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6월이면 나오는 사진이 있습니다. 바로 연세대 이한열 학생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모습입니다. 이한열은 1987년 6월 10일 열릴 '고문살인 은폐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를 앞두고 연세대에서 열린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후의 시위 도중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아 사경을 헤매다가 7월 5일 사망했습니다. 이한열의 죽음은 6.10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고, 나아가 6.29 선언을 이끄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매년 6월이 되면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사진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6,10 항쟁은 점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1926년 6,10 만세운동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2013년 6월 10일에 1926년과 1987년의 6월 10일 그날의 사건을 재조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6.10 만세운동을 조선총독부처럼 규정했던 역대 정권들' 1926년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장례식을 기해 전국적인 항일운동이 전개됩니다. 순종의 상여가 통과하는 종로를 시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만세를 부르고, 격문을 살포해, 순종의 인산에 참여한 대중의 호응을 이끌어 냈습니다. 6.10 만세운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3.1 운동 이후에 침체했던 항일 투쟁의 불길이 다시 오르게 됐던 계기가 됐다는 점입니다. 그런 점을 의식해 이날 일본은 경찰은 물론이고 7천명의 육해군을 총동원해 6.10 만세운동을 막았고, 시위 참가자 5천명을 연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160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일본 경찰이 만세 시위를 벌이려는 군중을 진압하고 있다.
이런 일본의 강력한 진압을 통해 6.10 만세운동이 일제강점기에 얼마나 중요한 대규모 항일투쟁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역사에서 6.10 만세운동은 그리 크게 주목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6.10 만세운동에 조선 공산당이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1926년 조선공산당은 노동자의 날에 맞추어 대규모 투쟁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4월 25일 순종이 사망합니다. 조선공산당은 순종의 장례식인 6월 10일에 많은 군중이 모일 것을 예상, 이날 전국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하려고 계획을 수정합니다. 조선공산당은 '6.10운동 투쟁지도특별위원회'(총책임자 권오설)를 조직하여 5만장의 격문을 인쇄하는 등 치밀한 계획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됩니다. 조선공산당 지도부의 대규모 검거에도 천도교와 학생들의 참여로 산발적이지만 인천,순창,병영,통영,원산,개성,홍성,전주,신천,평양,마산,공주,하동,당진,강경,구례 등에서 시위가 벌어졌으며, 전국적으로 일제에 대한 투쟁의 불길이 다시 오르게 된 사건이 6.10 만세운동입니다.
▲ 순종의 상여를 들고 가는 군중을 일본 경찰이 지키고 서 있는 모습.
이처럼 6.10 만세운동은 일제 강점기에 있던 대규모 항일 투쟁 중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였지만, 당시 지도부가 조선공산당이라는 이유만으로 반공을 주장하던 역대 정권에서 폄하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은 6.10 만세운동이 천도교와 같은 민족세력,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같은 학생 조직이 어울려 비록 각자가 가진 사상은 달랐지만, 힘을 합쳐 반일민족운동을 전개하려 했다는 부분입니다. <6.10 만세운동 격문에 나온 구호들>
대한독립운동자여 단결하라!
일체 납세를 거부하자!
일본물자를 배척하자!
조선인 관리는 일체 퇴직하라!
일본인 공장의 직공은 총파업하라!
일본인 지주에게 소작료를 바치지 말라!
일본인 교원에게 배우지 말자!
일본인 상인과의 관계를 단절하자!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군대와 헌병을 철거하라!
재옥 혁명수를 석방하라!
보통교육은 의무교육으로!
교육용어는 조선어로!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철폐하라!
일본 이민제를 철폐하라!
6.10 만세운동 당시 격문이나 구호를 보면 노동,교육,민족,자유 등 다양한 주장이 전개됐습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6.10 만세운동을 가리켜 '학생들이 잘못된 사상에 물들어 감정적으로 나온 불미스런 사건'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여기에 역대 정권은 그날 사전에 발각돼 시위에 참여하지 못한 조선공산당을 아예 배제하고, 학생운동만을 강조했습니다. 6.10 만세운동은 조선공산당뿐만 아니라, 임시정부, 병인의용대,학생들이 조직적으로 연결하여 목적의식을 갖고 추진했던 항일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사회주의,민족주의 세력이 결합하여 신간회가 조직돼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와 청소년,여성의 평등 등의 다양한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중요한 사건을 과거 군사,독재 정권은 공산당이 개입됐다는 이유만으로 단순히 학생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는 식으로 평가 절하했습니다. 3.1운동처럼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지 못했지만, 이는 일본의 조직적인 탄압과 회유정책에 있었다는 점을 쏙 뺐다는 사실은 조선총독부처럼 항일투쟁을 어떻게 하든 숨기려는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 6.10 항쟁보다 전두환의 영광을 내세우는 나라' 매년 6월 10일이면 언론들은 기념식이나 보여주고, 그날 참여했던 인물들이 정치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느냐만 조명합니다. 그러나 6.10 항쟁의 가장 큰 의의는 국내보다 외국에서 더 많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전국적으로 연인원 500만 명 이상이 참여해 20일 동안 전개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었던 6.10항쟁은 군사정권에서 문민정권으로 독재에서 민주로 나아가는 한국 현대사와 정치사의 큰 분수령 중의 하나였습니다.
▲1987년 6월 10일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노태우
1987년 6월 10일 전국적으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규탄하는 시위가 계획됐습니다. 이날은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가 선출된 날이기도 합니다. 6.10 항쟁의 의미를 축소하려는 세력들은 전두환이 주장했던 말을 떠올리며 그를 옹호하기도 합니다. "집권여당이 대통령 재임 중에 전당대회에서 다음 대통령 후보를 뽑았다는 사실 자체가 40년 헌정사에 처음 있는 일로서 새로운 민주전통을 세우는 굳건한 초석이 되는 것" (전두환)집권여당이 전당대회를 통해 다음 대통령 후보를 뽑았다는 사실 자체가 민주전통이라고 주장했던 전두환의 말이 과연 사실일까요? 전두환이 주장했던 40년 헌정사에 처음 있는 민정당 대통령 후보를 뽑는 투표지에는 '1 노태우'라고만 적혀 있었고, 투표용지에 붓두껍으로 찬반을 표시하는 '기표식 투표'방식이었습니다. 후보 한 명만이 나와 대통령 후보로 결정된 사실이 도대체 얼마나 민주적인 일인지 아이엠피터는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 민주당과 민추협이 공동주최한 '영구집권음모규탄대회'가 열린 민추협사무실 주변에서 경찰과 시민들이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 장면, 출처:동아일보.
4억 원이라는 엄청난 돈을 들여 예능 PD와 가수, 개그맨이 동원된 민정당 대통령 후보 전당대회는 전두환을 칭송하는 자리였지, 민주적인 정당의 모습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노태우는 후보 수락 연설에서 자신의 정책은 말도 하지 않고 오로지 "짧은 시간에 빛나는 열매를 맺게 해 우리나라와 민정당의 오늘이 있게 만드신 전두환 총재 각하에게 다 함께 영광의 박수를 보내자고"고 제의하기도 했습니다.
▲6월 항쟁 당시의 모습과 진압하는 경찰.
6.29 선언이 마치 국민의 민심을 받아들인 전두환의 결단처럼 방송과 언론에 나오기도 했지만, 그 이면에는 전국적으로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동참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투쟁한 결과에 불과합니다. 대화와 타협의 정신을 운운했던 전두환은 전날 젊은 청년의 머리에 최루탄을 발사했던 인물이었고, 체육관 선거를 마치 민주적인 국민의 절차와 권리라고 주장하기도 했었습니다. 또한 이미 군을 투입해 시위대를 해산하려는 엄청난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었습니다.독재와 군사정권을 막아내려는 시민과 학생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폭력과 불법, 빨갱이의 선동으로 바꿔놓고서는 오로지 전두환의 영광만 잠실 체육관에 울려 퍼졌던 1987년 6월 10일이었습니다. ' 6월 10일을 막었던 자들' 광화문에서는 6월 10일 민주항쟁을 기념하며 제22회 민족민주열사 희생자 범국민추모대회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이날 시민단체의 행사장 건너편에는 보수대연합의 시위도 있었습니다.
▲광화문에서 열린 어버이연합 등 보수대연합의 시위.출처:민중의 소리.
어버이연합 등 보수 세력들은 민족민주열사 희생자 범국민 추모제를 '남파간첩 빨치산 추모제'라고 주장하며 행사를 방해하고 참여했던 시민을 폭행하기도 했습니다. 6,10 항쟁은 대한민국 정치 현대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저들의 주장대로라면 전두환은 남파간첩 빨치산들이 일으킨 간첩 활동에 떠밀려 6.29선언을 한 꼴이 됩니다. 앞뒤가 맞지 않은 억지 주장을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수 세력이 지지하는 대통령과 꼭 닮았습니다.
6.10민주항쟁 기념식은 정부 공식행사입니다. 그런데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8년부터 2012년 임기가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직접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6월 항쟁은 반쪽의 성공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6월 항쟁의 중심이었던 시민이 사라지고 제대로된 정권교체도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치,사회,문화,노동의 관점에서 민주주의 이념과 제도가 뿌리내리는 결과를 만든 것이 6.10민주항쟁이었습니다. 6.10항쟁을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외면하는 세력들에게는 역사를 통해 민주주의를 계승 발전하는 모습이 꼴보기 싫습니다. 그것은 독재 권력을 휘두르는 일에 거추장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늘 '반공'을 앞세워 민주주의를 여전히 탄압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6.10민주항쟁을 정부공식 기념일로 지정하면서 "6.10의 승리는 축적된 역사의 결실입니다. 우리 국민은 오랜 동안 많은 항쟁의 역사를 축적하여 왔습니다. 부패하고 무능한 전제왕권의 학정에 맞섰던 민생.민권 투쟁, 일본 제국주의에 맞섰던 수많은 민족독립 투쟁, 그리고 군사독재에 맞선 꾸준한 민주주의 투쟁들이 그것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6월 10일 만세운동과 6.10 민주항쟁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부패한 정권, 일본 제국주의, 독재 정권을 국민의 손으로 몰아내려는 의지와 희생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어버이연합 등 보수 극우 단체 회원이 범국민추모대회에 참가한 시민을 폭행하는 장면. 출처:민중의 소리.
6.10 만세시위의 주동인물로 검거됐던 박하균은 불온문서의 내용을 묻는 동기와 목적을 묻는 일제 재판관에게 '그것이 조선독립문서(朝鮮獨立文書)이지 어디 불온문서인가, 독립문서를 불온문서(不穩文書)라 하니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가?'라고 말했습니다. 1926년 6월에 일어난 6.10만세운동을 막았던 세력이 누굽니까?
바로 일본 제국주의 경찰과 군인들이었습니다.1987년 6월에 일어난 6.10항쟁을 막았던 세력은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이었습니다. 수십 년전 6월 10일에 자유와 독립, 민주주의를 외쳤던 함성과 열망은 여전히 '불온 문서'와 '남파간첩 빨갱이'로 남아 있습니다. 국민이 목터져라 외쳤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짓밟는 세력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습니다. 6월 10일은 단순한 기념일이 아닙니다. 오늘은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신념을 지키겠다고 외쳤던 날입니다. 이날을 꼭 지키고 기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