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상군 유괴 살인사건
사건의 시작은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거주했으며 사건당시 1980년 11월 13일,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던 이윤상 군은 오후 4시경, 학교 선생님과의 상담을 위해 외출을하였다가 납치를 당하는 것으로 사건이 시작됩니다.
당시 3살때 부터 소아마비를 앓아 왼쪽 다리가 불편했던 14살 이윤상군은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학교로 진학했음에도 상위의 성적을 거두던 전도유망하고 성실한 학생이었다고합니다.
이윤상군은 3살때 부터 앓았던 "소아마비" 때문에 왼쪽다리를 저는 상태였기 때문에 납치 당시 범인으로부터 쉽게 도망칠 수 없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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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날 "오후 8시"
범인에게 첫번째 협박전화가 걸려옵니다.
"우리는 전과자들이다. 밀항자금이 필요하니 자식이 죽지않길 바란다면 4천만원을 준비하라" 목소리는 중후한 남성의 목소리였다. 두번째 협박전화도 같은 내용이였다.
"오후 11시" 세번째 협박전화가 다시 걸려옵니다다.
"나는 당신 때문에 망한 사람중 한 사람이다. 당신 아들을 살리려면 4천만원을 준비해라
이번에는 여자의 목소리였습니다. 이후 전화는 모두 여자의 목소리로 이루어졌습니다.
이윤상 군의 부모는 4천만원은 마련할 수 없고 2천만원을 주겠다고 하자 다음날 낮 12시에 전화하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윤상군이 유괴된 다음날인 11월 14일
이윤상 군의 부모는 경찰에 신고하였고 경찰이 자택의 집전화에 녹음장치를 부착하였고, 형사 2명을 잠복시켜 목소리 감청을 시도합니다.
그리고 11월 16일 이윤상의 부모가 목소리를 들려달라고 요청하자
오후 6시 40분경 전화가 걸려옵니다.
"살려주세요, 이분들이 시키는대로 하지않으면 나는 죽어요."
이윤상군의 목소리를 확인한 가족은
곧 이윤상의 누나가 2천만원을 준비하여 약속된 장소로 나갔으나
"범인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후 해가 지나 4월 6일까지 유괴 협박은 계속되었으며
"6차례의 협박편지,62건의 협박전화가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5번째 편지에는 "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했으나 살아는 있다" 라고 적혀있었습니다.
또한 1,2,5번째 편지는 가지런한 여성의 필적인데 반해,
나머지 편지의 필적은 거친 남자의 필적으로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되어 당시 경찰은 범인이 여자와 남자가 섞인 3~4인조의 계획적인 범죄로 추측하였습니다.
수사는 원래 아이의 신변을 위해 비밀수사로 하였으나,
유괴후 기간이 오래 지나 1981년 2월 26일 공개수사로 전환하였고
당시에는 "프로파일링"같은 기술이 없어 경찰은 "최면술사"까지 동원한 상태였습니다.
마침내 당시 “새질서 새생활 운동" 이라는 켐페인을 적극 추진하던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직접 사건에 대해 알게됩니다.
'이 새끼가?'
이윤상군의 소식을 들은 전두환은 격분하였고
긴급 대국민 담화를 열어 범인에게 일종의 선전포고를 하게 됩니다.
이례적으로 유괴사건때문에 대국민 담화발표를 하게되는데 그날의 담화내용으로
전두환 대통령은 지지도가 상승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당시
"대국민 담화를 마치며 유괴범에게 본인이 전할 말이 있다. 3월 3일(제 5공화국 출범일)까지 자수하면 관용을 베풀겠다.
아이를 살려 보내면 너도 살고 그렇지 않으면 너도 죽는다.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일하는 서민들을 괴롭히는자는
내가 책임지고 그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다."
보안사령관 출신의 서슬퍼런 군사정권의 수장의 경고였던만큼 발언의 포스는 지금 생각해도 강력한 메시지 였을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범인은 묵묵부답이였습니다.
(당시 이윤상군의 집을 직접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
이후 전두환 대통령은 아예 이윤상군의 집에 찾아가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위로금(100만원)과 함께 인삼 두 상자를 전달아며
이윤상군의 부모를 위로하며 건강에 유의하라는 말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끝내 범인은 나타나지 않았고,
잡히지 않을 거란 생각에 안나간건지 무서워서 못나간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범인은전두환의 심기를크게 건드렸습니다.
이후 전두환 대통령은 경찰력을 총 동원해 반드시 범인을 검거하여 사형시킬것을 명령합니다.
이에 경찰은 용의선상에 들만한 자들은 모두 높은 강도의 수사를 진행하였으며, 고문이나 최면 등의 수법도 가리지 않았으나 범인을 쉽게 잡지 못합니다.
그리고, 범인은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에 있다는것을 알게된 것은 유괴된지 1년이 지난 후 였습니다.
(이윤상 유괴 살인사건의 범인은 "주영형")
범인은 이윤상군의 상담을 위해 불러냈던 체육교사 "주영형" 이였습니다.
그동안 강도높은 수사망을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1. 학교교사
2. 외모가 준수
3. 서울대 출신에 고려대 대학원 과정을 이수한 엘리트
라는 점에서 별 의심없이 용의선상에서 제외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 경찰은 주영형이 이전 근무하던 여자중학교에서 과외를 빌미삼아
20여명의 여중생을 강간했다는 사실을 알아낸 후 본격적인 조사에 나섰으며,
이윤상 군의 부모가 유괴당일 피해자 본인이
"선생님이 어머니에겐 말하지 말고 혼자 오라고 했다." 라고 말하며 나갔다고 말을 어머니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학교 선생님이 불렀다는 것에 부모도 크게 신경쓰지 않았던것 같습니다,
결국 거짓말 탐지기를 이용한 심문에서 주영형이 진범임이 드라났고 자백을 받아낸 것이였습니다.
충격적인 사실은 그가 당시 근무하던 중학교의 여학생 두명이 공범이었다는 사실이였는데 뿐만아니라 그 두 여학생과 더불어 아홉명의 여제자와 성관계를 맺고있었는데
그는 부인과 두 아이가 있는 아버지였다는 점이였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주영형은 왜 이런 끔찍한 범행은 저질렀던 것일까요?
범행동기를 조사한 결과 "도박으로 인한 천만원의 빛" 때문이였습니다.
그 도박빚을 갚고자 이용하기 쉬운 두 제자와 함께 범행을 계획했다고 자백한것입니다.
전체적인 범행은
범행 당시 서울대 출신의 체육교사 '주영형'은 평소 도박에 빠져 빚이 늘어만 가고 있었던 상태였는데요. 그러던 중 자신이 근무하던 학교의 가정환경조사지를 보다가 유복한 집안의 이윤상군을 발견한 것입니다.
범행 최초의 목표는 원래 이윤상군의 누나인 '이연수(당시 고1)' 양을 납치하여 금품을 얻어낼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불륜상대였던 고등학생 이양을 시켜 이연수양을 본인의 아파트로 부르도록 했지만 이연수양이 이를 거부하여 실패하자, 동생 이윤상군을 유괴하기로 계획을 변경합니다.
1980년 11월 13일(범행당일)
체육교사 '주영형'은 이윤상군에게 '상담할 일이 있으니 오후 4시 30분까지 마포고교로 오라' 고 지시합니다.
마포고교에서 만난 두 사람. 주영형은 자신의 아파트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하자며 권유.그러나 이윤상군은 어머니가 기다리시기 때문에 빨리 가야한다며 거절했는데요. 그러자 주영형은 이윤상군을 억지로 자신의 아파트로 데려갑니다.
(이윤상군은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은 적이 있는터라 왼쪽다리가 불편하여 도망치기 힘들었다는게 문제였죠 )
억지로 자신을 끌고온 주영형의 태도가 이상하다 생각했던 이윤상군은
'당신이 우리 누나도 유괴하려고 했던거였냐' 며 소리를 지르게 됩니다.
그러자 주영형은 이윤상군의 손발을 명주실 노끈으로 결박하며 위협을 가했고 그리는 이윤상군을 시켜 '이분들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전 죽어요.' 라는 음성을 녹음하게 됩니다.
1980년 11월 14일.
이윤상의 아버지는 경찰에 아들의 유괴사실을 신고함. 형사 2명이 이윤상군 집에 잠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날 오후6시. 주영형의 아파트에서는 주영형과 이윤상의 한차례 입씨름이 오갔고,
화가 난 주영형은 이윤상군의 입을 반창고로 틀어막습니다. 그후 아파트에서 나욌는데 다음날 다시 가보니 아이가 죽어있었다고 합니다.
사형을 면하기 위해 일부러 살해한것은 아니라는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1980년 11월 16일 오후 6시 40분경.
주영형은 이윤상(이미 고인이 된)군의 집에 전화를 걸어 미리 녹음해 뒀던 목소리를 들려주며 협박전화를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이날 주영형은 이윤상군의 집으로 찾아와 태연하게 이윤상군의 어머니를 위로했다는 것입니다.
1980년 11월 30일.
주영형은 불륜대상인 고등학생 이양의 협조를 얻어 이윤상군의 시체를 북한강변에 암매장합니다.
사실 사건초반에 경찰은 주영형을 용의선상에 올리고 조사를 하기도 했었습니다.
사건당일 불러낸 주영형은 어떻게 보아도 제일 유력한 용의자가 분명했기 때문인데요
그러나 그는 학교선생님이라는 신분과 사전에 치밀한 범행계획을 세우고 실행했었기에
경찰은 그가 제시한 알리바이를 믿게 했다고 합니다.
훤칠한 외모(당시 기준)와 교사라는 직업에대한 사회적 인식,
그리고 사전에 계획한 치밀한 알리바이뿐만 아니라 심지어 방송국이 취재차 학교를 방문했을때
'범인이 꼭 잡혀서 죗값을 받았으면 좋겠다' 라며 인터뷰까지 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
아무도 그를 용의선상에 놓지 않았었다고 합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검거즉시 사형을 내리도록 지시했습니다.
이미 이윤상군은 유괴일 다음날 이미 사망했으며
이에 분노한 전두환 대통령은 주영형의 범행이 살인인지 감금치사인지 불분명한 경우에 사형이 내려지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임에도 "아동 납치" 자체에 가중법을 붙여
1심,2심,3심 모두에 사형을 내리도록 지시했습니다.
결국 범인 주영형은 사형선고를 받지만 그 이후에도 계속 상소, 항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항소심까지 사형으로 종결, 전두환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최대한 빨리 사형을 집행하도록 지시하여
판결 11일만에 주영형은 사형집행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주영형과 함께 범인을 모의했던 두 여제자는 유인,감금,살해 등에는 별 혐의가 없었고
범인에 의해 협박편지나 전화등에 아용된 것을 감안해 각각 징역 2년과 3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이 사건에서 주범은 체육교사 주영형, 종범은 여중시절부터 불륜관계를 이어오던 A양과 B양이었던것으로 정리됩니다.
(당시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이윤상 유괴 살인 사건" 은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습니다.)
추가로 주영형은 사형을 받고 죽기전 3심 판결후 죄를 뉘우치며
"내속에 악마가 있었다. 부인과 부모님께 죄송하다. 나라는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었다고 여겨달라" 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신의 각막과 콩팥등을 4명에게 기증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리고 그의 유언대로 그의 눈과 콩팥등은 대학생 4명에게 기증되었다고 함.
하지만 그의 장기기증은 그가 원해서였다는 설과 경찰에서 반강제적인 권유로 기증했다는 설이 있긴 합니다.
그리고 이윤상군 유괴 살인사건을 수사중 수사과장을 경찰서장으로 파격 승진시켰으며 수사 종결후 다시 한번 경무관으로 승진시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전쟁에서 공이 있는자가 승진을 해야한다." 는 군인정신에 입각한 것인데 야당에서는 "정작 본인은 전쟁에서 공도 안세웠으면서 4스타를 달았다" 라며 비판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수사에 참여한 말단 직원들에게까지 당시로써는 상당한 금액인 "100만원" 을 하사하여 이 사건에 대한 본인의 관심과 의지를 보여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윤상군의 친누나는 범인검거직후 전두환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대통령님의 노력에 감사드리며 열심히 공부해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 고 하고 나중에 중앙대 수학과에 진학하였다고 합니다."
차후 이윤상군 누나가 대학에 진학했을때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대학학비를 모두 대신내줘
국민들에게 ''정치는 공포스럽지만" 힘없는 서민들에게는 한없이 인자한 대통령" 이라는 찬사를 듣기도 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을 미화하거나 그럴 의도는 없습니다 . 참고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