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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우진(愚盡), 어리석음이 다하다 (1/2)
게시물ID : panic_10226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다른이의꿈
추천 : 4
조회수 : 84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1/04/26 11:5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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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난간에 붙여진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많이 힘들었죠?’

피식하고 쓴웃음이 나온다.

난간 위에 조심스레 두 손을 올렸다.

차갑다.

나는 난간 위로 고개를 넘겨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시커먼 한강물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흐르는 물 위로 반사된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반짝이는 불빛 때문인지 그리 차가워 보이지는 않지만..

많이 차갑겠지?

문득 물이 차가울까 걱정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우스웠다.



내가 죽으면..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은우는 조금이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은우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미친..”

다시 쓴웃음이 나온다.

이 모양 이 꼴이니 사기나 당하는 거겠지.



은우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돌변했던 그 순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 * *


은우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게 정말 전부야? 내가 이런 푼돈 챙기자고 지금까지 그 개고생을 한 거였어?”

“은우야, 너 말투가 갑자기 왜 그래? 아파트랑 상가 점포를 정리하면 장모님 치료비로 충분할 거라고 그랬잖아.”

나의 말에 은우는 비웃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이야기를 했어야 할 거 아니야! 아파트에 대출이 물려있다고! 이게 어떻게 네 거야? 은행 거지. 안 그래?”


* * *


거짓이었다.

장모님이 희귀병을 앓고 있다는 말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병원이 미국에 있다는 말도,

수술만 끝나면 다같이 미국에서 살자는 말도,

나를 대신해 혼인신고와 영주권을 신청했다는 말도,

모두 거짓이었다.

그때라도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

어리석은 나는 그러지 못했다.



돈이 부족하다는 은우의 말에,

나는 신용대출과 제3금융권의 대출까지 받았고,

은우는 그렇게 준비한 대출금과 부동산을 정리한 돈을 모두 챙겨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일주일이 지나서야 그녀의 실종 신고를 했고,

그때야 비로소 은우라는 이름조차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다리 난간에 몸을 밀착시켰다.

난간 아랫부분을 밟고 올라가 상체를 난간 위로 살짝 넘길 수 있었다.

이제 난간을 집고 있는 양팔에 힘을 주어 몸을 넘기면 된다.

그래 후회는 없다.

다음생에 은우를 다시 만난다면..

나는 또 속아줄 것이다.

그녀를 다시 내 품에 안을 수 있다면,

나의 품에 안긴 그녀의 미소를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열 번, 백 번, 천 번이라도 기꺼이 속아줄 것이다.

다리 아래 유유히 흐르는 한강물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읍조렸다.

“은우야, 사랑한다.”

이 말이 나의 마지막 말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죽음조차 두렵지 않았다.

양팔에 힘이 들어가자 몸의 무게중심이 난간 너머로 옮겨졌다.



“빵빵!”

나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하얀색 고급차 한 대가 정차해 있었다.

이내 비상 깜빡이가 켜지고 운전석의 문이 열렸다.

검은 정장을 입은 젊은 남성이 차에서 내려 나를 향해 외쳤다.

“김우진 씨?”


누구지?

처음보는 사람인데..

어떻게 나를 알고 있는 것일까?


그는 급히 달려와 나의 팔을 붙들었고,

정차된 승용차를 향해 나를 인도했다.

그는 뒷좌석 문을 열며 말했다.

“타시죠.”

“누구세요? 나를 어떻게 아는 거죠?”

“우선 차에 타시죠.”

그렇게 차에 올랐을 때,

운전석 뒤에 앉아있는 여성이 나를 향해 말했다.

“안녕하세요.”

“누구..세..”

남성이 운전석 문을 여는 순간,

차량 내부의 실내등이 켜졌고,

나에게 방금 인사를 한 여성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면..

그녀는 전혀 늙지 않았다는 것이다.

20대 초반의 앳된 얼굴 그대로였다.

“혹시.. 너.. 현정..이..니?”


* * *


20여 년 전.

그 당시 나는 갓 대학을 졸업한 사회 초년생이었고,

현정을 처음 만난 곳은 내가 일하는 회사 앞이었다.

길을 잃었다는 그녀는 나의 설명에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멀지 않으면 같이 가주실 수 있나요?”



볼 일을 마친 그녀는 나에게 고맙다며 저녁을 같이 먹자 했다.

식사를 하며 그녀의 이름을 물었다.

그녀는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현정이에요. 이현정.”

그녀는 다시 식사를 계속했고,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내 이름은.. 안 물어..봐요?”

그녀는 방긋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제가 안 물어봤나요? 그쪽은 이름이 뭐에요?”

“김우진이에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을 하듯 입을 열었다.

“어리석을 우(愚), 다할 진(盡)?”




우진(愚盡).

어리석음이 다하다, 라는 뜻의 이름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 용하다는 무속인에게 받은 이름이라고 한다.

무속인은 내가 현모양처를 버리고, 크게 사기를 당할 운명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 어리석은 실수를 하지 말라는 의미로 지어준 이름이었다.




놀란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제 이름 한자 뜻은.. 어떻게 알았어요?”

그녀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냥.. 그럴 것 같았어요.”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모텔로 들어가 잠자리를 가졌다.

그래, 맞다.

그녀를 만난 첫 날 원나잇을 한 것이다.

그것도 만난지 단 2시간 만에..





그녀를 다시 만난 건 꼭 한 달이 지나서였다.

퇴근 시간.

회사 앞에 나타난 그녀는 그동안 잘 지냈냐며 환하게 웃었다.

내 앞에 다시 나타난 그녀가 왜 그렇게 반가웠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냥 그녀에게 끌렸다.

그녀는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고,

식당을 찾아 길을 걷던 중..

그녀가 나의 팔을 잡아 끌었다.

그녀는 모텔 건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 좀 쉬고 싶은데..”




모텔방.

침대 위에서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콘돔을 집어드는 나에게 그녀가 속삭였다.

“나 오늘 안전한 날이야.”

한 달 전, 그녀는 같은 말을 했었다.

그때 그녀와 관계 후 내심 걱정이 되었던 터라 이번에는 콘돔을 쓰고 싶었다.

“그래도 이게 더 안전하니까..”

나의 말에 그녀는 손을 뻗어 내 손 안의 콘돔을 집어 휴지통에 던져 넣으며 말했다.

“콘돔 없이 하고 싶어.”




모텔에서 나온 우리는 근처의 유명한 어묵 전문점을 찾았다.

나는 모듬 어묵탕과 어묵 김밥을 주문하며 종업원에게 말했다.

“소주도 한 병 같이 주세요.”

주문을 마치고 종원원이 뒤로 돌아서는데..

그녀가 종업원을 다시 불러세웠다.

“사장님, 잠시만요.”

“네?”

“소주 잔은 하나만 주시고요, 대신 저는 사이다 하나 주세요.”

그렇게 주문을 마친 후,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미안.. 술을 못 마시는지는 몰랐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못 먹는 건 아닌데.. 당분간 안 먹으려고.”



그날 그녀는 어묵을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우리는 대화를 거의 나누지 못했다.

이것이 20여 년 전 현정과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 * *


어두운 차 안.

현정이냐는 나의 물음에 그 여성은 살짝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당연히 현정일 리가 없었다.

처음 본 사람에게 멍청한 질문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운전석의 남자가 차를 출발시키며 말했다.

“상무님, 어디로 모실까요?”

그녀는 나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많이 추운데 어묵탕 어떠세요?”




짭짤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어묵 국물을 입에 넣었다.

뜨뜻한 국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 비어있는 위장을 자극하자 그제서야 허기가 느껴졌다.

지난 며칠 동안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했다.

어느새 입안은 군침으로 가득찼고,

나는 어묵꼬치를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부드러운 식감의 어묵이 씹히는 맛이 일품이었다.

그렇게 허겁지겁 배를 채우는 중에 문득 쓴웃음이 나왔다.

죽겠다는 다짐으로 한강 다리를 찾았는데,

지금은 어묵 맛에 감탄하며 배를 채우는 꼴이라니..

밀려오는 자괴감에 손에 들려있는 어묵꼬치를 앞접시에 내려놓고 말았다.

나는 고개를 들었고,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아..! 아까부터 나를 보고 있었구나..

나의 무안한 표정을 눈치 챈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묵 좋아하시나 봐요?”

“...”

“제 태명이 뭔지 알아요?”

나는 입안 가득한 어묵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 엄마가 날 임신한 날 어묵을 먹었는데, 그날 먹은 어묵 맛을 잊을 수가 없대요. 그래서 내 태명을 ‘어묵이’로 지었대요.”

“...”

“그런데 막상 나를 낳았는데, 얼굴이랑 온몸이 어묵처럼 쭈글쭈글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고, 아하하하!”

그녀는 혼자 박장 대소를 하며 웃었고,

그녀가 웃음을 멈췄을 때 나는 물었다.

“그런데..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안 거죠?”

“회장님이 알려주셨어요.”

“회장님?”

“자세한 이야기는 우리 천천히 하기로 해요. 어쩌면..”

그녀는 나를 향해 찡긋 웃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어쩌면, 회장님이 직접 만나주실지도 모르니까요.”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다시 차에 올랐다.

“박 실장님, 지난달에 회장님 지시로 준비한 아파트 아시죠?”

“네, 알고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주시겠어요?”


 



(다음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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