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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의 앵무새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던 상인이
실수를 저질러 큰돈을 잃었다는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퍼졌습니다.
상인과 경쟁 관계에 있던 이들은
이를 놓칠세라 열을 올려 시장 장악을 노렸고
결국 그들에게 밀리고만 상인은
사업을 접고 자택에 은둔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상인이 아무리 늙고 지쳐 예전의 명성을 잃었다 해도
그가 쌓은 재산은 강산을 뒤엎고도 남을 정도였기에
상인의 재산을 노리는 자들이 끊이지 않고 상인을 찾아왔습니다.
상인의 오래된 하인들조차
상인의 재산을 몰래 조금씩 빼돌렸고
이를 눈치챈 상인이 집에서 모든 사람을 쫓아내자
상인은 커다란 자택에 홀로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은둔하는 상인의 집에 출입이 가능한 건
상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뚱뚱한 은행원뿐…
둘은 오랜 기간 신뢰를 쌓아온 사이였습니다.
매월 두 번째 주 수요일에 상인을 방문하는 은행원은
최근 상인의 상태가 눈에 띄게 달라지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예전의 쾌활한 모습은 사라지고
금고에 처박혀 산더미 같이 쌓인 금화를 등진 채
눈앞 한 줌의 금화만 안개 낀 흐릿한 두 눈으로 반복해 세었고
속사포처럼 연발하던 의심 조의 말투도
무거운 침묵에 눌려 입안에서 공허하게 맴돌 뿐이었습니다.
상인의 주름으로 가득한 얼굴과 힘없이 떨리는 손가락을 보며
상인 또한 세월의 힘에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은행원은
안타까움에 그만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습니다.
그렇게
눈물을 훔치며 상인의 자택에서 나온 은행원은
거리에서 한 남자와 마주쳤습니다.
빼어난 외모와 말솜씨로
금세 은행원의 마음을 사로잡은 남자는
상인의 재산을 노리던 사기꾼이었습니다.
은행원이 상인의 집에 드나든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자는
우연을 가장해 은행원에게 접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연인 사이로 발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남자는 첫눈에 은행원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아보았던 것이었습니다.
사치스러운 남자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
은행원은 무던히도 노력했으나
그의 봉급으로는 남자를 만족하게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결국
상인의 재산에 손을 대기 시작한 은행원…
상인의 재산을 조금씩 빼돌리며
둘은 호화로운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덧 거짓말에 능숙해진 은행원이
상인에게 거짓을 늘어놓으며 돈을 갈취하려는 순간…
뻥~이요~
어린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앵무새 한 마리가 날아와 상인의 어깨에 앉았습니다.
설마… 우연이겠지…
놀란 은행원이 뛰는 가슴을 추스르며
다시 상인에게 거짓을 이어 가려는 그때
상인과 눈이 마주친 은행원은
하마터면 바지에 오줌을 지릴 뻔했습니다.
철판도 꿰뚫어 버릴 기세로
부릅뜬 두 눈으로 은행원을 노려보는 상인…
은행원이 익히 알던 상인의 예전 모습이었습니다.
식은땀이 비 오듯 내리기 시작했고
서둘러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은행원은
도망치듯 상인의 저택을 빠져나왔습니다.
이후에도
상인을 찾아온 은행원이 거짓을 말할 때면
뻥~이요~
앵무새가 말할 때마다
상인은 노기를 띤 얼굴로 은행원을 노려보았고
상인으로부터 더는 돈을 뜯어낼 수 없게 된 은행원은
이 사실을 남자에게 털어놓았습니다.
그깟 앵무새… 그냥 죽여버리지 뭐…
이참에 크게 한판 벌이고 둘이서 떠나자…
남자가 은행원을 다독이며 말했습니다.
돌아오는 둘째 주 수요일
은행원은 남자와 함께 상인의 집을 찾았습니다.
은행원이 상인의 주의를 끄는 동안
남자는 독에 적신 빵 조각을 낚싯줄에 걸어 창가에서 흔들었고
아니나 다를까
빵 조각을 본 앵무새는 번개 같은 속도로 날아와
빵 조각을 낚아채 한입에 목구멍으로 넘겼습니다.
무시무시한 독이 앵무새의 혈관을 타고 흐르며
순식간에 앵무새의 몸을 마비시켰고
바닥에 떨어진 앵무새는 이내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 사실도 모른 채
은행원의 거짓에 귀 기울이는 상인…
근처 광산에서 금맥이 발견되어 금의 가치가 떨어질 거 같으니
보석으로 대체하는 것이 좋겠다고 은행원이 제안하자
상인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은행원과 남자는 미리 준비한 마차에 금을 가득 실어
유유히 상인의 자택에서 빠져나왔고
그 둘에게 펼쳐질 미래는 황금빛으로 물결쳤습니다.
해안가의 커다란 저택에서
지는 노을을 보며 달콤한 음료를 마시고
화롯가에 앉아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이
은행원의 머릿속에 떠올랐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 모습에 은행원이 미소를 짓는 순간…
정신을 차린 은행원은
끝없이 펼쳐진 구름 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어찌된 상황인지 몰라 당황한 은행원은
무심코 본 뿌연 구름 저 아래
죽은 자신의 시신을 구덩이에 묻는 남자를 보자
그제야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망할 사기꾼 놈이 날 배신하다니…
분을 삭이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던 은행원…
그때
은행원은 저 높은 곳에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무언가를 보았습니다.
천사였습니다.
천사가 내려와 은행원을 근엄한 얼굴로 내려다보자
겁을 덜컥 집어먹은 은행원은
엎드려 온갖 거짓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은 상인을 속일 생각이 없었으며
이 모든 건 남자가 혼자 꾸민 일이라고
남자의 협박에 못 이겨 상인을 속였으며
자신은 남자에게 살해당한 피해자라고…
잠자코 은행원의 말을 듣던 천사는…
뻥~이요~
은행원은 경련을 일으키며 뒤집어졌습니다.
그리고 보았습니다.
천사의 어깨에 앉아 자신을 노려보는 앵무새를...
순간
바닥의 구름이 열리며
은행원은 시뻘건 지옥의 화염을 향해 추락했고
저 아래에서 추락하는 은행원의 뽀얀 궁둥이를 기다리는 건
뜨겁게 달군 지옥 마귀의 삼지창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