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의 최근 방영분에서 묘사된 것처럼, 실제로 장옥정과 최숙빈의 악연은 장옥정의 선공으로 시작됐다. 조선 후기 정치평론서인 이문정의 <수문록>에 따르면, 궁녀 최씨(최숙빈)가 숙종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첩보를 입수한 장옥정은 최씨에게 체벌을 가해 최씨와 태아를 위험에 빠뜨린 적이 있다. 이때는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장옥정이 중전이 된 뒤였다.
한때 인현왕후의 시녀였기 때문에 장옥정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었던 최숙빈은 이 사건을 계기로 장옥정에게 한층 더 깊은 원한을 품게 됐다. 그 뒤 왕자를 낳고 후궁이 된 최씨는 인현왕후 복위운동에 앞장섰고, 장희빈의 비행을 숙종에게 고발함으로써 장옥정을 후궁으로 격하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최숙빈의 보복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장옥정이 폐위되고 인현왕후가 복위된 지 7년 뒤인 1701년에 최숙빈은 후궁 장옥정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그 해에 인현왕후가 사망하자 최숙빈은 "왕후가 살아 있을 때 장희빈이 왕후의 죽음을 기원했다"고 숙종에게 고발했고 숙종은 장옥정에게 사약을 내렸다.
이렇게 장옥정을 죽음으로 몰아넣음으로써 최숙빈은 이 대결에서 최종적 승리를 거두었다. 장옥정이 죽은 직후에 궁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그 의미가 퇴색하기는 했지만, 최숙빈은 숙종시대 여인천하에서 최후의 1인이었다. 그가 바로, 훗날 영조 임금이 될 연잉군의 어머니였다.
아들 대(代)로 이어진 장옥정-최숙빈 대결
장옥정-최숙빈 대결이 어찌나 격렬했던지, 두 여인이 죽은 뒤에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 아들들이 대결의 바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숙종이 죽은 뒤에 벌어진 경종 임금과 연잉군의 왕권 투쟁은, 또 다른 시각에서 보면, 두 여인의 대결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장옥정의 아들인 경종은 소수파인 소론당의 지지를 받았고 최숙빈의 아들인 영조는 다수파인 노론당의 지지를 받았다. 경종은 소수파의 후원을 받았지만, 정통성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었다. 그는 숙종의 장자로서 원자 및 세자 책봉을 받았다. 그래서 그가 숙종의 뒤를 이어 제20대 주상이 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 영조가 연잉군 시절에 살았던 집인 창의궁의 터. 서울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북쪽으로 100미터 정도의 거리에 있다.
아들들의 대(代)에서 재현된 대결은 장옥정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다. 장옥정의 아들이 왕좌를 차지했기 때문에, 최숙빈의 아들에게는 더 이상 가망이 없어 보였다. 아들들이 재현한 대결은 어머니들 때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노론당은 건전한 다수파도, 건강한 보수파도 아니었다. 그들은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대결의 승부를 바꿔놓았다. 경종을 압박해서 연잉군을 후계자로 만든 것이다. 임금의 아들도 아니고 배 다른 동생에 불과한 연잉군을 후계자로 만든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뒤 경종은 연잉군이 보낸 게장을 먹고 디저트로 생감을 맛본 뒤 쓰러졌고, 그런 다음에 연잉군이 경종을 이어 왕좌를 차지했다. 1724년에 이런 일이 없었다면 영조·정조·순조·헌종·철종·고종·순종은 역사에 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최숙빈의 혈통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경종의 사망과 연잉군의 등극을 계기로 장옥정과 최숙빈의 사후(死後) 대결도 최숙빈의 승리로 끝났다. 장옥정은 아들 대에 가서도 최숙빈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모든 게 끝나는 것은 아니다. 장옥정 쪽이 승부를 뒤집지는 못했지만, 최숙빈의 손자에게 생채기를 내는 데는 성공했다. 이어지는 이야기에 주목해보자.
손자 대에까지 영향을 미친 장옥정-최숙빈 대결
16세기에 명나라의 이시진이 지은 약학 서적인 <본초강목>에서는 "게를 감과 함께 먹으면 복통이 나고 설사를 한다"고 했다. 조선과 중국 사이에서는 의학 지식의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에, 16세기에 중국에서 나온 지식이 18세기에 조선에 전해지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러므로 조선의 왕이 게장과 생감을 함께 먹고 죽었다는 것은 누가 봐도 의심할 만한 일이었다.
1724년에 연잉군이 경종에게 보낸 것은 게장이었다. 게장을 먹은 경종에게 생감을 내놓은 쪽은 궁녀들이었다. 이런 상황은 당시 사람들의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당이 의도적으로 이런 상황을 연출했을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그래서 연잉군(영조)은 왕이 된 뒤에도 지독한 정통성 시비에 시달렸다. 영조가 즉위한 지 4년 뒤에 이인좌가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것은 그런 분위기를 반영한다. 이 반란이 상당한 명분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영조는 반란을 진압한 뒤에도 오랫동안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했다.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영조의 며느리인 혜경궁 홍씨는 회고록인 <한중록>에서 이인좌의 반란으로 인한 영조의 정신적 스트레스가 거의 병적인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자신을 경종 사망사건의 배후로 바라보는 세상에 대해 영조는 어떻게든 자기의 무죄를 증명해야 했다. 그렇지 않고는 정상적으로 통치권을 행사하기 힘들었다.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나온 것 중 하나가, 갓 태어난 사도세자를 '장옥정 모자'와 연결해준 것이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태어난 지 100일 만에 세자의 거처를 창경궁 저승전으로 바꾸었다. 이곳은 경종 임금의 부부가 지내던 곳이었다. 그리고 장옥정이 머물던 전각에서 사도세자를 위한 음식을 만들도록 했다.
궁녀는 자신이 모시던 상전이 죽으면 궁을 나가야 했다. 경종 부부를 보좌하던 궁녀들도 그런 이유로 궁을 떠났다. 그런데 영조는 그런 궁녀들을 죄다 불러들여 사도세자를 양육하도록 했다. 자신을 미워하고 불편해하는 궁녀들한테 어린 아들을 맡긴 것이다.
이런 조치들을 통해 영조는 자신이 경종의 죽음에 대해 한 점 부끄럼이 없다는 점을 입증하고자 했다. '경종이 쓰던 건물에 내 아들을 두고, 경종을 보좌하던 궁녀들에게 내 아들을 맡길 정도로 나는 추호의 부끄럼도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그 대신, 영조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어린 아들과 접촉할 기회가 현격히 줄어든 것이다. 경종 쪽 궁녀들이 사도세자를 맡은 뒤로, 영조와 세자는 사실상 남남이 되고 말았다. 세자의 생모도 마찬가지였다.
훗날 영조와 사도세자가 불화를 겪은 최대 요인은 정치적 문제 때문이었다. 세자가 나이 열 살 때부터 노론당과 외척을 강도 높게 비판하여 영조를 곤란하게 만든 것이 두 부자를 멀어지게 한 최대 요인이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요인은 부자간의 소통 부족이었다. 소통 부족을 낳은 결정적 요인 중 하나는 사도세자가 어려서부터 경종 쪽 궁녀들의 손에서 성장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세자가 경종 쪽 궁녀들에게 맡겨진 뒤로 영조와 세자는 정신적인 생이별을 겪었다. 이로 인해 영조와 세자의 관계는 어색한 부자관계가 됐고, 이것은 훗날 영조가 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경종 쪽 궁녀들이 사도세자를 양육한 것이 세자의 비참한 최후를 초래한 요인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경종의 의문사에서 비롯된 정치적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영조의 노력이 오히려 아들의 불행을 초래한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