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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개월간의 군생활.txt
게시물ID : freeboard_102587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박주현朴珠鉉
추천 : 2
조회수 : 41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5/08/17 18:35:06


 

1997년 2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병무청을 찾아갔다. 그 당시에 왜 그런생각을 했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대학은 들어갔지만, 학교다닐때 캠퍼스의 낭만이니 그런것 또한 나에게는 헛소리일 뿐이였다.


그러다가 6월이 되고나서야 해군병 모집에 합격되었다는 통지서가왔다. 대학기말시험을 안봐도 되겠구나싶은 마음에 담당교수를 찾아가 이야기하니 기말고사는 치고 가야된다고했다. 시험은 대충봤고 7월 7일 군대를 갔다.. 


군대에 간날 전날 먹은 술이 깨질않았다. 곧 군악대의 빵빠레가 울리고 하늘은 뱅글뱅글 돌기만했다.


훈련소생활은 개인시간 1분조차 없었고, 훈련은 어마어마했다. PT체조는 1500개까지해봤고, 여기에 틀려서 늘어난것까지하면 2000개정도 쯤 되었던것같다. 화생방은 방독면도없이 벙커에서 20분정도를했다.  빨간모자DI는 밤에 잠을 재우지않고 우리 훈련병들을 괴롭혔다.  예 알겠습니다 대신 "악..악..악", 밤새 내리는 빗속에서 동기 700명이 비를맞고 하늘을 바라보며 어머니은혜를 불렀다. 우는 애들도 엄청 많았다. 7월군번이였으나 훈련병 대부분이 개도 걸리지 않는다는 여름감기에 걸렸다. 최악이였으나 해군 수병의 자긍심을 가지고 훈련을 받고 명예로운 수료를 하게되었다.


후반기교육은 엄청나게 천국이였다. 이곳에서 공부를 잘하면 좋은곳으로 간다고했지만, 나는 남들이 다 선호하지않는 넓은 동해로 갈예정이였기때문에 성적은 나에게 중요하지않았다.  내가 있을때까지만해도 동해는 구타 및 가혹행위가 많고 파도가 높아서 고생한다고 기피했던것같다.. 후반기교육도 끝내고 부산에 모였던 우리는 양복을 입은 사내가 부르는대로 갔다. 


" 너 혹시 아저씨 따라갈래?" 라는 말에 "아닙니다." 라고하였고 그 아저씨는 기무대 사람이였다.


이래저래 1함대 동해에갔을때 참수리(고속정)을 타게되었는데... 구타와 가혹행위가 엄청나게 많았다.. 이등병때는 원래 그렇게 맞는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내 후임병들이 들어왔을때도 그 후임병때문에 많은 구타를 당했어도 그 후임병들에게 한번도 손대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후임병들은 나를 엄청 어려워했지만 내가 시키는것은 잘했다. 그렇게 함상생활을 6개월정도하다가 일병때 육상발령이 났는데 나를 그렇게 많이 때리던 고참도 "너 같이 독종같은놈은 군생활내내 처음본다"라며  그동안 때린게 미안해서였는지 그동안 내가 잘못했다 용서해라.라고 눈물을 훔치는 고참에게 손을들어 괜찮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라며 인사해주었다. 하지만 육상 여기는 더 지옥이였다.. 그 이유인즉은 상병 병장달고도 이등병같은 생활을 해야하는곳이였기 때문이였다.


 
 

그렇게 육상부대에서 19개월의 생활을 했는데.. 부대 특성상인지 해군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래서였는지 90년대에는 병장4호봉 이하는 내무반에서 책을 읽거나 편지를 쓰는것이 불가능했었다. 선임수병제도가 있었는데 나는 인사행정병이였기때문에 바쁜관계로 선임수병은 하지않았고 동기녀석에게 선임수병을 하라고했다. 내가 내무반장을 맡았을때  그동안 후임병들이 내무반에서 책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에 그동안 휴게실로 쓰던 곳으로 개조해 독서실 및 공부방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병장5호봉 이하는 오지도 못하였지만 우리 내무번 쫄다구들을 데려다 놓고 책도 읽게하고 공부도 하도록했다. 그렇게 내가 있는동안은 유지를했고 후임병들은 점호가 끝난 후 당직사관이 허락해주는 시간까지 독서나 공부를 했다.


 
거의 20년전인데.. 생생하네유 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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