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업계 대부' 전중윤 삼양식품 명예회장 별세
삼양식품 창업주인 전중윤 명예회장이 지난 10일 밤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5세.
전 명예회장은 1963년 국내에서 라면을 처음으로 만든 라면업계의 대부'로 평가받는다. 제일생명보험 사장을 지내다 1959년 출장차 들렸던 일본 도쿄에서 라면과 인연을 맺고, 1961년 삼양식품을 창립했다.
지난 2010년 장남인 전인장 당시 부회장에게 회장직을 물려주고 명예회장으로 추대될 때까지 한국 라면계의 일선에서 활약하는 노익장을 발휘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제20호실. 영결식은 14일 오전 9시 강원 원주시 우산동 삼양식품 원주공장에서 치러진다. 장지는 강원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 에코그린캠퍼스 선영(대관령 삼양목장 내)이다.
향년 95세를 일기로 지난 10일 밤 노환으로 별세한 삼양식품 창업주인 전중윤 명예회장은 '라면의 아버지'였다.선린상고 출신인 그는 경희대 경영대학원에서 석사, 강원대에서 농학 명예박사를 받았으며, 1963년 국내에서 라면을 처음으로 만든 '라면업계의 대부'로 평가받는다. 1960년대 초 남대문 시장을 지나가다 사람들이 한 그릇에 5원하는 꿀꿀이죽을 사먹기 위해 길게 줄을 선 것을 보고 국내 식량 자급문제 해결이 시급하다는 생각에 라면을 생각해냈다. 제일생명보험 사장을 지내다 1959년 출장차 들렸던 일본 도쿄에서 라면과 인연을 맺은 것이 1961년 삼양식품을 창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는 과거 일본에서 라면을 먹었던 경험을 떠올리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묘조(明星) 식품에서 한 달가량 출근하며 라면 제조기술을 전수받았다. 묘조식품이 라면의 핵심 기술인 배합비율을 가르쳐주지 않다가 그의 열정에 감명받아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에 배합비율을 알려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전 명예회장은 1961년 삼양식품을 창업했다. 상공부 등 정부 관련 부처를 설득해 어렵게 5만 달러를 지원받아 2년 뒤인 1963년 비로소 삼양라면을 출시했다. 당시 시설 투자와 원료비 등 부담이 컸음에도 삼양라면 가격은 10원으로 책정했다. 가난한 서민들이 손쉽게 사서 먹을 수 있도록 하자는 배려였다. 전 명예회장은 "국민을 위해 애국하는 마음으로 라면을 생산했다"며 "회사의 수익성보다 국민의 편에서 저렴하게 라면을 공급해왔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1969년 업계 최초로 베트남에 라면을 수출한데 이어 세계 60여개국에 삼양라면을 수출함으로써 세계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1970년대 국민들에게 널리 단백질을 공급하겠다는 취지로 소고기와 우유의 생산 공급원인 '대관령목장'을 만들었다. 대관령목장은 라면 스프용으로 소고기 등 육류를 공급하고, 젖소를 사육해 우유와 유제품을 생산했다. 삼양식품은 쇠고기라면(1970년), 장수면(1978년) 등을 출시하며 '라면 전성시대'를 열어갔으나, 1989년 11월 우지파동을 겪으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우지파동은 당시 검찰에 '라면을 공업용 우지(牛脂·소기름 )로 튀긴다'는 익명의 투서가 접수되면서 불거졌다. 인체에 유해한 기름을 썼다는 꼬리표가 붙으면서 기업 이미지는 땅에 떨어졌다. 소고기 원료가 주 성분인 삼양라면의 매출이 급감했으며, 공장 기계가 멈춰지고 1000여명의 임직원이 회사를 떠나기도 했다. 1997년 대법원의 무죄 판결을 통해 억울함을 벗었지만 실추된 이미지를 회복하지 못한 채 1998년 부도 위기를 맞았다.결국 삼양식품은 법원에 화의를 신청했고, 그로부터 7년이 지난 2005년 3월 화의 종결로 경영권을 되찾았다. 전 명예회장은 그 해 5월 장남인 전인장 회장을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발령내면서 2세 경영체제의 발판을 마련했다.2010년 3월 창업주인 전중윤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추대되고 전인장 부회장이 회장에 취임하면서 경영권 승계는 끝났다. 그는 명예회장으로 추대될 때까지 라면업계 일선에서 활약하는 노익장을 발휘해 이목을 끌었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됐다. 삼양식품은 오는 14일 오전 9시 강원도 원주공장에서 고 전중윤 회장의 영결식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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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라면의 아버지 삼양라면의 회장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오늘 저녁은 삼양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