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5월.
광주에서 간첩들이 국민들을 선동하고 있고 이에 동조하는 폭도들이 연일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보도가 연일 계속되고 있었다.
기억나는 신문1면 제목이 "불타는 광주"였다.
신촌의 집에서 용산에 있는 학교까지 통학하던 나는 하교길 서대문 굴레방다리에 멈춰서 움직이지 못하는 143번 버스 창밖으로 보았다.
끝도없이 이어지는 군용수송트럭에 군장을 매고 착검을 한 공수부대원들...
다음날 신문에는 광주에 군인들이 투입되어 간첩을 사살하고 폭동을 진압하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다.
폭압적인 보도통제 속에 신문에서는 무등산 수박이 판매할 길이 없어 썩어가고 있다는 것이 주요기사였지만 나이 어린 고등학생이던 나와 친구들은 광주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무참히 살해되었다는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차를 타고 광주시내를 돌며 울며 선무방송을 했다던 여학생의 얘기는 전설처럼 전해졌고 그녀의 생사가 너무도 궁금했다.
광주는 그렇게 무참히 짓밟히고 끝나는 것 같았다.
2년뒤 대학에 입학하고... 학생보다 더 많은 수의 회색점퍼를 입은 짭새들이 매일 캠퍼스 잔디밭에서 아침부터 해질녁까지 진을 치고 있었다.
작은 공을 가지고 손야구를 하거나 다방구같은 놀이를 하며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그들의 일인것 같았다.
하지만 그땐 이미 많은 죽음을, 피를 본 뒤인지라 학생들의 시위도 살벌하기 그지없었고 분신과 투신이 빈번했다.
그렇게 직간접으로 광주를 겪은 80년부터 80년대말까지 소위 386세대에게 캠퍼스의 낭만같은건 애초에 없었다.
그 세대를 살면서 그래도 스스로 자랑스러운건 불의에 굴하지 않고 싸웠다는 것....
비록 나중에 몇몇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의 사꾸라 짓으로 소위 386세대라는게 그라 자랑스러운 딱지가 아니게 되어버렸지만.
잔디밭에 앉아있다 "아침이슬" 노래가 나오면 털고 일어나 스크럼을 짜고 "님을 위한 행진곡" 을 부르던 30여년전의 기억이
아직 눈에 선하다..