면 자발적으로 갔다는 것인가."
이영훈 "표현에는 찬성하지만 사실 인식에 있어서는..."
송영길 "일본의 주장과 같은 주장을 하는 건가."
이영훈 "그렇게 선악에 의해서 판단하나."
손석희 "이건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관계의 문제인 것 같다."
이영훈 "왜 일본과 같냐고 말하나."
손석희 "그 부분은 정리하고 넘어가자. 이 교수는 정신대 문제를 어떻게 보나."
이영훈 "정신대 관련 일본에는 2000점의 자료가 있고 그런 일본학자들에 경의를 표하고, 국내학자들이 노력도 많았지만 거기에 의존한 바가 많았다. 거기에 보면 하나의 범죄행위가 이뤄지는 것은 권력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고 참여하는 많은 민간인들이 있다. 그리고 그 민간인들이 가령 팸프. 한국 처녀, 한국 여성들을 관리한 것은 한국업소 주인들이다. 그 명단이 있다."
손석희 "그 명단은 일본 자료에 있나."
이영훈 "그렇다. 중국 상해주변의 그 업소들이 다 나오고 있다.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에 여자를 쇼윈도우에 가둬놓고 성매매를 하는 나라는 세계적으로도 많지 않다. 친일문제를 다룰 때 자기 성찰적으로 다루면 우리가 진정한 의미의 역사청산을 할 수 있는데 법적으로 역사청산을 하면 몇 명이 선발이 될지 모르지만..."
손석희 "정신대 문제를 성매매로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 아닌가."
이영훈 "정신대 문제와 한국전쟁과 해방 이후의 한국에 존재한 미군 위안부를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하는데 그런 인식이라면 대단히 유감이다."
노회찬"일본의 책임 없다는 것인가."
이영훈 "성노예를 관리한 책임이 있다. 그렇다고 민간인 문제를 따지지 말자는 건가."
노회찬 "아니, 그렇게 문제의 핵심을 흐려놓고..."
이영훈 "법률적으로 재단하면 실체가 흐려지고 오히려 소수사람이 희생되고... 위안소를 사용한 병사의 문제는 어떻게 되는 건가."
노회찬 "지식인들이 그런 비겁한 태도를 취해왔기 때문에 역사가 청산이 되지 않은 것이다."
이영훈 "그 비겁한 태도를 자기 고백적 성찰로..."
송영길 "도덕적 성찰이 필요하다. 하지만 반민족 행위 자체를 도덕적으로 성찰하지 않는 사회가 되버렸다."
이영훈 "동의할 수 없다. 그런 사고방식을 경계하자고 그런 말을 한 것이다."
손석희 "지금 두 분이 서로 다른 터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말이 안통할 것 같다."
송영길 "이 교수의 지적대로 고백적 성찰이 필요했지만 해방 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친일청산 상황이 없어졌고 동시에 송진우나 김구, 여운형이 암살되는 비극이 발생했다. 오히려 친일분자들이 중용되면서 국가건설이라는 측면에서 친일이 전혀 부끄럽지 않은 상황이 되고 애국자로 둔갑했다. 반성하고 싶어도 반성할 기회가 없었다. 이제야 말로 뒤늦었지만 이제는 그 때처럼 형사적 처벌이 뒤따르는 상황이 아니므로 오히려 차분하게 역사를 되돌아볼 기회가 된 것이다."
 
그는 이 일로 나흘 뒤인 9월 6일 경기도 광주 위안부 할머니들의 거처인 ‘나눔의 집’에 사과 방문까지 하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잘못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내심은 전혀 아니었다. 여론의 등에 떼밀려 갔을 뿐이다. 그건 그 이후의 행적이 증명한다.
우스운 것은 서울대 양동휴 교수라는 사람은 “이 교수는 (TV)에서 군계일학으로 최고 수준의 학자임을 보여주었다. (이교수 욕하는 네티즌은) 역사교육을 다시 받든지 칼을 들고 와서 이영훈 선생과 나를 찌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는 사실이다. 양 교수도 경제학과다. ‘역사교육을 다시 받을’ 대상이 자신이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다. 폐쇄적 지식인의 모델을 잘 보여준다. 왜 양 모씨는 당시 그렇게 이영훈을 편들었을까? 광주까지 내려가는 동료가 안쓰러워서 그런 것일까?
 
그 이후부터 경제학 전공자가 정치, 역사를 다 재단(裁斷)하는 꼴이 서울에서 벌어지게 된다. 물론 경제사도 광의로는 역사학의 범주에 든다. 그렇다고 경제사를 한국사로, 다시 친일 정치집단화로 하는 것은 결코 주류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주류를 만들려고 한다.
그의 영역은 대안교과서를 만드는 과정에서 거침없이 근현대사를 향해 달려갔다. 2006.7.31 자 동아일보에 ‘우리도 건국절을 만들자’고 포문을 열어 포탄을 쏘고 난 이후, ‘건국절’ 논란의 이면에 자신과 뉴라이트 집단이 있음을 선명하게 대외로 알린다. 아울러 이영훈이 언제부터 ‘역사학자’로 대접 받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 서울에서 연이어 벌어진다.
 
2008.8.15 한국일보의 대한민국 건국 60년 주제의 ‘한홍구-이영훈의 대담’은 그의 전공분야인 경제학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한 자리가 되었다. 이영훈은 말한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는 사건은 ‘건국’이라는 범주에 속한다. 새로운 이념에 의해 인간들을 정치적으로 통합하는 하나의 질서이자 하나의 문명으로서 새로운 국가가 태어났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건국(1392년) 이후 556년 만의 사건이다. 불교사회에서 유교사회로 문명 전환을 괴한 조선 건국처럼 대한민국의 건국도 자유, 인권, 재산권, 개인주의 등 새로운 이념들이 들어와 새로운 문명을 건설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첫 마디부터 꺼낸 말이었다. 그는 이제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가 아니라 뉴라이트 진영의 정치이론가, 정책발언자로써 역할을 한다고 봐야 한다. 그런 그에게서 일제 강점기 민족운동사에 대한 이해나 대한민국이 통일정부가 아니라 분단국가라는 화두는 없다. ‘친북좌파세력의 역사인식이라고 공격하는 소재거리에 불과할 뿐’이거나 ‘그들의 관심은 분단정부인가 아닌가 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본가치로 하는 대한민국이란 국가 자체가 건국되었다는 것’에 모아져 있다.(신주백, 국민대 연구교수, 한국사)
2008년 역사비평 여름호에서 대안교과서가 ‘식민지를 찬양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 이영훈은 ‘우리에게 국사란 무엇인가’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현행 교과서는 건국사를 부정하고 있고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의 관점에서 현대사를 기술했다. 후진국 중심의 세계사상 위주로 서술했고 발전된 현대사상에 대해서는 제대로 서술하지 않았다. (중략) 일제가 추구한 영구병합의 지배정책이 객관적으로 한국 전통사회에 어떠한 충격을 가했고, 그에 따라 불가피하게 전통사회의 구조가 어떻게 바뀌어갔는지에 관한 일말의 관심도 없다. (중략) 시장경제를 통해 쌀과 노동력이 일본으로 흘러가는 대신, 일본에서 자본이 들어와 농장을 차리고 공장을 지었다. 한국과 일본 사이의 자금과 물자의 총순환은 일본으로부터의 지속적인 자본유입을 특징으로 했다. (중략) 대한민국은 자신에 걸맞는 건국사의 기억을 보전하고 발전시키는 데 실패했다”
 
그는 ‘발전된 현대사상’이 ‘일본’을 가리킨다고는 차마 직접 말하지 못했지만 그 전후 다른 논문에선 숱하게 스스로 이렇다고 인정하고 있다. 아울러 식민지 억압 수탈론과 폭압론에 대해서는 논리 자체를 꺼내지 않는다. “식민지 시기의 역사 또한 설령 그것이 교육, 문학, 예술, 종교와 관련된 것일지라도 모두 독립운동의 역사여야 한다는 현행 교과서는 ‘독립운동 함몰사관’에 빠져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단지 경제 이야기, 그 잣대만을 통한 건국 정당성만을 강조한다. 나아가 왜 ‘사회인류학’이 한국에서는 이렇게 발전되지 않았냐고 몰아붙인다. 웃을 일만은 아니다.
지난 7월 30일, 국립 공주대 사범대학 교육연수원에는 전국으로부터 모인 732명의 교사가 1급 정교사 자격연수 과정을 밟고 있었다. 역사, 과학, 한문, 지리, 음악, 특수교육분야 등 다양한 교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영훈의 ‘한국 근현대사의 올바른 이해를 위한 제언’이란 특강을 ‘자격미달 교수의 역사강의’라며 거부했다. 그 구체적 거부 이유는 간단했다.
 
첫째, 일본이 식민지근대화를 통해 한국 사회를 문명화 시켜 준 것이라고 말하며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고 있는 자이며,
둘째,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어 대대적으로 기념하자는 주장을 펴고 있고, 이는 결국 건국절이라는 그럴듯한 포장 뒤에 이승만과 박정희를 건국과 근대화의 영웅으로 부활시키려는 정치적 목적과 이념적 편향이 숨겨져 있고,
셋째, 지난 2004.9 MBC 백분토론에서 ‘일본군 위안부’가 상업적 목적에 따라 자발적으로 참여했다고 주장해 물의를 일으킨 장본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건에도 불구하고 이영훈은 철면피가 된 듯 줄기차게 뉴라이트가 가진 그들만의 주장에 선봉으로 나서고 있다. 이미 역사학자가 다 되었고, 나아가 곧 정치인 구실도 할 모양이다. 주류 언론에서는 이런 일을 다루지조차 않는다.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으니 그가 ‘설칠’ 환경은 조성된 셈이다.
해외 유학파가 아닌 교수로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학술적인 실증적 접근법으로 이름을 날리던 교수가 왜 ‘친일’이 되었는가? 왜 일본자료, 일본 만능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 안병직-이영훈 양자가 가진 친일의 궤적에서 학술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나아가 이러한 주장의 성공을 통해서 얻어진 현재 친일 사냥개 집단인 뉴라이트의 이론 개념적(사상이 아니다. 그 역할까지는 뉴라이트 자체가 가질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대부역할을 하는 안병직을 사실상 보조하는 것이 아니라 뛰어 넘고자 하는 욕망을 보이는 이영훈을 무엇이라 평가할 것인가? 그를 단순히 ‘신우파’ 수준으로 봐야 하는가?
 
'지적탐구'라는 학술적 영역에서 이영훈이 제시하는 개념의 파격성은 이미 사회 국가 시대 역사의 관점에서는 정도를 넘었다. 사회 공론의 장(場) 속에서도 '억지에 가까운 친일'의 몸부림이 그들이 힘을 보태서 만들었다는 정권을 기반으로 벌어지는 중이다.
 
후지오카 노부카쓰(일본 ‘새역모’ 회장)는 한겨레 21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뉴라이트는 우리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만나서 좌담회를 열면 ‘그림’이 될 것 같다.”
냉정하게 보자면 이영훈의 안병직 류의 합세는 안병직이나 일본 극우, 우파에게는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 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깨기 어려운 금기 영역 네 가지를 동시에 건드린다. 일본 제국주의 침탈 역사, 그리고 개발독재도 타당성이 있다는 논리전개, 지난 60년 지켜온 권위의 상징인 한국의 역사교과서 친일화, 그리고 일반인들의 반일(反日)에 대한 지극히 상식적인 감상까지 모두 건드리며 들어올 기회를 만들어주고 있다.
 
국어학자 려중동 선생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영훈은 ‘일본고정간첩 7호’ 정도 수준에 해당할 것이다. 일본은 그렇다고 하지만 한국의 입장에서는 ‘가장 질이 나쁜, 학술이란 이름으로 매국을 하고 일본 극우와 우익을 대변하는 친일분자’ 하나를 오늘에조차 대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서글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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