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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증발자
게시물ID : panic_10197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타로환
추천 : 3
조회수 : 85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20/11/19 23: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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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마저 옮기고 이리 와서 냉장고 좀 같이 들지"

 

젊은 남자는 짐을 옮기던 중, 무언가를 발견하곤 잠시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런 와중에 파트너가 말을 걸자 반사적으로 놀라며 대답했다.

 

"아, 넷!"

 

"진혁군, 의욕이 넘치는 건 고맙지만 목소리는 낮춰주겠나"

 

"... 아차차, 실수했네요. 주의할게요."

 

새벽 시간, 동네를 잠식한 고요함을 깨지 않기 위해 조심스러우면서도 분주한 움직임이 행해졌다.

두 남자는 흡사 야반도주를 하는 사람들처럼 1시간 내내 조용히 짐을 처리해나갔다.

 

"후... 아저씨 이게 마지막이에요."

 

진혁이라 불리는 젊은 남자는 이마에 고인 땀을 옷깃으로 대충 닦고는 파트너로 보이는 중년의 아저씨에게 말했다.

 

"고생 많았어, 그것만 차에 싣고 회사로 돌아가자고"

 

"네, 그래도 이번에는 짐이 얼마 안 되는 집이어서 금방 끝났네요."

 

"그래, 로테이션으로 돌아온 이사 대행 근무도 이제 거의 끝나가는데 숨 좀 돌릴 수 있겠군"

 

짐을 가득 실은 트럭은 동네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그들이 사라진 뒤에도 동네는 여전히 고요했고, 그들의 손길이 닿은 집은 고요 속에 어울리는 빈집이 되어버렸다.

 

트럭은 고가도로를 지나 4차선에서 우측으로 이동했다. 주위는 도로를 비추는 조명과 기사 식당의 불빛만이 거리를 밝혀주고 있었다. 조금 이동하자 앞에 보이는 신호등은 곧 황색에서 적색 점멸등으로 바뀌려 했다. 아저씨는 그걸 보고 차선 앞까지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러고 보니, 이 일은 언제까지 한다고 했지?"

 

아저씨가 진혁에게 말했다.

 

"저 앞으로 세 달 있으면 복학할 것 같아요."

 

"음, 그래? 같이 일할 날이 얼마 안 남았구먼... 근데 전공이 뭐라고?"

 

"국문과요. 소설가가 되는 게 꿈이라..."

 

"글 좀 쓰나?"

 

"하하, 아니요. 여태까지 꽤 많은 글을 써봤지만, 경험과 무관하게 글이라는 것이 참, 언제 쓰더라도 어렵더라고요."

 

"이해해, 글 쓰는 게 보통 일은 아니지"

 

"그러게요. 특히나 소재 찾는 게 제일 어려워요. 아, 소재하니까 생각난 건데요... 이 회사에 대해 궁금한 게 조금 있어요."

 

"뭔가?"

 

"여기서 일한 지 얼마 안 됐지만, 몇 달 다녀보니까 흥미로운 점이 몇 가지 있더라고요. 로테이션 근무가 어떤 형태로 돌아가는지 자세히 알고 싶기도 하고... 또, 증발자들이 저희 회사를 찾아오는 경로 같은 것도 궁금하고요."

 

"흠... 그리 대단할 건 없는데"

 

아저씨는 대답을 잠시 미룬 뒤,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뀐 것을 보고 액셀을 밟았다. 20초쯤 지났을 때 아저씨가 진혁에게 말했다.

 

"오늘 약속 있나?"

 

"저요? 이번 주는 딱히 약속 없어요."

 

"그럼, 회사에 짐 좀 내리고 술 한잔 어떤가? 내가 사지. 아무래도 늙다리랑 먹는 게 좀 그럴려나?"

 

"에이, 저 그런 거 신경 쓰는 사람 아니에요. 사주시면 저야 고맙죠."

 

"붙임성이 좋구먼, 질문에 대한 답은 거기서 알려주지"

 

두 사람은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는 회사 건물로 들어가 의뢰인의 짐을 담당 직원에게 인계하고 근처 술집으로 향했다.

술집은 요즘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는 일본 느낌의 선술집이었다. 두 사람은 직원의 안내에 따라 2인용 테이블에 앉았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가게라 와보긴 했지만... 나도 여기는 처음이라 어떤 메뉴를 시켜야 될지 모르겠군... 혹시 먹고 싶은 게 있나?"

 

"음, 저는 가리는 음식이 없어서 다 좋기는 한데... 무난하다고 생각되는 건... 고등어구이에 모듬꼬치 같은데, 어떠세요?"

 

"좋아."

 

진혁은 벨을 눌러 직원을 불렀다. 고등어구이와 모듬꼬치, 소주를 주문했다. 아저씨는 진혁이 건네주는 물컵을 받았다. 일을 마치고 처음 마시는 물이기에 그는 단숨에 물컵을 비웠다.

 

"아까 한 질문 말인데 진혁군. 자네는 이 일을 어떻게 알아보고 들어왔나?"

 

"제가 평소에 다큐멘터리 채널을 즐겨 보는데요. 어느 날 우연히 '증발하는 사람들'이라는 다큐를 보게 되었어요. 거기에는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증발자에 대한 얘기가 잠깐 소개되었는데... 음... 가족과의 연이라든지, 지인이라든지, 자신이 여태까지 살아온 모든 발자취를 끊고, 브로커에게 일정 금액을 줘서 새 신분과 직장을 얻는다는 그런 내용이었어요. 그걸 보고 저는 한국에도 저런 일이 있을까? 호기심이 생겼죠. 그래서 이래저래 검색하다 보니까 얼떨결에 여기까지 오게 된 거예요."


"흠... 그랬었군. 지금은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원래 이 회사는 알바를 고용하지 않았어. 알바생이 어디 신고라도 하는 날엔 회사가 조금 귀찮아지거든, 아무래도 합법적인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회사에 의뢰인들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라 이사 대행 쪽에 일손이 부족해진 것이지"

 

아저씨는 직원이 들고 온 음식과 소주를 보고 잠시 말을 멈췄다. 음식 세팅이 완료되자 진혁은 재빨리 소주를 아저씨에게 따라주었다.

아저씨 또한 소주를 받은 다음 진혁의 술잔을 가득 채워줬다. 두 사람은 잔을 부딪히고 목에 털어냈다. 그다음 진혁이 말했다.

 

"저는 뭐 알바 치고는 월급도 괜찮고, 이 일이 신고할 만큼 불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요."

 

"그래, 자네는 만족하는 것 같아서 얘기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럼, 슬슬 얘기해볼까? 먼저 로테이션 근무는 크게 네 가지야. 각 분기별로 업무가 달라지지. 첫 번째 업무는 증발을 선택한 의뢰인이 회사로 찾아오면 비용적인 부분을 상담해"

 

"비용적인 부분은 어떻게 구분되나요?"

 

"거주지와 새로운 신분, 이사, 직장 이 모든 것을 제공해 주면 의뢰인이 부담하는 비용이 커지고 이 중에서 항목이 하나씩 제외될 때마다 부담은 적어져. 물론 각 항목에는 세부적인 부분도 있어, 대체로 이사해야 할 짐의 부피나 거주지의 면적 등이 해당되지"

 

"그렇군요. 그나저나 직장까지 제공되는 건 조금 신기한 것 같아요. 어디 증발자들만 모여서 일하는 직장이라도 마련되어 있는 건가요?"

 

"대부분은 그래, 증발자라고 해도 기존의 삶에서 터득한 기술은 우리 회사에 활용할 수 있는 경우가 많거든, 이 회사가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으니까..."

 

"오, 대표님이 똑똑하시네요."

 

"뭐, 그렇지... 아아, 그리고 때로는 한국에 사는 것조차 꺼려 하는 증발자들도 있어. 우연이라도 길 가다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 때문이겠지, 이런 증발자들은 비용을 많이 받진 않아. 다른 나라와 연결해 주지"

 

"다른 나라요? 어떻게요?"

 

"자네, 아까 일본 얘기를 했었지? 일본으로 예를 들어볼까. 일본의 동업 회사에 한국인 증발자를 연결 시켜주면 아까 얘기한 거주지나, 신분, 직장 등을 그 나라에서 대신 제공을 해줘.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하면... 직장은 보통 후쿠시마 원전 지역의 방역 업무로 고용하거든, 대신 연봉은 후하게 준다고 알고 있고"

 

"..."

 

"한국을 떠나고 싶어 하는 증발자에겐 좋은 선택지가 되겠지만, 일본에 있어서도 자국민들을 지킬 수 있는 메리트가 큰 셈이지"

 

"아..."

 

"대충 첫 번째가 이렇고, 두 번째가 우리하고 하고 있는 이번 달 로테이션의 이사 대행이야. 야반도주를 원하는 의뢰인들이 대부분이라 오늘처럼 조용하고 신속하게 밤 이사가 행해지는 것이지"

 

"네, 저야 뭐 알바생이라 이사 대행밖에 안 해봐서 이건 잘 알죠."

 

"허허 불만이 아예 없는 건 아닌가 보군, 그럼 바로 세 번째와 네 번째로 넘어가지. 슬슬 짐작이 가겠지만 나머지는 별거 없어. 의뢰인들의 새로운 거주지를 물색하는 작업과 적절한 직장을 구해주는 업무로 나뉘는 거지"

 

"이제 보니 로테이션 근무는 사실상 이사 대행 업무가 가장 힘드니까 회사 직원들을 배려하기 위한 시스템인 거군요?"

 

"정확해. 연봉은 똑같은데, 누구는 이사 대행 근무만 계속한다면 불공평하지 않겠나?"

 

"와, 전체적으로 감이 잡히네요. 혹시 나중에 소설 소재로 써도 될까요?"

 

"좋을 대로 해, 회사 상호명만 잘 바꿔주고"

 

"하핫 당연하죠"

 

"자, 이제 의뢰인이 우리 회사를 찾아오는 루트를 말해줄 텐데... 사실 말해줄게 없기도 해"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마법 같은 얘기를 하는 건 아니지만...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라는 생각이 간절한 사람들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우리 회사를 찾는 게 어렵지 않다더군"

 

"..."

 

"나도 몇 번 의뢰인에게 물어본 적이 있지만... 본인이 어떻게 찾아왔는지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어"

 

"그거 참 묘하네요..."

 

두 사람은 얘기를 나누는 동안 소주 한 병을 비워냈다. 고등어구이와 모듬꼬치 또한 소주와 어울렸다. 아저씨는 소주를 한 병 더 주문했다. 잠시 후 직원이 소주 병을 가져다주었고, 둘은 다시 잔을 부딪혔다.

 

"오랜만에 젊은 친구랑 마시니 술이 달구만"

 

"아저씨도 그런가요? 저도 오랜만에 연장자와 마시니까 달게 느껴져요."

 

"허허허, 잘 받아주네?"

 

"하하, 정말이에요. 아저씨는 근데 이 회사에 몇 년 정도 일하셨어요?"

 

"내가 올해로... 19년 정도 됐나?"

 

"와... 19년이나 되셨어요? 이 일은 어떻게 하게 되신 건지 여쭤봐도 되나요?"

 

"..."

 

"그리 재밌는 얘기는 아니지만 얘기해볼까?"

 

"네, 괜찮으면 소재로 써도 되죠?"

 

"허헛, 이 친구 참, 마음대로 해"

 

"나도 가정이 있었어... 그땐 아내와 5살 난 아들이 있었고, 내 회사도 가지고 있었지..."

 

"와, 회사 대표셨어요?"

 

"그래, 나름 잘나가는 회사 대표였지. 하지만 IMF 경제 위기가 도래했고... 난 허망하게 망해버렸어... 그 뒤로 일용직 일을 전전하며 생활했지...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현장으로 나가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이웃 주민 중에 알고 지내던 사람이 전화를 하고는 이상한 소릴 하더군"

 

"박 씨, 오늘 이사 가는가?"

 

"이사라니? 이사 안 가는데?"

 

"이상하다... 저기, 자네 집 맞는 거 같은데..."

 

"뭔데 그래?"

 

"일단, 자네 집 좀 빨리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는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불안해졌어, 마음속으로는 설마... 아니겠지... 하면서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집까지 달렸지"

 

"..."

 

"가보니까... 정말로 집 안에 있던 가구며 돈이며 싹 다 사라지고 없더군... 아내가 아들마저 데리고 떠난 거지..."

 

아저씨는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자신의 잔에 소주를 따라 마셨다. 진혁은 아저씨의 말에 가슴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잠도 안 오고 미치는 줄 알았어, 밤 낮을 가리지 않고 실성한 사람처럼 미친 듯이 산을 올라가길 반복하는가 하면, 목소리가 쉴 정도로 울기도 하고 소릴 지르기도 했지, 그런 짓을 몇 달이나 반복하고 있던 겨울의 새벽이었어. 그날도 어김없이 인근 산을 미친 듯이 뛰어올랐지. 몸을 혹사시키면 혹시라도 잠이 올까 싶어서... 그리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고통이 다른 고통을 잠시나마 덮어주는 게 좋았거든. 그저 생각이라는 걸 하기 싫었던 거야, 중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면 손으로 기어서라도 올라가고 그랬지... 그러다가 산 중턱쯤 다다랐을 때 나도 모르게 정신을 잃었어, 눈이 떠졌을 땐 춥지도 않고... 힘들지도 않고 이상하리만큼 개운한 느낌이 드는 게... 왠지 모를 평온함이 잠깐 찾아왔어... 가까스로 정신을 찾을 수 있던 나는 다음 날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지"

 

"..."

 

"결국엔 나도 의뢰인이었어... 그리고 다른 사람들처럼 이 회사를 어떻게 찾아왔었는지 기억나는 것도 없고 말이야"

 

진혁은 소주잔을 든 아저씨의 손을 보았다. 그의 손은 주름졌고, 상처가 많으며, 굳은살이 곳곳에 배어있었다.

그의 행색과 인생사에 진혁은 눈물이 맺혔다. 눈물은 앞을 흐리게 했고, 진혁은 굳이 맺혀있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앞에 있는 아저씨의 얼굴을 뚜렷하게 보고 있기가 힘들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마음이 너무 쓰라렸기 때문이다.

 

"허허, 뭘 울고 그러나. 다 지난 일인데"

 

"..."

 

"나도 질문하나 해도 되나?"

 

"... 네?"

 

"오늘 의뢰인의 집에서 짐을 옮기고 있었을 때, 잠깐 뭘 골똘히 보고 있던 것 같은데... 그게 뭐였지?"

 

진혁은 씁쓸한 웃음을 짓고 말했다.

 

"증발자의 가족사진이요. 사진에 아빠가 없더라고요... 실은... 저도 없거든요."

 

"... 그랬구먼"

 

"아저씨, 증발자가 다시 가족을 찾는 일이 있었나요? 혹은 우연히라도 가족과 만나는 일이라든지요."

 

"내가 아는 한, 단 한 번도 없었어. 증발자의 삶을 선택한 이상 웬만해선 돌아가려 하지 않거든, 다시 시작될 배신, 두려움, 슬픔, 그런 것들을 감내하기엔 증발자로써의 삶이 편해진 탓이겠지"

 

"그렇군요... 아픈 얘기를 자꾸 들춰내서 죄송하지만, 혹시 아들 이름 기억하시나요?"

 

"... 기억하고 말고... 자네와 같아... 박진혁"

 

진혁은 맺혀있던 눈물이 터져 나오고야 말았다. 그리곤 언젠가 자신의 엄마에게 들었던 얘기를 떠올리며 확신에 찬 어투로 말했다.

 

"아저씨가 증발자 이전에 사용하시던 이름은 박...진욱이고요?"

 

"...!"

 

아저씨는 순간 들고 있던 잔을 떨어트리며 몹시 놀란 표정으로 진혁을 바라봤다.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하셨던... 증발자가 우연히 가족을 만나는 일이... 지금 일어난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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