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왕(東城王)의 이름은 모대(牟大)[혹은 마모(摩牟)라고도 한다.]이니, 문주왕(文周王)의 동생 곤지(昆支)의 아들이다. 담력이 뛰어났고,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이었다. 삼근왕(三斤王)이 돌아가시자 왕위에 올랐다.
東城王 諱牟大[或作摩牟] 文周王弟昆支之子 膽力過人 善射 百發百中 三斤王薨 卽位
10년(서기 488), 위(魏)나라가 병사를 보내 쳐들어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15년(서기 493) 봄 3월, 임금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요청하였다. 신라왕이 이찬 비지(比智)의 딸을 시집 보냈다.
十五年 春三月 王遣使新羅請婚 羅王以伊飡比智女 歸之
22년(서기 500) 봄, 궁궐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을 세웠는데 높이가 다섯 길이었다. 또 연못을 파고 진기한 새들을 길렀다. 간언하는 신하들이 이에 항의하여 글을 올렸으나 임금이 대답하지 않고, 다시 간언하는 자가 있을까 염려하여 궁궐 문을 닫아버렸다.
二十二年 春 起臨流閣於宮東 高五丈 又穿池養奇禽 諫臣抗疏不報 恐有復諫者 閉宮門
11월, 임금이 웅천의 북쪽 벌판에서 사냥을 하였고, 또 사비의 서쪽 벌판에서 사냥하였는데 큰 눈에 길이 막혀 마포촌(馬浦村)에서 묵었다. 처음에 임금이 백가에게 가림성을 지키게 하였을 때 백가는 가기를 원하지 않아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자 했으나 임금은 이를 승낙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백가는 임금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때에 와서 백가가 사람을 시켜 임금을 칼로 찔렀고, 12월에 이르러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동성왕이라 하였다
[『책부원귀(冊府元龜)』에는 “남제 건원(建元) 2년, 백제왕 모도(牟都)가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하늘의 명령을 새로 받드니 혜택이 먼 곳까지 미치고 있다. 모도는 대대로 동쪽의 번신으로 있으면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기의 직분을 다하고 있으므로,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을 제수한다.’라고 하였다. 또 영명(永明) 8년(서기 490) 백제왕 모대(牟大)가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렸다. 이에 알자복야(謁者僕射) 손부(孫副)를 보내 모대에게 그의 죽은 할아버지 모도의 관작을 계승케 하고 백제왕으로 삼는 책명을 내리면서 말하기를 ‘아아! 그대는 대대로 충성과 근면을 이어 받았으니 그 정성이 멀리까지 드러나 보였다. 바닷길은 고요하고 조공이 변함없기를 바라며, 법전에 따라 책명을 잇게 하니 공경하는 마음으로 받을 일이다. 아름다운 국가의 위업을 잇는 것이니 어찌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행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백제왕(行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으로 삼는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삼한고기(三韓古記)』에는 모도가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 없고, 또 모대는 개로왕의 손자요, 개로왕의 둘째 아들인 곤지의 아들로서, 그의 할아버지가 모도라고는 말하지 않았으니, 『제서(齊書)』에 기록되어 있는 바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十一月 獵於熊川北原 又田於泗沘西原 阻大雪 宿於馬浦村 初 王以苩加鎭加林城 加不欲往 辭以疾 王不許 是以 怨王 至是 使人刺王 至十二月乃薨 諡曰東城王[冊府元龜云 南濟建元二年 百濟王牟都 遣使貢獻 詔曰 寶命惟新 澤被絶域 牟都世蕃東表 守職遐外 可卽授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 又永明八年 百濟王牟大遣使上表 遣謁者僕射孫副 策命大襲亡祖父牟都 爲百濟王 曰 於戱 惟爾世襲忠勤 誠著遐表 海路肅澄 要貢無替 式循彛典 用纂顯命 往敬哉 其敬膺休業 可不愼歟 行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 而 三韓古記無牟都爲王之事 又按牟大 盖鹵王之孫 盖鹵第二子昆支之子 不言其祖牟都 則 齊書 所載 不可不疑]
이것이 삼국사기 동성왕 기록 중에서 중요한 것을 뽑은 것입니다..
주목할 점은..
1. 기존의 백제왕들이 여씨 성을 가지고 외교를 했는데 이 시기는 특이하게 모씨성을 가지고 외교를 했습니다
( 양직공도에 여씨로 기록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중국 정사는 모씨를 성으로 외교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2. 북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군이라고 하는 측면이 있지만.. 어찌된 일인지 폭군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3. 혈연 부분에서 김부식이 잘 모르겠다고 얼버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례적으로 백제왕임에도 불구하고 신라왕족과 결혼을 합니다.
4. 백가에 의한 암살 부분.. 단순한 해프닝 비슷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1+2+3 을 종합해보면 반도 백제인들의 입장에선 동성왕 죽이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 이라는 것을 시사합니다.
이런 저런 감은 잡히는데 2% 부족..많은 의문을 풀어 줄 수 있는 것은 일본서기입니다. 후지와라 사다모토가 한 말대로 열도가 마한 진한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면
많은 수수께끼를 풀어주는 책입니다만..
일본서기 제작 방법은.. 실제 반도의 백제 신라의 역사를 바탕으로 가공의 천황을 만드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가설을 받아들이시기 힘든 분들은 뭐 그럴 수도 있으려니 하고 아래 동성왕과 같은 시기
일본서기에 등재된 무열 천황의 기록을 봅니다.
일본서기 무열천황
夏四月 百濟王遣斯我君進調 別表曰 前進調使麻那者 非百濟國主之骨族也 故謹遣斯我 奉事於朝 遂有子 曰法師君 是倭君之先也
백제가 사아군을 보내면서 표를 올려 말하기를 전에 보낸 마나는 백제왕의 골족이 아니라서 사아를 보내서 봉사하게 하겠습니다. 후에 자식이 있어 법사군이라 하였다. 이는 왜군의 선조다.
일본서기 무열 7년
물론, 이 시기에 백제 왕자가 가서 봉사해야할 왜왕 따위는 없습니다. 양직공도에 기록된 담로제에 따라 열도에도 백제가 후왕을 파견했는데
그 기록의 원형을 변형시켜서 기록하는 것이 일본서기.. 실제 일본서기 창작자들이 보았을 원문은 동성왕의 후계자라 열도 후왕이 된 마나 ( 마대의 아이 ) 는 백제왕의 골족이 아니기 때문에 사마왕의 아이가 열도 후왕이 된다.. 였을 것입니다.
일본서기 이면 기록을 유추해 보면.. 백제 동성왕의 복잡한 기록들이 풀리게 되는 것입니다.
八年春三月 使女形나 坐平板上 牽馬就前遊牝 觀女不淨 沾濕者殺 不濕者沒爲官婢 以此爲樂 及此時 穿池起苑 以盛禽獸 而好田獵 走狗試馬 ( 하략..)
(천황이) 여자를 발가벗기어 판위에 앉게 한후 말을 끌고 와서 교미를 시켰다. 여자를 보고 흘리는(?) 자는 죽였고.. 흘리지 않는 자는 노비로 삼았다. 이를 즐거움으로 삼았다. 이 때에 이르러 연못을 파고 동산을 만들어 새와 짐승을 채웠다. 사냥하기를 좋아하고 개를 달리게 하고 말을 시승하는 것을 좋아했다.
위의 무열천황 8년 기록은 물론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본서기를 만든 사람들은 낯뜨거운 천황 아부 문장이 대부분인데 이 부분은 참 특이합니다. 어째서 저런 악담을 늘어놓은 것일까요? 그런데 뒷 부분 연못을 파고 동산을 만들어 새와 짐승을 채웠다는 부분은 동성왕을 폭군으로 묘사할 때에 사용된 부분입니다. 즉.. 일본서기 그리고 삼국사기는 백제의 옛날 역사책.. 같은 책을 보고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고 일본서기는 그 자료를 바탕으로 가공의 무열 천황이란 것을 만들어서 변형 시켜서 기록한 것이고 김부식은 그대로 적었을 것입니다. 이 백제 신찬.. 백제 본기 등을 만들었을 옛 백제인들은 왜 동성왕에 대한 이런 험담을 늘어놓은 것일까요.. 자료를 종합해보면 동성왕은 순수 백제인이 아닌 신라인과의 혼혈일 가능성이 높으며
본인 스스로 백제인이라기 보다는 신라인의 의식이 강해서 기존의 여씨가 아닌 다른 성씨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이를 설명해 주는 것이 일본인들이 왜인이 무덤이라고 추정하는 나주 고분군인데요.. 이것이 동성왕 계열 유물이라고 하는 설명은 한번 드렸던 것 같고.. 안 읽으신 분들은 아래 링크 읽으시기를..
오히려 제가 궁금한데 위의 옹관은 백제 양식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특이하긴 합니다만
한반도에서는 고조선 시대부터 내려오던 양식입니다.. 왜 저기에서 왜인이 나오는지..알다가도 모를..
백제왕을 했지만 본인이 백제인이라기 보다는 신라인이라는 의식이 강했던 동성왕과 연관되어
생각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P.S 댓글이 달리지 않아 본문에 정의로운님 댓글 질문에 대한 답을 합니다 ..
100% 순수 신라인이라기 보다는 신라인의 피가 섞여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중요한건 본인의 의식인데 백제인이라기 보다는 신라인으로서 자신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